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30 17:32
수정 : 2016.06.30 22:30
앨빈 토플러 27일 타계
미래사회와 인간에 대한 낙관과 애정
“돈을 넘어선 더 큰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
“미래를 지배하는 힘은 읽고, 생각하며 커뮤니케이션 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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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부의 미래>를 출간할 당시의 앨빈 토플러 박사.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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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미국 뉴욕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22살 청년이 캠퍼스 커플과 결혼한 뒤, 클리블랜드의 제너럴모터스(GM) 공장 알루미늄 용접공으로 취업한다. 5년간 그곳에서 일하며 조립라인과 대량생산의 원리를 몸으로 익힌다. 부인도 같은 공장 노동조합 간사로 근무했다.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부부는 사회주의에 심취해 “노동운동에 지식인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공장으로 들어간 것이다. 나중에 세계적 석학이 된 앨빈 토플러는 이때의 경험이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로 이어지는 자신의 저작들에 녹아들어갔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부인 하이디와 함께 설립한 컨설팅 회사인 토플러 어소시에이츠는 29일(현지시각) 토플러 박사가 지난 27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향년 87살. 토플러 어소시에이츠의 최고경영자(CEO)인 데보라 웨스트팔은 성명에서 “미래에 대한 혜안,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그의 열정에 감사드린다. (그가 오래전에 예견했던) 인공지능, 하나로 연결된 지구촌, 눈부신 변화 속도 등과 같은 현대사회를 볼 때, 우린 늘 그가 현대인에게 끼친 영향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며 애도했다.
토플러는 1960년대 중반 ‘미래학’ 강의를 처음 시작하며 이 분야를 개척했다. 1970년 출간한 <미래의 충격>은 ‘토플러 시대’의 본격적인 막을 올렸다. 이후 <제3의 물결>(1980), <권력이동>(1990), <부의 미래>(2006) 등 10년에 한 번씩 세계와 미래를 꿰뚫는 대표 저작을 내놓았다. <제3의 물결>에서 그는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거쳐 제3의 물결인 ‘정보화 혁명'을 예견했다. <권력이동>에선 사회를 통제하는 힘이 물리적 힘과 경제력에서 지식으로 진행되는 현상을 짚었고, <부의 미래>에선 새로운 부의 창출 시스템이 우리 일상, 사회, 문명에 미칠 ‘제4의 물결’을 예고했다.
대개의 미래 전망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데 반해, 그는 늘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고, 특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잃지 않았다. 젊은 시절, <펜실베이니아 데일리>의 의회와 백악관 출입기자, 경제전문지 <포쳔> 부편집장 등 저널리스트의 이력도 지니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전 세계에서 배달되는 여러 신문을 샅샅이 읽으며 하루를 시작해 손톱 밑에 까만 잉크가 묻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60년간 해후한 부인 하이디는 남편 못지 않은 미래학 연구자로, 조력자 수준을 벗어난 협력자에 가깝다. 하이디는 법학과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사회사상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어 지난 2001년 6월 ‘21세기 한국비전’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한국이 아이엠에프 외환위기를 겪은 이유에 대해 “산업화 시대의 경제발전모델이 변화된 지식기반 사회에 더 이상 맞지 않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라며, 혁신적인 지식기반 경제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임금을 바탕으로 성장한 한국이 세계경제의 종속국으로 남을지, 경쟁력을 갖춘 세계경제의 선도국이 될 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있다며, 만일 한국이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면 선택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0년 신군부 정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토플러를 처음 접했다. 김 전 대통령은 <21세기는 누구의 것인가>(1998)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는 정보화 시대에 한국을 지식과 정보의 강국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래된 꿈이었다. 청주교도소에서 <제3의 물결>을 읽고 깜짝 놀랐다. 그때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몇번을 정독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직 당시인 1998년 4월과 2001년 6월 두 차례 토플러 박사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토플러 어소시에이츠 쪽도 타계 소식을 전하면서 김 전 대통령이 남북평화통일 재단과 관련해 토플러에게 도움을 구했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2006년 토플러와 만나 면담을 가졌다.
토플러의 저작 6종을 펴낸 청림출판에는 30일 오전에만 평소 두세달치에 해당하는 주문이 쏟아졌다. 청림출판 고병욱 경영기획이사는 “토플러의 책이 한국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는데, 미래를 다루는 책이 대개 부정적이거나 위기를 이야기하는 데 비해 토플러는 낙관적인 관점을 유지해 희망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2007년 <부의 미래> 청소년판 출간을 기념해 한국을 방문했던 토플러는 청소년 강연에서 어려웠던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이야기하며 “돈을 넘어선 더 큰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라.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독서'다. 미래를 지배하는 힘은 읽고, 생각하며 커뮤니케이션 하는 능력이다”라고 당부했다.
권태호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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