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칼럼] 전쟁의 증언, 드레스덴과 라디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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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체 마을에서 어디론가 끌려간 81명의 아이들을 기리는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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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불똥과 폭풍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녀의 약탕관에 뛰어든 것 같았다. …길거리에 한 여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잘 탄다, 우리 집도 잘 탄다’고 미친 듯이 웃으며 춤을 췄다. 잠시 후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갑자기 왼쪽으로 여자 하나가 달려왔다. 여자는 보따리 같은 것을 안고 있었다. 아기였다. 여자가 넘어지며 아기는 포물선을 그리며 불 속에 떨어졌다. 여자는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1945년 2월13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을 경험한 마가레트 프라이어는 그의 저서 <드레스덴 1945>에서 이렇게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미국과 영국군 소속 폭격기 1250여대는 이 폭격에서 3900톤 이상의 고폭탄과 소이탄을 투하했다. 드레스덴은 도심 40㎢가 파괴됐고, 18,000여명에서 25,000여명이 죽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로 ‘엘베 강변의 피렌체’로 불리던 드레스덴은 졸지에 유령의 도시가 되었다. 나치는 2차세계 대전 당시 드레스덴에 군수공장을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나치는 이 희생자를 28만여 명이라고 부풀려 선전하며 ‘연합군의 야만성’을 부각시키려 했다. 동시에 나치는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광분했다. 연합군의 야만에 부역했다는 것이었고 주민들의 불만을 유대인에게 돌리려는 것이었다.
나치가 주민학살한 야만성의 상징 ‘리디체’
1942년 6월9일 나치의 체코 주둔군 친위대장 로슈토크가 이끄는 독일군은 리디체로 들이닥쳤다. 프라하의 북서쪽 20㎞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작은 마을은 프라하에서도 손꼽히는 작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독일군은 일터로 나가려던 남성 173명을 끌어냈다. 여인 60명과 아이들 81명은 따로 모았다. 곧 남자 집결지에서 총성이 울렸다. 여인들은 차에 태워져 아우슈비치 등 집단 수용소에 보내졌다. 이들 가운데 47명은 수용소에서 사망하고 3명은 실종됐다. 아이들은 북유럽 등으로 뿔뿔히 보내졌다. 아이들은 이름도 출생지도 변조돼 위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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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앞에 놓인 편지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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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을 ‘청소’한 뒤, 나치는 죄수 등을 동원해 마을을 없애기 시작했다. 집과 시설물에 불을 지르고, 남은 구조물을 폭파했다. 폭파된 잔해는 중장비를 동원해 없애 버렸다. 지도상에서 리디체를 지워버리고, 행정구역에서도 없애버렸다. 나치가 찾을 수 있는 모든 기록에서 리디체는 사라졌다. 누대에 걸쳐 마을을 이루고 483명이 살아가던 리디체는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나치가 학살극을 벌이기 5일 전 나치의 2인자이자 친위대 사령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 레지스탕스의 피습을 받고 후송됐다가 사망했다. 히틀러는 친위대 사령관 프랑크에게 처절한 복수를 지시했고, 프랑크는 레지스탕스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리디체를 골라 ‘완전한 청소’를 지시했다.
리디체는 2차대전 초기 나치의 야만성의 상징이 되었다. 영국 노동자들은 마을 재건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고, 미국 일리노이주의 스턴파크라는 마을은 그 이름을 ‘리디체’로 바꿨으며, 아이의 이름을 리디체로 짓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영국 공군 조종사들은 비행기에, 소련군 전차병은 포탑에 각각 ‘리디체를 위하여’라는 문구를 새기고 전장으로 갔다. 리디체는 그렇게 ‘기억’되었다.
파시즘 광기 되새긴 평화의 상징 ‘드레스덴’
일본군 ‘위안부’ 사건에 대한 기억을 나누려는 ‘희망나비’는 7월5일 베를린 캠프를 떠나 다음 캠페인 장소인 체코 프라하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독일 작센의 주도이자 옛 작센왕조의 왕도인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2014년 3월28일 박근혜 대통령이 ‘상당히 엉뚱한’ 통일구상(박근혜 드레스덴 독트린)을 발표한 곳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화해와 평화의 한 상징으로 자리 잡은 그곳에서 그는 북한 체제의 변화를 전제로 한 흡수통일 구상을 밝혔다. 이후 남북의 대결은 고조됐다. 희망나비는 프라하 인근의 캠프장에 터를 잡고 다음날 리디체를 방문했다.
드레스덴엔 작센 왕조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다. 왕궁과 부속 건물도 그렇지만, 성모 성당은 특히 유명했다. 히틀러조차도 최고의 성당으로 자랑했던 곳이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 역시 이 성당을 폭격에서 보호할 순 없었다. 북쪽 벽면 일부를 제외하고 성당 전체가 엄청난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전쟁이 끝났지만, 드레스덴 시민은 성당의 잔해를 치우지 않았다. 정부가 그곳에 주차장을 만들려고 했지만, 시민들은 이를 막았다. 오히려 3800여 개의 부서진 벽돌과 돌들에 일련 번호를 붙여 보관했고, 언젠가 되살아날 날을 기다렸다. 복원 작업은 독일 통일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이제 그곳은 파시즘의 광기와 전쟁의 참극을 되새기고 화해와 평화를 간구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곳에서 소희와 수미와 준영이는 일본군 성노예의 진실을 공유하고, ‘위안부’ 할머니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1인 시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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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이들을 기억하는 추모 나무 십자가와 작은 장미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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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엔 폭격의 잔해가 있어 복구라도 되었지만, 리디체는 잔해마저 싸그리 없애버린 탓에 복구를 할 수도, 복구할 것도 없었다. 그저 거대한 공터만 남았다. 오히려 너른 잔디밭과 오래된 숲, 잘 조성된 장미정원이 어울려, 참배객으로 하여금 애도에 앞서 탄성을 지르게 한다. 그러나 그 빈터에 남아 있는 지극히 사소한 흔적과 작은 설치물들은 귀 기울이는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떨게 한다. 설계자는 기념물을 오히려 작게 그리고 숲과 잔디의 색깔로 스며들게 조성했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다.
81명의 아이들을 기리는 동상 앞에는 꽃과 장난감이 쌓여 있다. 명복을 비는 편지도 놓여 있다. 한 한국인은 ‘부디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기도할게요’라고 영어로 편지를 남겼고, 다른 일본어 편지엔 ‘리디체를 기억할께요’라고 적여 있다. 남성 학살지엔 작은 장미 가든 뒤에 높다란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 있으며, 가까운 곳엔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여인들을 기리기 위한, 비탄에 빠진 여인상이 놓여 있다.
학살과 파괴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건 학살이 시작된 첫 지점에서 발견된 부서진 돌 벽돌 하나, 그리고 완벽한 ‘청소’가 어려웠을 호자크의 집터 지하 벽돌 구조물 그리고 마을 뒤편 언덕의 성당과 초등학교 주춧돌 뿐이었다. 나치는 마을 묘지까지도 파헤쳐 버렸다. 복원된 그 터엔 강제로 끌려갔다가 전쟁 후 살아서 혹은 죽어 돌아온 이들의 무덤이 있다.
불의와 야만에 맞선 저항의 상징 ‘메소디우스 성당’
드레스덴에 성모성당이 있다면 프라하엔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이 있다. 이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을 벌인 레지스탕스들이 독일군에게 쫓기다 최후를 맞은 곳으로, 불의와 야만에 맞선 저항의 상징이다. 이 성당 안에서 얀 쿠비스 등은 독일군과 마지막까지 총격전을 벌이다가 사망한다. 영화 ‘새벽의 7인’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드레스덴에 군사(軍史) 박물관이 있다면 프라하엔 국립기술박물관이 있다. 모든 전쟁박물관은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찬양하지만, 드레스덴 군사박물관은 전쟁의 비극을 기억한다. 체코국립기술박물관 2층엔 기술 혹은 과학이 인간의 학살과 야만에 기여했는지, 나치의 과학기술자들 이야기를 기록한다. 인간을 우열로 나누고 이른바 ‘열등 집단’을 가장 손쉽게 처분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유대인 등 살아있는 인간 생체를 이용해 대량 학살과 의료기술을 개발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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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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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통일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드레스덴에서 시작됐다고 말하게 될 것”이라는 위험천만한 대통령의 철없는 이야기를 드레스덴에서 기억하는 건 부끄럽고 끔찍하다. 화해가 아니라 승리, 평화가 아니라 대결의 추구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드레스덴과 리디체가 웅변하는 데 그는 무엇을 보고 들었을까.
드레스덴/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사진 나비의꿈 미디어지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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