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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9 09:27 수정 : 2019.12.19 20:30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허지웅의 설거지

1년 전 혈액암 발병한 나
병실에서 만난 ‘3호실의 무솔리니’ 불쾌해
간호사 검은 털모자 선물했지만 인사 못 해
나중에 큰 실수라는 걸 깨달아
제때 고맙다 인사하는 건 중요한 결심에 이르는 길
앞으로 그런 결심에 대해 얘기할 터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그가 돌아왔습니다. 작가 허지웅. 허 작가는 2016년께 ESC에 ‘허지웅의 설거지’를 연재했습니다. ‘잡다한 일들을 설거지한다는 마음으로 씁니다’로 연재 포부를 밝힌 그는 당시 특유의 위트와 날선 시선으로 미세한 우리들의 얘기를 풀어놔 팬들의 찬사를 받았지요. 이후 그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인생의 고비를 맞았습니다. 어느 날 발병한 혈액암. 그 고통을 이겨낸 그가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허지웅의 설거지’ 시즌 2. ‘제때에 제대로 고맙다고 말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다’는 새 연재 포부를 밝히면서 말입니다.

1년 전 오늘, 나는 혈액종양내과 병동 무균실에 입원했다. 항암 합병증으로 인한 고열이었다. 입원할 때만 해도 앞으로 한 달 이상, 그러니까 병동에서 생일과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모두 보내고도 한참 있다가 겨우 퇴원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항암 치료는 이미 시작한 후였다. 앞으로 닥쳐올 항암 부작용이 두렵다기보다 궁금한 때였다. 병동에서 나는 이런 호기로운 글을 에스엔에스(SNS) 계정에 올렸다.

“악성림프종 진단을 받았습니다. 혈액암의 종류라고 합니다. 붓기와 무기력증이 생긴 지 좀 되었는데 미처 큰 병의 징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확진까지 이르는 요 몇 주 동안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리 약속된 일정들을 모두 책임지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촬영까지 마쳤습니다. 마음이 편해요. 지난주부터 항암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함께 버티어 나가자’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삶이란 버티어 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마음속에 끝까지 지키고 싶은 문장 하나씩을 담고, 함께 버티어 끝까지 살아냅시다. 이길게요. 고맙습니다.”

‘이길게요’의 마지막 모음이 동그랗게 말린 입술 끝에서 아직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는 벌써 침상 위에서 방금 분명히 잠들었던 것 같은 고양이마냥 펄떡거리고 있었다. 아팠다. 모르핀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어찌 됐든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에 관한 이야기 따위를 하려는 건 아니다.

무균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긴 이후 많은 사람을 보았다. 비참했다.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루의 절반 동안 주사를 맞고 있어야 했다. 시퍼렇게 된 양쪽 팔에 더 이상 주사를 맞을 혈관을 찾을 수 없어서 발목과 사타구니를 헤집기 시작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유독 내 신경을 긁는 환자가 있었다. 60대 아저씨였다. 입원하던 첫날만 하더라도 저 아저씨가 어디가 아픈 건가 싶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쾌활함과 불쾌함의 경계라는 게 있다면 그걸 애써 설명하려 드는 것보다 이 아저씨를 5분 동안 지켜보는 편이 빠를 것이다. 나는 그를 ‘3호실의 무솔리니’라고 불렀다.

무솔리니는 한파가 절정에 이른 새벽에도 자기가 더우면 병실의 보일러 전원을 내렸다. 약을 숨기고 내어주지 않는다며 간호사에게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침을 뱉기 일쑤고 식사 시간에 방귀를 뀌었다. 무솔리니가 가래를 모으느라 목을 긁으면 그걸 언제 어디에 뱉으려나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았다. 무솔리니는 그걸 바닥에 뱉거나 종종 그냥 삼켰다. 둘 다 싫었다. 무솔리니만 문제가 아니었다. 병실은 도처가 죽음이었다. 내 상태가 좋아질 리 없었다. 이제 겨우 첫 번째 항암이 끝났을 뿐인데, 이걸 5번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아침에 깨고 싶지 않았다.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병인데 방송 판이 층간소음이고 악플러가 동네 양아치라면 이 병실은 노르망디 해변이었다.

새해를 넘긴 어느 날 아침, 밤새 꽂고 있었던 링거 팩을 교체하기 위해 간호사 한 분이 찾아왔다. 링거 팩을 교체하고 아침에 먹을 약을 건네주었다. 약을 받아드니 냉소적인 미소가 입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먹으나 마나 아픈 건 똑같은데, 이걸 왜 먹어야 하는지. 그런데 간호사가 자리를 뜨지 않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웬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고맙다고 말하고 넙죽 받았다. 간호사는 빠르게 사라졌다. 꾸러미 안에는 검은 털모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는 꾸러미를 사물함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침상에 다시 털썩 누웠다. 무솔리니가 다시 한번 파쇼 가래침을 뱉기 위해 목을 긁기 시작하길래 나는 얼른 돌아누웠다.

처음에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항암을 하면서 머리카락이 빠진 환자들에게 주는 일종의 환자복 같은 건가 싶었다. 그러나 이내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아 선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머릿속은 온통 죽음이라는 결론으로 가득했다. 털모자라니. 빠른 죽음이냐 느린 죽음이냐를 따지고 있는데,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은 머리를 가리고 말고는 고심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에 털모자라니.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은 건 정말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세 번째 항암 치료가 끝난 이후 집에서 통원하던 나는 항암 부작용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상태로 완전히 바닥을 찍었다. 밥을 먹으면 목구멍과 싸웠고 샤워를 하면 물과 싸웠으며 침대에 누우면 천장과 싸워야 했다. 처음부터 가족을 포함해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도록 조치해두었기 때문에 외로움도 시비를 걸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은 ‘그 밤’이라고 부르는 날을 맞았다. 가장 위험했던 밤이었다. 임사체험이라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밤은 가파르고 신비했다. 그 밤에 관해서는 언젠가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 밤을 지나 보내고 나서 나는 살아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에는 확실히 야심처럼 보였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야심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동기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정말 우연히 나는 그 털모자를 떠올렸다.

털모자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창피하다. 나는 왜 제때에 제대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요는 그렇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전히 괴롭다. 그 간호사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꾸러미를 받아들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제때에 제대로 된 고마움이라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여태 살아오면서 스스로 자부했던 것처럼 다른 건 몰라도 먼저 인사하고 인사할 때는 확실하게 한다는 익숙한 원칙을 반복한 것뿐이었다. 그 털모자를 준비한 마음이 얼마나 드물고 귀한 것인지에 관해 나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죽음이라는 결론에만 몰두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결론 앞에 다른 것들은 한없이 사소한 소음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이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 시작한 게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끄적거려 놓고서 이 말의 더 나은 쓰임을 찾을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아껴둔 문장이었다. 이걸 새삼 떠올린 건 내가 쓴 말이 너무 근사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저 떠벌린 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죽음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동안, 나는 죽음 이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제발 거기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을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100살 넘게 살지도 모르고, 재발한다면 내년에 다시 병동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의욕이 넘친다. 그리고 많은 결심들을 한다. 나는 제때에 제대로 고맙다고 말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다.

허지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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