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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있는 라 이케라 마을. 사진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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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노동효의 중나미 아미스타드
‘20세기의 예수’ 체 게바라의 마지막 흔적···볼리비아 ‘라 이게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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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있는 라 이케라 마을. 사진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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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여행을 하고, 여행은 인간을 만들어 내지. 여행이 만든 대표적인 인간으론 부처, 예수, 공자 등 종교적 인물 외에도 바이런, 다윈, 헤밍웨이, 에릭 호퍼처럼 시인, 과학자, 소설가, 철학자 등 인물군은 다양해. 그리고 여행은 혁명가를 만들어 내기도 했지. 사르트르가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평했던 혁명가가 있었어. 이 혁명가는 젊은 날의 긴 여행 끝에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지. 이 사내의 어머니는 셀리아라는 여인.
그녀가 낳은 첫아이인 혁명가는 미숙아였어. 아들은 2살 되던 해부터 천식을 앓았지. 아이가 숨이 곧 넘어갈 듯한 고통을 겪을 때마다 어미는 대신 앓아줄 수 없다는 고통을 느꼈어. 그나마 맑은 공기를 찾아 자주 이사를 한 덕분일까, 아들은 건강하게 자랐어. 독서와 럭비, 수영 등 운동을 무척 좋아했어. 아들은 스물세살 되던 해 친구 알베르토와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떠났어. 여러 나라를 지나며 틈틈이 편지를 보내오곤 했지. 조국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설레기만 했던 아들은 점점 진지해져 갔어. 돌아왔을 땐 더 이상 예전의 아들이 아니었지.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아들은 안락한 삶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긴 여행을 떠났어. 그리고 불의한 권력과 싸우는 혁명가가 되었지.
친구 나라의 혁명에 동참해 성공한 아들은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에 올랐어. 그녀는 안도했어, 아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그리고 그녀는 6년 후 눈을 감았지. 아들은 깨끗한 옷, 따뜻한 음식, 편안한 잠자리를 뒤로한 채 다시 산으로 돌아갔어. 가난한 이들의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작정이었지. 2년 후 아들은 적에게 붙잡힌 뒤 어느 산골 학교에서 총살당했어. 적들은 시신을 인근 병원으로 옮긴 뒤 세탁대 위에 올려놓았지. 사진사가 눈 뜬 채 죽어 있는 시신을 촬영했어. 그 사진을 본 어떤 이는 ‘20세기의 예수’라고 표현하기도 했지. 그의 이름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 사람들은 체 게바라라고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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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 차량. 튄 돌에 깨진 차창을 임시로 때운 곳이 총알자국 같았다. 사진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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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은 어느 산골 학교가 있던 마을은 안데스 산맥 동쪽 끝자락에 있어. 볼리비아의 ‘라 이게라’. 무화과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 그곳으로 가기 위해 먼저 군 소재지 바예그란데(해발 2000m)로 가야 했어. 한국어로는 ‘큰 계곡’쯤 될 거야. 바예그란데 도착 후 라 이게라로 가는 교통편을 수소문했어. 이렇다 할 교통편이 없었어. 묻고 물어 ‘체의 길’을 안내한다는 여행사를 찾아낼 수 있었지. 직원 페르난도는 차량으로 오가는 데만 10시간이 소요된다고 설명했어. 아침 8시에 떠나기로 하고 여행사를 나왔지.
여행사 전용차량과 기사가 따로 있을 줄 알았는데 차를 몰고 온 사람은 어제 만난 페르난도 본인이었어. 방문객이 워낙 적어서 그때그때 차량을 렌트해서 안내하는 식이더군. 시내를 벗어나자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어. 튄 돌에 깨진 차창을 임시로 때운 곳이 총알 자국 같았어. 마치 종군기자라도 된 기분이 들었지. 경사진 길을 구불구불 오르고 나자 평탄한 길로 이어졌어. 길의 끝은 아침 안개로 뿌옇게 가려 보이지 않았지. 속도를 줄이고 달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페르난도가 차를 세우더니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어. “사람들은 저 바위를 ‘보이나’(베레모)라고 불러요. 체가 쓰던 군모를 쏙 빼닮았죠?” 목책 너머 거대한 바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그건 정말 체의 베레모처럼 보였어.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 흔적 쫓아
볼리비아 ‘체의 길’ 여행에 나서
체 게바라와 마주친 듯한 환상
사회개혁가·여행가 열정 감동
평지를 지나기 무섭게 산세는 더 가팔라졌고 해발 2000~2900m를 오르락내리락 낭떠러지 옆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기도 했어. 마을 하나를 지나쳤는데 ‘푸카라’라고 했어.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갈림길에서 10㎞를 더 달려야 목적지에 닿을 거라고 했어. 갈림길 왼쪽으로 나무로 만든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지. ‘루타 델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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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길’에서 만난 체 게바라의 흔적들. 사진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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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가 황톳길 옆 농가에 차를 세웠어, 여기서부터 걸어가야 한다며. 사유지라 농장주에게 허락을 받고 마당 옆으로 난 샛길로 들어섰어. 앞이 확 트인 공터가 나왔을 때, 페르난도가 손가락을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지. “체가 정부군에게 쫓기다가 격전을 치른 추로 계곡이죠. 개울가 근처에서 동료 치노가 안경을 떨어뜨렸고, 체가 더듬거리는 그를 도와주려다가 총을 맞고 포로가 되었어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개입하면서 재판도 없이 다음날 사형당했죠. 내려가면 빈 농막이 있는데 옛집 주인은 게릴라를 종종 만난 적이 있다고 했어요. 감자나 옥수수 같은 식량을 얻어가곤 했는데 농사를 도와주기도 하고 선한 사람들이었다고 해요.”
오솔길 지나 개울가에 닿았어. 체가 총에 맞아 쓰러져 있던 자리에 섰어. 부상당한 몸을 숨겨주던 나무와 바위. 순간 나는 숨을 헐떡이며 버둥거리는 한 사내와 마주한 듯한 환상에 휩싸였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묻고 싶었어. 쿠바에 남았더라면 이토록 고통스럽게 죽는 일은 없지 않았겠냐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게릴라로 돌아간 이유가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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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이게라 마을에서 만난 아주머니. 사진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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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이게라 마을엔 번듯하진 않지만 그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임을 증명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지. 그를 가두었던 학교 교실은 잠겨 있었어. “들어갈 순 없나요?” 페르난도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열쇠를 든 아주머니를 모시고 왔어. 철컥. 나무문이 열렸어. 흙바닥, 그가 묶여 있던 걸로 짐작되는 나무의자.
“남편은 어릴 때 이 사람을 봤대요. 학교에 왔는데 선생님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대요. 교실을 들여다보니 이 사람이 묶여 있었다고.”
포승줄에 묶인 체의 사진을 보던 내게 아주머니가 말했어. 남편 분을 만나볼 수 있느냐고 물었어. “지금은 없어요.” 대답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슬펐어. 그래서 지금 이 마을에 없다는 건지 세상을 떠났다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지. 난 더 이상 묻지 않았어. 나는 미리 준비해간 쿠바산 시가에 불을 붙였어. 체는 시가를 무척 좋아했지. 칠 벗겨진 체의 초상화 앞에 시가를 내려놓았어. 구수한 시가 향이 번졌어. 나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 들려오는 듯했어.
“내가 왜 안락한 삶을 버리고 다시 길을 떠났냐고 물었지? 젊은 날의 일기, 편지,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내 모든 기록을 관통하는 두 갈래 줄기가 있지. 나의 욕망, 나의 열정. 그건 ‘세계변혁에 대한 열정’과 ‘여행에 대한 열정’이었어. 난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포기할 수 없었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머물러야 하고, 여행자가 되면 불의한 세상을 방관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어. 세계변혁과 여행, 두 열정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방법이 내겐 게릴라의 길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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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가 최후를 맞은 장소에서 둔 시가. 사진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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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가 되기 전 체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떠올랐어. 그건 한때 스친 생각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싸움이었던 거야. ‘제가 마음만 먹으면 과테말라에서 부자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병원을 차려 알레르기를 치료한다면 말이죠.(이곳엔 코맹맹이 환자들이 많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내 안에서 싸우는 두 명의 나, 사회개혁가와 여행자 모두를 배신하는 끔찍한 일일 겁니다.’
바예그란데로 돌아온 나는 다음날 아침 세뇨르 데 말타 병원으로 갔어. 이곳 콘크리트 세탁대 위에 놓여 촬영된 그의 사진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 게릴라의 죽음, 같은 제목을 달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셀리아가 세상을 떠난 후였으니 죽은 아들의 모습을 보는 일은 생기지 않았어. 제가 낳은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처럼 고통스런 일이 있을까? 체의 시신은 비밀리에 바예그란데 비행장에 묻혔대. 그리고 30년이 지나 1997년에야 발견되었지. 세탁대 위엔 전 세계 젊은이들이 남기고 간 추모의 글과 꽃이 놓여 있었어. 그가 최후를 맞은 장소에선 시가를 바쳤는데, 세뇨르 데 말타 병원엔 준비해 간 게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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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길’ 여행길에 가져간 세월호 노란 리본. 사진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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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리본을 내려놓았어. 고국을 떠나올 때 노란 리본을 낡은 가방에 얹고 왔더랬지. 그리고 늘 함께했어. 난 노란 리본을 나비라고 생각했어. 마추픽추도 보고, 이구아수 폭포도 보고, 세상 끝에도 가고팠던 아이가 내 가방 위에 앉아 따라왔다고. 체를 추모하는 자리에 내려앉은 세월호 리본이 바람에 나풀거렸어. 나는 속삭였어. ‘아이들아, 잠시 쉬어라. 그리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노동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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