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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16 19:22 수정 : 2016.11.17 09:12

[ESC] 허지웅의 설거지
100만개의 촛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3차 범국민행동’ 문화제가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려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 올리며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 일은 언젠가 꼭 갚을게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참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에 진행자로 섭외가 되었다가 이후로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아 취소가 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러나 유독 한 방송사에서만 “이 사람은 안 된다”며 최종 결제 단계에서 일이 반복해서 엎어지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벌써 여섯 번째였다.

<에스엔엘(SNL) 코리아>의 한 시즌에 고정출연했었고 <택시>나 <마스터셰프 코리아>를 비롯해 해당 계열 방송사의 다른 프로그램들에도 나갔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 이후로 그렇게 된 것이다.

작가일을 때려치우고 방송일을 본업으로 삼겠다고 고민해본 일이 없었다. 이미 내가 좋아하는 다른 프로그램들을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는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와는 일을 할 수 없다, 고 명시가 되면 서로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도저히 경위를 알 수 없는 모종의 이유 때문에 배제되고 있다는 건 당사자로 하여금 생각보다 끔찍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요컨대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맞게 되면 사람은 먼저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렇게 되었는지 스스로를 살피기 마련이다. 물론 이러한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는다. 설명이 없으니 알 수도 없다. 해답이 없는 질문이 그치고 나면 이제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있어서 방어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말조심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전쟁과 독재자의 기억에도
이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좌절하고 침묵하는 것 같은
시민 공동체의 힘이었다

어느 날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현 정권의 문화정책과 관련한 질문을 받았다.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어떤 글을 쓰면, 어떤 영화를 만들면 불이익을 받겠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토양 위에서는 어떤 문화도 자라나지 않는다. 멀쩡하던 영화제가 망가지고 모든 영역에서 자기 검열이 판을 치고 정권에 반하는 말을 했다가 언제 어떻게 국정원에서 마티즈를 보낼지 모른다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문화를 정책적으로 융성하겠다’는 말은 또 다른 눈먼 돈잔치를 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정책은 애당초 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혼자 앉아 있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지저분했다. 일어섰다 앉았다 서성대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내려놓기를 삼십 번 정도 반복한 것 같다. 나는 마침내 결심을 했다. 그리고 흡사 <그래비티>에서 지구에 도착한 샌드라 불럭이 대지를 밟고 일어서는 박력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기자님.

네.

마티즈 이야기는 빼주세요.

나는 그날 밤 너무 창피해서 술을 진탕 마시고 기절해버렸다.

이러다가는 내가 망가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쪽에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이유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해당 방송사의 고위직과 친한 지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유가 뭔지 좀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누구에게 부탁하는 걸 싫어해서 말을 꺼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답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국제시장>에 비판적인 의견을 냈다가 논란에 휩싸였던 일이 문제였다. 당시 그 방송사의 모기업 회장이 수감 중이었는데, 이런 상황에 정권에 밉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단은 출연금지가 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일선 피디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르니까 섭외가 자꾸 가는 거고, 최종 결제에서 엎어지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좀 기다리면 해결될 거다, 라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짐작은 했지만 정말 그것 때문이라니 조금은 허무했다. 이전에도 개그맨 친구와 해당 계열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다가 잘 안되었는데 그때 이 친구로부터 “형 여기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다는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었다. 대체 <국제시장>은 나와 무슨 악연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유를 알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가 원했던 건 오직 명쾌한 인과관계뿐이었다. 나는 그날 밤 두 다리를 다 뻗고 오랜만에 아주 잘 잤다.

이게 다 1년 전 일이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몇달 전 회장은 석방되었다. 정권에 레임덕 분위기가 감지되면서 내 출연금지도 어느 시점에서 풀린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 해당 계열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앞으로 몇 개 더 할 예정이다.

어머니와 촛불집회에 참석한 허지웅씨. 허지웅 페이스북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열렸다. 거의 전 영역에서 대통령과 비선 실세의 비리가 밝혀지는 가운데 정권 차원에서 해당 방송사의 모기업에 압력을 행사한 사실 또한 드러났다. 그룹 부회장을 물러나라고 지시한 정황마저 알려졌다. 정권에 비판적인 영화를 만들어 찍혔던 이 기업은 그래서 <국제시장> 같은 영화를 만들었고 계열 극장에서 그토록 소위 ‘국뽕 광고’를 틀어댔던 것이다. 지금은 그 ‘국뽕 광고’도 극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이 방송사가 그토록 정권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들의 자기 검열이 내 자기 검열로 이어졌다. 자기 검열은 하부구조로 전염되기 마련이다.

지난 세 번의 촛불집회에 모두 참석했다. 지난 주말에는 100만명이 광장에 모였다. 거기서 엄마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물러나야지”라는 짧은 말을 남겼다. 정권 퇴진을 목적으로, 그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 모였는데 아무런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회 해산이 선언되자마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다 빠져나갔다. 쓰레기도 없었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다.

이 시민들을 담기에는 나라가 너무 옹졸하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내게 사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는 요즘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공동체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한국의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록이다. 식민지배와 전쟁과 독재자와 너무 많은 죽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모두 해낸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다. 분명히 망해도 여러 번 망했어야 할 만큼 잘못된 것들이 거의 청산되지 않은 후진 현대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해내고 자랑할 만한 유산을 만들어낸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언뜻 주위가 산만하고 쉽게 좌절하거나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명백한 끓는점을 가지고 있다. 이 끓는점에 도달하면 우리 공동체는 반드시 일어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다시, 그 끓는점이다.

허지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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