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가 숨을 거둔 것은 지난 8월11일 새벽이었다. 향년 79. 사인은 영양실조로 인한 폐렴이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육신이 그녀의 뼛속 영양소까지 앗아가 뼈가 녹아내렸다고 했다. 전혜린이 선택한 죽음과 극단적으로 다른 형태의 죽음이었다.
소설가 -죽음은, 누구의 죽음이나 엄숙한 사실이다. 더구나 그것이 의식적으로 선택되고 논리적으로 사유된 결과인 경우, 우리는 무엇이 그를 죽음에 던져 넣는가를 알고 싶어 해도 마땅할 것이다. 전혜린은 이 글을 쓰고 며칠 후(1965년 1월10일) 죽었다. 향년 31. 공식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이었다. 그녀의 ‘소울메이트’로 훗날 <전혜린 평전>을 쓴 작가 이덕희는 죽음 하루 전 전혜린을 단골다방 ‘학림’에서 만났다. 전혜린이 ‘세코날 마흔 알을 흰 것으로 구해 좋아 죽을 지경’이라고 말했을 때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상용했고, 때때로 신경을 마취시키기 위한 ‘매개물’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혜린의 죽음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 한순간 경악했지만 어쩐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회고컨대 그 당시 나를 지배한 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만큼 나는 그때 전혀 울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정직한 고백이다. 뭔가 그녀에게 이니셔티브를 뺏겨버린 것 같은 묘한 감정이 한동안 나를 지배한 것이다. 그녀의 상실로 인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실감하게 된 건 아주 뒷날의 일이다.” 당시 스물아홉살이었던 이덕희는 자살을 꿈꾸고 있었다. 그녀의 이십대는 ‘절대와 완전에 대한 과대망상적 집착’으로 점철된 시절이었다.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무엇이나 다 되어보고 싶었고, 온갖 것을 다 사랑하고 싶었다. 삶의 모습이 날아오르는 자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삼십대란 힘의 한계를 깨닫는 시간, 온갖 가능성 대신 한 가지 확실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 시간, 날아오르는 자세에서 발을 땅에 내려놓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덕희가 스물아홉살까지만 살기로 맹세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혜린의 죽음이 벼락처럼 그녀를 내려친 것이다. 내가 이덕희와 교유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이덕희는 그때까지도 발을 땅에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신의 한계를 몰랐던 20대 시절에는 별을 향해 날아오르는 자세를 취할 수 있었지만, 정신의 한계를 무섭도록 느끼는데다, 건강을 잃어 육신의 눈치를 보고 있던 50대 중반의 그녀에게 날아오르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땅에 발을 디딜 수도, 날 수도 없는 존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무엇일까? 그것이 어떤 형태의 자세이든 일상인에게 낯설고 이상하게, 때로는 기이하게까지 보였을 것이다. 그런 실존적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책과 음악 속으로 들어가 망자의 혼들과 함께 살아가게 했다. 글을 쓰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라고 했던 그녀가 건강 악화로 글을 거의 못 쓰게 된 것은 70세로 들어서면서였다. 시력이 약해져 책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렸던 그녀에게 환청 증세까지 생겨 짧은 잠마저 잠식당했다. 그녀가 유일하게 누리는 호사는 커피였다. 억지로 하루 한번 식사를 하는 것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오래전부터 그녀는 나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육신이라는 지옥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덕희가 숨을 거둔 것은 지난 8월11일 새벽이었다. 향년 79. 사인은 영양실조로 인한 폐렴이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육신이 그녀의 뼛속 영양소까지 앗아가 뼈가 녹아내렸다고 했다. 전혜린이 선택한 죽음과 극단적으로 다른 형태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루한 방에서 홀로 그렇게 죽어갔다. 누구의 시선도 없이. 이십대 시절 이덕희는 세코날을 상습적으로 복용했다. 여섯 알 이상 먹으면 생명에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음에도 열 알까지 먹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날은 몸 안에서 작용하는 세코날의 양에 따라 의식이 어떤 상태로 변하는지 너무 궁금해 일기장을 펼쳐놓고 직접 실험까지 했다. 그런 그녀가 뼈가 녹아내리는 참혹한 상태에 이르도록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을 보려고 삶과 죽음 사이, 그 아득한 심연 속으로 그토록 깊숙이 들어갔을까? 그리고, 무엇을 보았기에 죽음의 얼굴이 그토록 평안하고 아름다웠을까?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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