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7.05 17:51
수정 : 2016.07.05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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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독일 베를린 브란덴브루크 문 앞 파리자 광장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있는 유렵평화기행 ‘나비의꿈’ 참가자들이 베를린 시민, 관광객들과 함께 대형 걸개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비의꿈 미디어지원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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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기자의 나비의 꿈
2차 세계대전 때 교전의 양대 헤드쿼터였던 영국 런던에서 독일 베를린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도버해협을 카페리로 건너 프랑스와 벨기에를 거쳐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하루 야영을 한 뒤 이튿날 저녁에 되어서야 베를린 인근 포츠담의 야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고긴 여정 끝에 도착했지만, 베를린은 따듯했다. 5천여 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을 도발하고, 미증유의 학살극을 자행한 독일이었지만, 전쟁 범죄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법적·정치적·도덕적 책임을 지려 했고 또 졌던 시민들은 ‘고백하고 참회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독일 제국주의의 중심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앞 파리자 광장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나비의꿈’ 캠페인 터를 잡았지만 누구도 간섭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그곳은 히틀러가 침략을 명령하고 나치 군대가 행군했던 곳이며, 이전에도 제국을 꿈꾸던 프러시아의 황제들이 열병하던 곳이었다. 파리에서처럼 경찰이 오가거나 런던에서처럼 캠페인 내용과 형식 따위를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비의꿈이 도착하기에 앞서 이제는 고희를 넘긴 교민들이 미리 광장에 나와 터도 잡아주고, 주변에서 공연하던 비보이를 설득해 캠페인과 시간이 겹치지 않도록 배려를 했다. 캠페인이 끝난 뒤엔 말아온 김밥으로 청년들의 허기를 채워주었다. 베를린에서 활동중인 일본인 사진작가 마리오는 통역은 물론 나비의꿈 베를린 일정을 자청해서 안내해주었다. 베를린에서 정치학을 전공해온 손어진씨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유인물을 나눠주고 서명을 받았으며,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정진헌 박사(인류학)는 영어 통역을 도맡아 해줬고, 식당을 운영하는 김아일씨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응원했다.
독일 시민들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라는 등의 피켓 내용만 보고도 관심을 보였고, 대자보를 유심히 읽었으며, “캠페인에 참여해달라”는 권유가 없이도 서명대 앞으로 스스로 다가왔다. 유인물까지 정독한 사람들은 오히려 “고맙다” “수고한다” 등 지지와 격려의 인사까지 건넸다. 신고한 캠페인 종료 시간이 지났는데도 채근하는 경찰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일본인 관광객들은 불쾌한 표정을 보이며 지나곤 했다. 한 관광객은 “일본 정부과 사과를 할 만큼 했는데도, 한국인이 저러니 한일 관계가 좋아지지 않는다”고 푸념했으며 그와 함께 온 다른 두 명의 일본인도 같은 표정으로 캠페인 장을 비껴갔다고, 마리오는 전했다.
김진향 6·15공동선언실천 유럽지역 공동대표는 캠페인 지지발언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해결은 전쟁과 전쟁범죄를 막고 세계 평화를 이루는 중요한 계기”라며 서명운동 동참을 호소했다. 그는 “12·28합의는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인권을 유린당한 할머니들을 다시 죽이는 범죄행위”라고 말했다.
최영숙 유럽지역 한민족연대(코인) 의장도 남편 클라우스 메에크과 함께 참석해 손자뻘 되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응원했다. 그는 1966년 독일로 파송된 이른바 ‘파독 간호사’ 출신이다. 한민족연대는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증언한 이후 1992년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 그해 8월15일 평양에 가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4명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 이 중에는 위안소에서 도망치다가 붙잡혀 다리 인대가 끊긴 할머니도 있었다. 일본군은 다시는 탈출하지 못하도록 그런 짓을 했다. 1993년엔 일본 여성들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국제심포지움을 열었고, 지금까지 베를린 주재 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8월13~15일 사이 하루를 김학순 할머니 기림일로 정해 올해로 3년째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독일 시민도 파리나 런던 시민과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한민족 연대나 마리오 등 활동가들이 한국 청년들의 방문을 눈물겹게 반가워하고 고마워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 공관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극히 제한적으로 지원한 것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우리 활동을 방해했다.”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는 게 귀찮았으며 할머니들도 거추장스러워했던 것이다. 최영숙 의장 등이 반인륜적인 일본 정부보다 한국 정부의 태도를 더 큰 유감을 표시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우리 공관은 밉보인 교민들이 고국에 돌아가는 것을 막곤 하죠. 입국 거부는 교민들에게 가장 괴롭고 분통 터지는 조처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5월 5·18 기념재단이 초청한 독일교민 이종현 한민족연대 상임고문의 입국을 거부하고 인천공항에서 추방했다. 80대의 이 고문은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규명하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당국은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는 사람’이라고 낙인찍었다. 베를린은 박정희 정권 시절 대표적인 간첩조작 사건인 동백림사건의 중심지였고 북한과의 체제 대결 속에서 많은 조작과 강압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한국 공관은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의 하수인 역할을 했다.
역사적 정치적 배경은 이렇게 우울했지만, 이날도 <셔플 아리랑>의 리듬은 경쾌했고, 율동은 파격적으로 발랄했다. 너른 파리자 광장의 시민과 관광객들은 율동이 진행되는 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이매진> 합창 역시 다소 서툴긴 했지만, 평화의 메시지를 실어 나르고 사람들 가슴에 메시지가 따듯하게 스며들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런던에서처럼 서명대 앞엔 자발적 서명자로 북적였다.
베를린/ 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사진 나비의꿈 미디어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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