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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25 18:32 수정 : 2018.01.25 19:03

촛불을 든 사람들과 꽃을 든 사람들이 쉼 없이 찾아왔다. 폐허의 거리는 꽃과 촛불로 환했다. 그 환한 공간은 고립되어 있었다. 우리가 치르고 견뎌야 할 희생과 고통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찬
소설가

자본의 목적은 이윤이다. 이윤이 있는 곳이면 자본은 즉각 이동한다. 가장 빨리 이동하는 자본이 이윤을 삼킨다. 자본의 물신주의는 이익이라는 지상목표를 위해 사람을 도구화한다. 존재 자체가 목적인 사람이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물신주의의 무서움은 타인과의 소통을 막아버리는 데에 있다. 사람들의 삶이 피륙의 실처럼 연결되어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있는데, 물신주의는 이런 생각을 끊어버린다.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이익 추구가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린다. 용산참사는 자본의 물신주의와 국가폭력이 결합되어 일어난 비극이었다.

2009년 1월19일 철거민들은 용산 4구역 재개발 지역 상가 건물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농성을 시작했다. 용산 재개발 사업에는 150층 빌딩 건설 등 사업비만 28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개발이익이 걸려 있었다. 시공사들이 얻는 이익은 4조원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상가 세입자들은 사업 결정과 추진 과정은 물론 개발이익으로부터도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주 보상비만으로는 살길이 막막한 그들에게 망루 농성은 벼랑에 몰린 생존권의 절박한 표현이었다. 생존권은 사람으로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대테러 담당 경찰특공대가 농성 진압 명령을 받은 것은 1월19일이었고, 다음날 새벽 3시30분 현장에 도착했다. 6시30분 작전이 시작되면서 경찰특공대를 실은 컨테이너가 지게차에 실려 망루로 올려졌다. 경찰특공대는 망루 구조는 물론 망루 안에 화염병과 시너 등 위험물질들이 얼마나 있는지조차 몰랐다. 농성 장소에 인화물이 있으면 진입해서는 안 된다고 경찰 진압작전 지침서에 나와 있다. 망루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불이 난 것은 7시30분 전후였다. 그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했다.

2009년 2월9일 검찰은 경찰관의 사망 책임을 물어 살아남은 농성자들을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죄목으로 기소하고, 6명의 사망에 대해 경찰의 법적 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해 10월28일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농성자 7명에게 징역 5~6년을 선고했다.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화재 발생 원인이었다. 경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채증 동영상에는 화재 발생 전후 시간대의 영상이 없었다. 검찰은 1만여 쪽의 수사기록 중 경찰 핵심 지휘관들의 진술조서 등이 포함된 3천여 쪽은 제출을 거부했다.

소설가 조세희는 2009년 11월에 펴낸 ‘작가선언 6·9’의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발문에서 “동시대인으로서 이러한 비극과 슬픔, 불행한 폭력을 용인한 우리는 다 같은 죄인이다”라고 썼다. ‘작가선언 6·9’는 2009년 들어 민주주의의 후퇴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음에 공감한 문인들의 연대그룹으로 그해 6월9일에 ‘6·9 작가선언’을 발표, ‘용산참사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상처’라는 판단에 합의했다. 그들은 “망루를 불태운 것은 우리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가치들을 내던지고 ‘뉴타운’과 ‘특목고’를 삶의 이유로 받아들인 우리 모두가 한 일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그것들은 돈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괴물이었으므로 괴물 같은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라고 헌정문집 서문에 썼다.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참사 355일 만인 2010년 1월9일이었다. 서울역 광장에 마련된 영결식에서 1년 동안 검은 상복을 입었던 유족들이 망자에게 꽃을 바쳤다. 영결식을 마친 후 운구차는 눈이 휘날리는 길 속으로 들어갔다. 1년 가까이 냉동고에 갇혀 있었던 망자들은 그날 저녁 비로소 흙에 묻혔다.

재개발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남일당 주변은 폐허였다. 355일 동안 해가 지면 사람들이 폐허의 거리로 모여들었다. 유족들은 남일당 1층에 마련한 분향소를 지켰고, 가톨릭 사제들은 매일 저녁 7시 미사를 집전했다. 예술인들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시를 낭송하고, 공연하고, 춤을 추었다. 촛불을 든 사람들과 꽃을 든 사람들이 쉼 없이 찾아왔다. 폐허의 거리는 꽃과 촛불로 환했다. 그 환한 공간은 고립되어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무너졌음에도 꽃과 촛불이 폐허 속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은 우리가 치르고 견뎌야 할 희생과 고통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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