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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28 19:25 수정 : 2016.08.28 19:27

‘코미디 산증인’ 구봉서 별세
‘웃으면 복이 와요’로 전성시대
‘김수한무…’ 등 숱한 유행어
생전 먼저 간 배삼룡 그리워해
코미디페스티벌 열린날 비보
“코미디 잘 되는 것만 바라셔”
“그 분의 코미디는 위로였다”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2013년 11월18일 ‘2013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 참석했던 모습. 연합뉴스
“설날이었나, 선생님을 찾아가 세배를 올리고 봉투를 드린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표정이 굳어지시더라고요. ‘야. 이런 거 주려면!!!(인상 쓰며) 자주 와라~~아.(웃으며)’” 코미디언 이홍렬은 몇 해 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아흔이 다 된 노쇠한 몸에도 뼛속부터 차오르는 코미디 본능에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계속 개그를 치시는 거예요. 우리는 본능이,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그 본능이라는 게 어디 가지 못해요.” 후배들은 그를 “평소에도 후배들에게 장난을 많이 치던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다시 설 수 있는 터를 마련해주고 싶다던 후배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또다른 곳에서 웃길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까. 구봉서가 지난 27일 세상 저편의 무대에 올랐다.

고인의 장남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노환이 있으셨는데, 상태가 안 좋아져서 광복절 뒤 입원하셨다가 27일 오전 1시59분께 돌아가셨다”고 했다. 27일은 공교롭게도 개그 축제인 ‘4회 부산코미디페스티벌’이 열린 날이다. 송해부터 이경규, 심형래, 김숙, 전유성, 정준하 등 여느 때보다 훨씬 많은 코미디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축제날 날아든 비보에 후배들은 슬퍼했지만, 또한 그 공교로움에서 의미를 찾으며 서로의 마음을 보듬었다. 김준현은 “코미디가 잘되는 것만 바라신 분이신데,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는 순간 ‘이제 내가 떠나도 되겠구나’ 하신 것 같다”고 했다. 김준호는 “그의 코미디를 보고 자랐든 그렇지 않았든, 존재감만으로도 영향을 미친 한국 코미디계의 역사”라고 했다.

그는 서영춘, 배삼룡 등과 함께 대한민국 티브이 코미디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대동상고 졸업 뒤 태평양가극단 악사로 연예계에 입문한 이후, 196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안방극장의 간판이었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맹활약했다. 배삼룡, 곽규석, 이기동, 남철, 남성남 등과 함께 <웃으면 복이 와요>(문화방송)를 이끌며 ‘코미디 전성시대’를 열었다. <유머 일번지> 대본 등을 썼던 장덕균 작가는 “우리나라에 티브이 매체가 시작된 뒤 짧은 촌극이나 콩트는 있었지만, 국민들한테 코미디라는 장르를 인식하게 한 것은 <웃으면 복이 와요>였고, 그 중심에 구봉서 선생님이 있었다”고 했다. ‘비실이’ 배삼룡, ‘후라이보이’ 곽규석 등과 콤비를 이룬 슬랩스틱 코미디와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꼭지에서 70자가 넘는 이름을 읊는 코미디 등은 지금까지 기억되며 후배들의 코미디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병만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위대함을 보여준 분이었다. 어린 시절 선생님의 <웃으면 복이 와요>를 보며 개그맨을 꿈꿨다”고 했다.

그의 코미디는 자신을 낮춤으로써, 삶이 팍팍했던 서민들을 위로하는 웃음이었다. 연예인의 위상이 높지 않았던 시절인데도 그의 공연을 보려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단체로 학교를 빠지기도 했단다. 장덕균 작가는 “다들 어렵게 살던 시기였고, 그의 코미디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며 “티브이가 많이 보급이 안 된 때라, <웃으면 복이 와요>를 보려고 큰집에 가야 했다. 말썽을 부려 엄마가 못 가게 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구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이런 재미를 주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유성은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못살고 추웠던 시절에 서민들이 웃을 수 있었던 건 코미디 덕분이었다”고 했고, 이홍렬은 “그분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활력을 찾았다”고 했다. 구봉서는 과거 인터뷰에서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 국민들에게 웃음을 줘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평생 단짝으로 활동했던 고 구봉서씨(왼쪼걔와 배삼룡씨.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남을 웃기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평생 국민을 웃겨야 한다”고 했지만, 2009년 1월 중순 자택 욕실에서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뇌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코미디를 떠나 살아야 했다. 젊은 세대에 맞춘 공개 코미디가 일반화되면서 선배들의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이경규 등 후배들은 이 부분이 가장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애정파도>(1956) 등 400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는 <오부자>(1958)에서 막내로 출연한 뒤 ‘막둥이’라는 별명을 얻어 평생 그 별명으로 살았다. 막내였던 그가 어느덧 개그계의 대부가 됐고, 대한민국 코미디를 만들고 떠났다. 전유성은 “대선배들이 한 분 한 분 떠날 때마다, 대한민국 코미디의 큰 기둥들을 잃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구봉서는 지난해 토크 드라마 <그대가 꽃>에 출연해 2010년 고인이 된 단짝 배삼룡한테 이렇게 말했다. “먼저 가서 잘 있니? 너, 내 생각 안 나니? 난 네 생각만 하고 있다. 거기서 잘 살아. 하늘나라 좋은 나라다.”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하던 그는 좋은 곳에서 단짝과 다시 한번 콤비 코미디를 선보일까. 송해는 조문 뒤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타계하신 선배들을 만나셔서 그쪽에서 즐거운 생활을 하시기를.”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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