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남미 우루과이 무히카 전 대통령…행적·평판·지지율 박근혜와 180도 딴판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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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 해질 무렵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나온 우루과이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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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말, 양털을 이용한 모직 산업이 돈이 되자 지주들은 양을 키우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소작농을 내쫓았고,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어. 이를 두고 <유토피아>에서 토머스 모어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지. 농사지을 땅을 잃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고, 공장노동자가 되거나 도시빈민으로 전락했어. 중세가 끝난 후 두 체제가 싸웠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20세기 말에 이르러 두 체제의 대결은 자본주의의 승리로 돌아갔지. 그리고 21세기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해 떠도는 소문은 무성하나 대안은 이렇다 하게 나온 게 없어. 근데 ‘더 나은 인류의 삶’을 위해 필요한 건 단지 ‘새로운 체제’일까?
지구를 떠돌았어. 영국·프랑스·이탈리아·헝가리·폴란드·체코·크로아티아·그리스·터키·이란·파키스탄·네팔·인도·중국·타이·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캐나다·나미비아·페루·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 등. 어떤 나라는 가난하고 열악했으며, 어떤 나라는 부유하고 풍요로웠지. 그렇게 숱한 나라를 떠돌다 지구 정반대편의 나라, 우루과이에 닿았어.
부패지수 남미에서 최저인 나라
대통령궁은 노숙인들에 내주고
월급 90% 기부 가족 같은 대통령
부패연루 없이 64% 지지율로 퇴임
대한민국에선 ‘마약’으로 취급하는 대마초가 합법인 나라. 그래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배를 타고 강 건너 우루과이에 닿자마자 만난 건 강변에서 마테차를 마시며 대마초를 피우는 젊은이들이었어. 한국식으로 보자면 젊은이들이 대낮부터 마약이나 하고, 그래서 엉망진창이어야 마땅한 나라. 그러나 우루과이는 남미 어느 나라보다 깨끗하고 칠레와 더불어 꽤 잘살고 있었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루과이는 남미에서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야. 우루과이 21위, 한국 37위. 국제투명성기구에 따르면 덴마크·핀란드·스웨덴·뉴질랜드·네덜란드·노르웨이 순으로 부패가 적대. 보면 알겠지만 부패가 적은 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을 뿐 아니라 ‘행복지수’도 높지. 잘살면 부패가 줄어드는 건지, 부패가 적으면 잘살게 되는 건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같지만, 난 부패가 줄어드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
우루과이로 간다고 했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교민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어. “거길 왜 가죠? 볼 것도 없는데. 아르헨티나랑 별반 다르지도 않은데 물가만 더 비싸다니까요!” 그래서였을까, <론리 플래닛 남미> 영문판엔 있는 ‘우루과이’가 한글판엔 없었어. 갈 사람도 없으니 종이도 절약할 겸 빼버린 걸까. 중남미를 다녀온 이들이 쓴 여행서를 뒤져봐도 우루과이는 남미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나라나 다를 바 없었어. 난 대답했지. “정말 볼 게 없는지 제가 가서 확인해 보려고요.”
우루과이 도착 후, 무히카 전 대통령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었어. 정부나 관변단체가 그린 초상화가 아니었어. 시민들이 ‘무히카를 기억하자’며 자기 집 담벼락에 그린 벽화들이었지. 그가 남긴 말은 많지만, 한 가지만 뽑자면 이런 게 있어. “대통령은 왕이 아니고, 신도 아니고, 주술사도 아니다. 나는 대통령도 국민들 다수가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 사는 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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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재임기간 2010. 3. 1.~2015. 3. 1.)을 그린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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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초를 피우며 기타 치고 노는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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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히카의 당선 때 지지율은 박근혜와 비슷해. 52%. 그 후 두 사람이 나아간 길은 지정학적 위치만큼 딴판이었어. 무히카는 대통령궁을 노숙인들에게 내주고, 몬테비데오 외곽 자택에서 지내며 시민과 얘기도 나누며 국정을 운영했대. 지구 반대편의 대통령이 대궐 같은 청와대에서 지내며 자식 잃고 슬픔에 빠진 가족들이 만나려 해도 오는 길을 막고, 국정을 의논해야 할 사람들과도 대면하지 않은 채 관저에 콕 틀어박혀 지낼 때.
무히카는 여가시간엔 책을 읽거나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보냈대. 지구 반대편의 대통령이 책과 담쌓은 채 주로 잠을 자거나, 미용주사를 맞거나, 그도 아니면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며 보낼 때. 무히카는 1억6000만원의 연봉을 받았고, 매달 월급의 90%나 기부했대. 지구 반대편의 대통령이 2억원 넘는 연봉도 모자라 백 벌이 넘는 옷을 뇌물로 받고, 억대 브이아이피 회원 서비스도 공짜로 받을 때. 무히카는 부패에 한 번도 연루되지 않고 당선 때보다 늘어난 64%의 지지율로 퇴임했어. 지구 반대편의 대통령은 온갖 부패에 연루되어 5% 지지율로 곤두박질쳤고, 탄핵심판을 기다리고 있지.
박근혜가 정치인이 되기 전 자기 직업을 뭐라고 여겼는지 모르지만, 무히카는 대통령일 때도 자기 직업을 ‘농부’라고 적었대. 대통령부터 권위의식이 없는 나라, 그 국민은 어떨까? 우루과이에서 숙소를 옮길 때마다 난 누가 직원이고, 누가 손님이고,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없어 당황하곤 했어. 숙소에서 땀 흘리며 페인트칠하는 이를 보고 ‘종업원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호스텔 주인이었어. 문신투성이 청년이 대마초를 꼬나물고 기타 치며 놀기에 ‘손님인가?’ 했는데 종업원이었어. 젊은 여성이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남성에게 호통을 치기에 ‘종업원이 무슨 실수를 했나?’ 했는데 큰소리 치던 여성이 종업원이고, 묵묵히 듣던 남성이 주인인 경우도 있었지. 갑·을 위치에 따라 말과 행동이 구분되는, 그래서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단박에 알 수 있는 한국과 달라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던 어느 날이었어.
우루과이로 이민을 온 교민을 만났어. 그분은 무상교육, 무상의료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어. ‘사람들이 고용주를 존중할 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 집권당은 좌파에다, 노동자는 툭하면 파업하겠다며 들이대고, 그래서 큰돈이 있어도 사업을 크게 벌일 수 없다며. 특히 청년들에 대한 불만이 컸는데, 어르신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 나라엔 직업에 귀천이 없어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든, 세차장에서 차를 닦든, 법정에서 변호를 하든, 병원에서 진료를 하든, 사업을 하든 모든 직업을 똑같이 여겨요. 어떤 직장을 다니든 제 밥벌이만 하면 여자가 척척 달라붙고, 너무 쉽게들 연애를 해요. 이러니 젊은 놈들이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큰돈 벌 생각도 안 하고. 도대체 이 나라가 발전이 있겠냐고요!”
듣다 보니 ‘같은 현상을 두고 이토록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고 사고의 다양성이 안드로메다까지 확장되더군. 근데 어르신의 생각과 달리 우루과이는 발전 중이야. 남미에서 국가청렴도가 가장 높고,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로. 그 시작은 우루과이 국민이 부패한 집권당 대신 좌파연합당을 선택하면서부터야. 바스케스와 무히카. 2005년 이후 두 대통령을 거치며 부패는 줄고, 1인당 국민소득은 두 배로 늘었대.
물론 남미에선 높다지만 한국보단 낮아. 1만6000달러 정도. 그럼 행복지수는 어떨까? 한국 58위, 우루과이 29위. 언젠가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있어. 1인당 국민소득 8000달러까진 가질수록 행복해질 확률이 높대. 근데 8000달러를 넘으면 더 가진다고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고 하더군. 그때부턴 정신적 풍요가 중요하대. 삶의 여유, 즉 ‘한정된 인생의 시간을 얼마나 여유롭게 누리며 사느냐’에 달려 있단 거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라고 말했던 무히카는 페페, 그러니까 ‘할배’라고 불렸대. 지구 반대편의 대통령이 ‘닭’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때. 무히카뿐 아니라 제 나라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지도자는 가족처럼 친근하게 불리곤 해. ‘무민 마마’(핀란드의 할로넨 대통령), ‘엉클 호’(베트남의 호찌민), ‘무티’(독일의 메르켈 총리) 등. 내년에 우린 새 대통령을 뽑을 테지. 정말이지, 동물로 지칭되는 대통령은 이제 그만 만나고 싶어!
기린·너구리·펠리컨·개복치 등이 표지에 그려진 소설집 <카스테라>에서 박민규는 인류 역사를 ‘부패와의 투쟁’으로 그렸지. 실상 이 별에서 악의 축은 오래전부터 ‘부패’였어. 인류 사상을 좌·우로 나누든, 보수·진보로 나누든, 본바탕부터 ‘인류의 삶을 망쳐놓겠다!’는 사상은 없었어.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지. 더 나은 인류의 삶! 우선가치와 방법론적 차이가 있을 뿐. 이들은 여전히 대결 중이야. 근데 싸우다 보면 이기고 싶고, 이기고 싶으면 몰입하게 되고, 몰입하다 보면 에너지를 소진하게 돼. 그 사이에서 누가 이득을 얻을까?
부패한 자들이지.
난 생각했어. 21세기에도 지난 세기와 같은 ‘인류의 이상’이란 게 남아 있다면, 그래서 인류가 다시 ‘인류의 이상’을 위한 깃발을 든다면, 그것은 ‘부패 제거’라고. 20세기 동안 ‘평등’을 기치로 빈부, 남녀, 인종 불평등을 태우기 위해 노력했다면, 21세기는 ‘부패’를 태울 차례라고.
우루과이는 볼 건 적어도 생각할 건 참 많은 나라였어.
글·사진 노동효/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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