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8.22 20:34
수정 : 2016.08.22 21:37
스포츠에는 여러 욕망과 감정이 뒤엉켜 있다. 스파이크로 때린 공 하나에도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고, 찌르기 한 번에도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 갑작스런 되치기 한판패에 세계 최강 선수도 눈물을 흘리며 지고서도 진심으로 상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2016 리우올림픽의 주요 장면을 희로애락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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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싱 에페 박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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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喜): 기쁨
경기를 중계하던 방송사 해설위원조차 “이젠 이기기가 어렵다. 아쉽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스물한살의 청년은 혼자서 “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남자 펜싱 에페 종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박상영(한국체대)이다. 동시 타격도 득점으로 인정되는 에페 종목에서 10-14의 점수를 15-14로 뒤집는 경기는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 기적 같은 역전극을 박상영은 올림픽 결승전에서 해냈다. 박상영의 “할 수 있다”는 주문은 전염성이 강했다. 세계 최고 중국 선수들과 당당히 겨뤘던 탁구 정영식(24)은 동메달이 걸린 독일과의 단체전 첫 개인전에서 극적으로 역전승했다. 정영식은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박상영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양궁의 장혜진과 구본찬, 여자 골프의 박인비는 올림픽 역사에 이름을 뚜렷이 새겼다. 장혜진이 여자 양궁 2관왕, 구본찬이 남자 양궁 2관왕을 차지하며 한국은 사상 첫 양궁 전 종목 석권이란 기록을 세웠다. 박인비(28)는 손가락 부상으로 올림픽 출전도 불투명했지만, 정작 경기에 나서자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박인비는 4라운드 합계 16언더파로 2위 리디아 고에 5타 차로 여유있게 승리했다. 박인비의 금메달을 지원한 박세리 감독의 리더십도 함께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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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정에 항의하는 레슬링 안한봉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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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怒): 분노
역대 올림픽에서 대중의 분노를 일으키는 장면은 대개 ‘편파 판정’이었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너무나도 길었던 ‘1초’ 때문에 준결승에서 패배한 여자 펜싱의 신아람이 대표적이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편파 판정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레슬링의 희망이었던 김현우(28)는 16강전에서 러시아의 로만 블라소프에게 종료 10초 전 고난도 기술을 걸어 성공시켰다. 심판이 4점을 인정하면 경기를 동점으로 만들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심판은 2점으로 인정했다. 안한봉 레슬링 감독은 심판에게 따지다가 퇴장당했다. 대중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예상외로 함께 분노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침착했다. 김현우 역시 패배를 딛고 패자부활전에서 승승장구하며 동메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었다.
진짜 화나는 장면은 오히려 경기장 밖에 있었다. 올림픽에서 12개 메달을 따낸 라이언 록티(32)를 비롯한 4명의 미국 수영 대표팀 선수는 지난 14일 브라질 리우 시내에서 권총 강도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올림픽조직위원회 사과까지 받았으나 브라질 법원이 이들의 거짓말을 밝혀냈다. 록티 일행은 주유소에서 난동을 피웠고 강도를 당했다는 주장은 자작극이었다.
러시아 대표팀으로부터 촉발된 도핑 파문도 올림픽 기간에도 이어졌다. 남자 역도 69㎏급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던 이자트 아르티코프(키르기스스탄)는 금지약물 복용이 적발돼 올림픽 중에 메달이 박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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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대표팀 손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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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哀): 슬픔
이번 유도 대표팀의 별명은 ‘어벤저스’였다. 세계 1위가 네 명이나 포진한 역대 최강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결과는 은메달 둘, 동메달 하나로 ‘노골드’였다. 16강전에서 패배한 남자 60㎏급의 김원진(24)은 진한 눈물을 흘렸다. 재일동포 안창림(22)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결승전에서 패배한 여자 48㎏급의 정보경도 은메달을 따고서 눈물을 보였다.
남자 축구 대표팀의 손흥민은 8강에서 온두라스에 패한 뒤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세계적인 배구 선수인 김연경도 8강에서 네덜란드에 패한 뒤 눈물을 삼켰다. 우생순 멤버인 오영란(44)과 우선희(38)도 투혼을 발휘했지만, 메달을 따기엔 역부족이었다. 오영란과 우선희는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28-22로 이기고도 눈이 퉁퉁 불도록 울었다. 한 번 은퇴했던 선수들이 올림픽 금메달을 바라보며 다시 뭉쳤지만, 성적은 여자 핸드볼 사상 첫 올림픽 예선 탈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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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이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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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樂): 즐거움
패배가 꼭 눈물을 의미하진 않는다. 남자 태권도의 이대훈(24)은 지고서도 환하게 웃었다. 오히려 상대 선수를 위해 축하의 박수를 쳐주더니 더 나아가 상대의 손을 번쩍 들었다. 이대훈은 “어릴 때는 지고 나면 내가 슬퍼하기에 바빴다. 런던 대회 때도 너무 아쉬워 상대가 기뻐하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지면 아쉬워서 속으로는 헤드기어를 집어 던지고 싶을 때도 있지만, 훌륭한 경기를 보여준 상대를 존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대훈이 보여준 스포츠맨십은 한국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역도 이희솔은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현지 기자들에게 직접 셀피(셀프카메라 사진)를 제안할 정도로 발랄한 모습을 보여줬다. 복싱 함상명 또한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상대 선수의 손을 들어줬다. 체조 이은주는 북한 체조 선수 홍은정과 밝은 표정으로 셀피를 찍어서 국내외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남북한 장벽을 허문 스포츠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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