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남미의 시위를 보며 되뇌는 말…“권력은 상상력이 쟁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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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라 이게라’ 마을의 체 게바라 초상 벽화. 쓰인 글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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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아르헨티나에선 앵커와 기자가 생방송 도중 모유 수유를 하는 바람에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어. 누드 비치도 있고, 성인 여성이 가슴 드러낸 채 공중샤워장을 오가기도 하던데 공공장소에서 모유 수유는 금지라나. ‘공공장소에서의 모유 수유권 보장’을 촉구하며 앵커와 기자가 벌인 ‘저항 수유’는 수많은 여성의 지지를 받았고, 이에 동참하는 수많은 아르헨티나 산모들이 광장에 모여 ‘저항 수유’를 하는 시위가 잇달았지.
그런 사건이 있긴 했지만 가슴을 훌렁 드러낸 여성이 광장을 당당하게 오가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쿠스코에서 열린 동성애자 집회. 페루를 대표하는 관광도시, 그중에서 핵심부라고 할 아르마스 광장의 대성당 앞 계단이었지. 집회 참가자 중 상의를 벗은 여성들이 섞여 있었어. 유럽이나 북미에서 마주친 광경이라면 크게 놀라진 않았을 거야. 페루는 볼리비아와 더불어 남미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 중 하나거든. 주최 쪽이 성명을 발표한 후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며 광장을 돌기 시작했어. 무장경찰이 그들을 둘러싸고 따라다녔지. 저러다가 시위대가 시청으로 향하면 차벽을 쌓고 물대포를 쏘기라도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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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쿠스코 대성당 앞에서 열린 동성애자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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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시위 진압을 하려는 건가요?”
곁에 있던 페루 시민이 대답했어. “천만에요. 시위대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혹여 시위대를 향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까봐 경찰이 따라다니며 보호하는 겁니다.” 집회나 시위를 할 때, 경찰의 임무란 집회 참가자나 시위대를 불의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그게 상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왠지 그런 건 법전에만 존재하는 ‘아름다운 나라’처럼 느껴졌어. 아마도 집회나 시위 하면 경찰, 물대포, 차벽을 파블로프의 법칙처럼 떠올리게 되는 세계에서 너무 오래 산 탓이겠지.
경찰이 시위대를 보호하는 페루 파업으로 대중교통이 멈춰도 불평하지 않는 볼리비아처럼 촛불집회는 이미 ‘저항의 축제’
며칠 지나 또 다른 시위를 목격했어. ‘페루 대학은 어떤 곳일까?’ 쿠스코 소재 국립대학을 찾아갔다가 정문 앞에서 시위대와 마주쳤어. 대학 정문으로 학생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왕복 6차선 도로 중 3차선을 가로막았어. 그와 동시에 800미터가량 떨어진 저쪽에도 깃발을 든 대오가 튀어나와 도로를 점령했지. 그러자 이쪽과 저쪽 사이에 해방구가 생겼고 시위대는 그 길을 걸으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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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점거 후 시위 중인 페루의 대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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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석화 같은 전술도 놀라웠지만 더 흥미로운 건 경찰이 등장하기도 전에 버스, 택시 등 차량 운전자들이 알아서 나머지 3차선을 사이좋게 반씩 오가며 왕복 차선으로 만들어 버리더란 거야. 학생들이 주요 도로를 막아섰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교통정체 운운하며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도 없었어. 자고로 학생이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여기듯이! 학생들은 1시간가량 대로에서 시위를 하고 자진해산했어. 학교로 되돌아가는 이들에게 시위를 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어.
한 청년이 대답했어. “우리가 다니는 대학과 교수들이 부정을 저질렀기에 시민들에게 알리는 겁니다.”
그날 도로점거, 시위행진, 해산에 이르기까지 경찰의 개입은 전혀 없었어. 신기했지. 그들의 사고방식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 건 남미에 온 지 1년이 지난 후였어. 남미인은 유럽과 같은 시민혁명을 겪진 않았지만 절대권력자(왕)가 없는 공화국에선 ‘시민사회’와 ‘정부’가 권력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존재라고 여겼어. 물론 프랑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도 다툼이 생기면 되도록 시민사회 안에서 해결하고, 공권력의 개입은 최소화하려고 했지. 공권력이 시민사회의 조정자·해결사로 개입하면 할수록 ‘시민사회의 힘’이 줄고, 상대적으로 ‘정부의 힘’이 더 커지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걸 엄마 젖 먹던 시절부터 배워온 사람들처럼.
볼리비아에선 더 자주 시위대와 마주쳤지. 택시기사, 버스 운전사 등 운수노동자의 파업이 잦았어. 주로 요금 인상, 최저임금 문제로 발생한 파업이었고 시위대를 만난 장소는 도로였어. 운수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단순히 ‘일손을 놓다’에서 그치지 않고, 협상이 끝날 때까지 도시로 진입하는 길을 봉쇄하곤 했어. 나는 버스에서 내려 시위대를 지나 맞은편에서 다시 버스를 잡아타야 했지. 불평을 하는 사람은 외국인 여행자들뿐, 현지인들은 간식거리까지 사 먹으며 태연한 표정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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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시의 파업. 도로에 줄을 치고 볼리비아 국기를 가운데 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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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가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현실에 눈뜨는 계기가 된 광산도시, 포토시에서도 파업을 했어. 그날 방문하려던 박물관은 말할 것 없고 시장, 가게, 식당, 버스회사, 택시회사도 문을 닫고 모든 공공서비스가 멈췄지. 주요도로엔 차량이 오갈 수 없게 줄을 치고, 행인이 그 줄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볼리비아 국기가 걸려 있었어. 포토시의 모든 시민이 동참한 까닭에 파업이 끝날 때까지 밥 먹을 식당을 찾을 수도 없었지. 저 혼자 돈 벌려고 장사를 하면 사람들이 그 집 유리창을 향해 돌을 던진다던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남미의 집회·시위문화를 소개하는 건 집회와 시위 또한 인류의 문화 중 하나이고, 다양한 집회와 시위의 방식이 발생, 도태, 진화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발전해 왔고, 발전해 가기 때문이야. 3·1 만세운동, 월스트리트의 오큐파이 운동, 홍콩의 우산운동, 프랑스의 밤샘시위, 아르헨티나의 저항 수유, 대한민국의 촛불집회….
아마존에서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청취하고 히말라야에서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을 시청할 수 있는 인터넷 시대. ‘제4차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를 본 장소는 콜롬비아의 국립자연공원. 전인권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고 입을 떼던 순간, ‘성조가’를 기타로 연주하던 지미 헨드릭스를 떠올렸어. 반전운동이 거세던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지미 헨드릭스가 있었다면,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엔 전인권이 있었지. 비록 현장에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느낄 수 있었어.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 청와대로 가는 길을 막아선 경찰, 광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전인권의 입에 눈 모으고, 노래에 귀 기울이다가 감전이라도 된 듯 전율하고 있다는 걸.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해변에서 스마트폰 액정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훗날 근현대사는 2016년을 거론하며 ‘한국의 집회시위문화는 전인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긴 노동시간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라진 전통축제 대신 촛불집회가 억눌린 시민들의 분출구, 저항축제로 자리 잡을지 모르겠다고. 막힌 물은 어딘가를 뚫고 나가기 마련이지.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라고 전인권이 노래할 때, 난 상상했어. 촛불집회 무대 위에 아이유와 박보검이 사회를 보고, 유아인이 젊은 세대를 대표해 ‘자유발언’을 하고, 김혜수가 영화인을 대표해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성토하고, 서태지의 ‘시대유감’에 맞춰 아이엠에프(IMF) 사태 이후 ‘생존’에 목매온 신세대(?)들이 다시 ‘자유’를 부르짖으며 헤드뱅잉을 하고, 빅뱅이 ‘뱅뱅뱅’을, 소녀시대가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춤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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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해고에 맞서다 경찰이 쏜 총을 맞고 사망한 버스운전사를 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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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토요일 저녁 내무반에 모인 까까머리 군인들이 침상에 모로 누워 티브이(TV)로 ‘촛불집회 라이브’를 보다가 이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
“후아 죽이는데!!! 요즘 저 춤이 밖에서 유행이라던데 이름이 뭐더라?”
“저항댄스 말씀입니까?”
“아, 그래 저항댄스! 어이, 이 일병.”
“일병 이. 병. 춘!”
“너 지난주 휴가 나갔다 왔지? 저 춤 한번 춰 봐.”
“저항댄스를 아직 못 배웠지 말입니다.”
“넌 휴가 나가서 촛불집회도 안 가보고 뭐 한 거야? 이름 석자가 대통령 부역자들 이름을 조합해서 그런지 자꾸 시대를 역행해.”
“일병 이. 병. 춘. 시정하겠습니다!”
“시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국정을 잘했어야지! 누구 저항댄스 추는 병사 없나?”
“사제 댄스인데 막사에서 춰도 되겠습니까?”
“사제? 저 춤이 누구 때문에 만들어졌는데? 다 대통령 덕에 생긴 춤 아니냐? 늘품체조 실패하자 우주의 기운을 받아 만든 춤. 그럼 국민댄스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다고?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
노동효/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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