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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29 19:51 수정 : 2019.05.29 20:00

여러 가지 반찬 통조림.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헐~

여러 가지 반찬 통조림.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몇 년 전 1년짜리 미국연수를 가면서 싼 마지막 짐은 통조림이었다. 일주일 여행 가면서 고추장에 김치까지 싸가는 여행자들을 촌스럽다고 비웃는 나였지만 1년의 체류라니, 출발도 하기 전에 김치찌개가 맹렬히 그리워져 김치 대체용으로 깻잎 통조림을 종류별로 가방 깊숙이 찔러 넣었다. ‘아무리 먹고 싶어도 한 달에 두 개 이상 따면 파국이다!’라고 비장하게 결심하면서.

도착한 곳은 엘에이(LA) 아랫동네. 동네 지리를 익히기 위해 차로 5분 달려간 곳에는 한국 대형마트 3개가 교차로 사이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겨울에 집 앞에서 오로라가 보인다는 캐나다 극지방이나 놀거리라고는 로데오 구경이 유일한 와이오밍의 시골 동네를 떠올리며 캘리포니아행 짐을 싸온 것이었다. 한국보다 더 많은 김치 종류와 통조림을 파는 한인 마트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시장을 보며 질리게 김치찌개를 해먹었다. 캐나다에서 오로라를 보며 사는 사촌이 왔을 때는 한국서도 거의 안 사본 산낙지까지 사다 먹었다. 신줏단지 모시듯 싸왔던 통조림은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 갔다.

1년 뒤 한국으로 돌아올 짐을 싸면서 가구나 옷가지, 주방 도구 등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마지막 정리를 할 때 찬장에 오롯이 쌓여있는 깻잎 통조림 십여 개를 발견했다. 이미 물건 다 나눠주고 이별의 포옹까지 한 친구들에게 깻잎 통조림 가지러 차 타고 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이민 가방 깊숙한 곳에 통조림들을 찔러 넣었다. 서울서 엘에이까지 9600㎞를 날아갔던 통조림은 다시 9600㎞를 돌아와 찬장으로 들어갔다. 이후 깻잎 통조림 한 캔씩 딸 때마다 캘리포니아에 대한 향수를 음미하면서 흰밥을 싸 먹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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