한중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 나라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영역을 확대해나가는 과정에서 지나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완화될 것이고, 국경과 장벽이 낮아지고 허물어지면서 공존과 상생의 마음이 커질 것이다.
소설가 일본 해상 초계기가 한국 해군으로부터 추적 레이더 조준을 당했다는 일본 정부의 항의로 시작된 한-일 갈등이 한달 넘게 이어지는 가운데 1월25일 <아사히신문>은 방위성의 한 간부가 ‘한국 피로증’을 거론하며 “일본 열도를 미국 서해안의 캘리포니아 앞바다로 옮기고 싶다. 그러면 북한도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유아적이며 백일몽 같은 말이 일본 주류신문에 보도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도 하면서, 한-일 관계가 그만큼 비정상적이라는 반증으로도 보여 무척 씁쓸했다. 한-일 관계의 어려움은 피해와 가해의 관계에서 동반 관계로 변화해야 하는 데에 있다. 역사는 해석이라는 그물망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해석에 따라 역사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민족주의 감정에서 벗어나 객관적 시각에서 한국과 일본이 공유할 수 있는 ‘기억 공간’을 찾는 노력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런 역사적 작업에 중국이 참여하면 한결 풍요로워질 것이다. 일본 식민통치와 조선의 독립운동 영역이 중국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관계에서 백일몽 같은 말은 백해무익이다. 백일몽은 실현 불가능한 헛된 공상이지만 상상은 다르다. 상상은 예술의 근원이자 인류 문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모순의 누적으로 세계가 피폐해져가는 상황에서 동북아시아의 주축을 이루는 한국, 중국, 일본의 경제공동체에 대한 상상을 해봄직하다. 유럽연합을 생각하면 결코 지나친 상상이라고 할 수 없다. 유럽연합의 모태는 1, 2차 세계대전에서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독일이 적대 요인을 극복하고 평화 실현을 위해 1952년 설립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였다. 그것이 유럽경제공동체로 발전하였고, 1993년 마침내 유럽연합이 출범함으로써 ‘하나의 유럽’이라는 꿈을 구체화했다. ‘한중일경제공동체’를 이루어내면 ‘아시아경제공동체’라는 새로운 꿈을 끌어당길 것이며, 더 나아가 ‘아시아연합’도 꿈꿀 수도 있다. 유럽연합의 생성 과정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16년 6월 영국이 국민투표로 브렉시트를 결정함으로써 유럽연합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브렉시트를 이끈 세가지 동력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남유럽국가 지원으로 인한 재정분담금 증대, 시리아 사태 이후 유럽으로 밀려들어오는 난민과 이민자에 대한 독자적인 통제의 필요성,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럽연합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국가주의였다. 브렉시트의 주역은 ‘왜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와 난민과 이민자를 도와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대영제국’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보수세력이었다. 그 결과 영국은 지금 총체적 혼돈에 빠져 있다. 전문가들은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 경제에 대해 2차대전 이후 최대의 위기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우리와 우리의 미래를 사랑하기보다 외국인을 증오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처참해진다” “나는 영국인이 아니다. 유럽인이다”라는 영국 청년들의 발언은 브렉시트의 본질을 관통한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체코, 헝가리 등에서 유럽연합 탈퇴를 외치는 이들이 모두 보수 극우세력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중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 나라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 공동체가 세 나라 사이의 차이와 갈등을 융화하면서 공동체의 영역을 점차 확대해나가면 꿈처럼 보이던 것이 현실로 변화한다. 이 과정에서 지나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완화될 것이고, 국경과 장벽이 낮아지고 허물어지면서 공존과 상생의 마음이 커질 것이다. 한중일 공동체의 첫걸음은 남북한의 공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같은 민족끼리 공존을 못 한다면 다른 민족과도 할 수 없다. 남북의 공존은 중국, 일본과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한층 힘이 실리면서 동북아시아의 평화 정착에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다. 남과 북은 각각 ‘절반의 진실’에 갇혀 70여년을 살아왔다. 70여년 동안 남과 북의 상황은 마주 달리는 기차의 모습과 흡사했다. 기차 안의 사람들은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몰랐다. 앞으로 우리는 잃어버린, 혹은 스스로 버린 ‘절반의 진실’을 찾는 길로 과감히 들어서야 한다.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며, 동시에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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