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잊지 못할 ’카루셀 호스텔’에서의 마지막 밤
|
기타 합주를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는 프랑코와 그의 친구 다미안.
|
“내 직업은 시인이야!”
하루는 카루셀 호스텔로 막심의 친구가 찾아왔어. 니콜라스, 직업이 시인이라고 했어. 근데 나중에 보니 동네 복덕방에서 일하고 있더군. 길을 걷다가 만난 알렉산더는 자기 직업이 조각가라고 했는데 구멍가게 점원이었어. 카를로스는 화가라고 했지, 식당에서 주문을 받고 있으면서도. 선술집에서 만난 하이메도 기타리스트라며 구석에 있던 기타를 들고 와 연주를 해줬지. 그날 주고받은 페이스북을 통해 들여다보니 그는 산부인과 의사였어.
|
도미토리 방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습 중인 프랑코.
|
산책을 하다가 자기 직업이 화가라고 하던 카를로스를 본 적이 있어. 그는 인적 드문 풀숲에 홀로 앉아 스케치를 하고 있었지. 그림을 보니 솜씨가 뛰어나 보이진 않았어. 그렇지만 친구들이 저녁에 술 한잔하자는 것도 마다하곤 했지. “오늘은 일찍 집에 돌아가 그림을 그려야 해. 멋진 영감이 떠올랐거든!”
아르헨티나인에게 ‘직업’이나 ‘하는 일’이 뭐냐고 물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종사하는 일’ 대신 ‘자신이 마냥 좋아서 하는 일’을 대곤 해. 실제 많은 아르헨티나인은 ‘생계를 위해 종사하는 일’과 별도로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을 갖고 있었어. 글쓰기, 악기 연주, 그림 그리기, 공작…. 그들에게 예술이란 전문직업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향유하는 어떤 것이었어. 카를로스가 휴일에 홀로 야외스케치를 하듯이. 그런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직장과 직책이 쓰인 ‘명함’ 같은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에서 찾았지.
|
야외 스케치를 하고 있는 카를로스.
|
아침 8시면 건설현장으로 출근하는 전기기술자 프랑코도 오후 4시쯤 퇴근하고 돌아와 도미토리 방구석에 놓아둔 앰프 전원을 켜고 베이스 기타를 튕기며 시간을 보내곤 했어 “체!(아르헨티나에서 친구를 부르는 호칭) 이건 오늘 내가 작사·작곡한 노래인데 한번 들어볼래?” 다니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 프랑코랑 둘이서 도미토리를 사용했어. 주말을 맞아 바다여행을 온 아르헨티나인들이 묵기도 했지만 손님은 드물었어. 오히려 동네친구들이 더 자주 놀러 왔지. 낮에 빵집, 복덕방, 건축현장,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저녁이면 저마다 악기를 들고 우리 방에 모여 합주에 음주를 곁들여 시간을 보내곤 했어. 학창시절의 자취방 같았지.
사람들은 내가 여행(관광)을 좋아할 거라고 여기지만 내가 진정 사랑하는 건 ‘다른 곳에서의 삶’이었어. 여행이든 관광이든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은 늘 존재하지만 ‘다른 곳에서의 삶’이 늘 존재하는 건 아냐. 가령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한 달을 보냈지. 아름다운 작품이 있던 대형 미술관, 화려한 쇼, 수많은 볼거리. 그러나 그곳에 ‘다른 곳에서의 삶’은 없었지. 마르델플라타엔 ‘다른 곳에서의 삶’이 있었어. 여행이란 단 한 번의 삶에서 여러 겹의 생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 마르델플라타에서 보낸 또 다른 생은 행복했어.
유명한 작품 있는 미술관은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잊지만
’아름다운 사람들’과 보낸 날들은
기억에 남아 사라지지 않지
마르델플라타를 떠나기 나흘 전. 간만에 화창한 날이었어. 빵집에서 일하는 출로도 쉬던 휴일. “벨렌이랑 아이들 데리고 바닷가에 나가서 놀자!”고 졸랐지. 나는 돗자리를 준비하고 출로는 보온병과 마테 잔을 챙겨 바다로 갔어. 출로와 벨렌이 모래사장에 앉아 마테를 마시는 동안 나는 키아라와 안톤을 데리고 파도랑 술래잡기를 했지. 근데 뜀박질 느린 안톤의 신이 바닷물에 다 젖을 것 같았어. 그래서 신을 벗기려 했는데 안톤의 발가락이 닳은 운동화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인 걸 보고 말았어. 그 일이 다시 떠올랐어.
|
아르헨티나식 숯불 바비큐 아사도를 만들고 있는 출로.
|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할 때, 날 초대했던 파키스탄인이 있었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이방인에게 안방을 비우고 재워줬던 사내. 두 아이의 아빠였지. 얘들 신이 변변치 않았어. ‘귀국하면 새 운동화를 보내줘야지!’ 하고 주소를 수첩에 적었지. 그런데 귀국 후 이사 등등 번거로운 일로 차일피일하다 정작 소포를 보내려 했을 땐 보낼 수 없었어. 수첩을 찾을 수 없었던 거야. 10년 넘게 지난 일이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만 마음속 빚으로 남아 떠오르면 늘 마음이 무거웠어.
“나 모레쯤 떠날까 해.”
“무슨 소리야? 우리랑 지내야지!”
“벌써 한 달이나 된걸.”
“휴우, 네가 떠난다고 하니 왜 화가 나지?” 루이스가 말했어. “그러려면 우리 모두를 네 가방에 넣고 가야 해!” 막심이 말했어. 떠나기 싫긴 나도 마찬가지였어. 그러나 무한정 한곳에서 머물 순 없었어.
떠나기 전날 시내의 쇼핑센터로 갔어. 3천페소를 도둑맞는 바람에 비싼 신을 살 순 없겠지만 안톤과 키아라에게 운동화를 사주고 싶었어. 파키스탄 친구에 대한 빚을 그렇게라도 갚고 싶었는지 몰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갈 차비를 제하고 가진 돈을 다 털어 곰 인형과 운동화 두 켤레를 샀어.
|
출로와 벨로의 두 딸 키아라(5살·왼쪽)와 안톤(3살).
|
숙소로 돌아와 막심네 방문을 두드렸어. 한살배기 카에타노의 선물, 곰 인형을 내밀었지. 뜻밖의 선물에 막심과 소피가 날 끌어안았어. 그리고 출로네 방 앞에서 난 머뭇거렸어. 새 운동화를 선물하는 게 혹여 아이들 신도 챙기지 않은 부모에 대한 질책으로 여겨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에. 그건 기우였어. 출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내 볼에 키스했고, 벨렌은 아이들에게 새 운동화를 신긴 뒤 방방마다 돌아다니며 자랑을 했지. “이거 보세요. 로가 키아라와 안톤의 신을 사줬어요!” 해가 저물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중이었어. 갑자기 막심이 부엌으로 뛰어들더니 소리쳤어.
“로, 널 이대로 보낼 순 없어!”
막심의 차를 타고 다 같이 시내로 갔어. 영화 <프라하의 봄> 중 왈츠를 추러 마을로 가던 장면이 떠올랐어. 차가 선 곳은 재즈 클럽. 비록 규모는 작아도 런던의 ‘로니 스콧’ 이후 가장 멋진 곳이었어.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고, 신나게 놀다가 숙소로 돌아왔을 땐 자정이 지나 있었지. 우린 대문 앞에서 가랑비를 맞으며 얘기를 나눴어. 옷이 젖는데도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어. 작별인사를 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기가 너무 아쉬웠던 거야. 프랑코가 말했어.
“우리 포도주 딱 한 병만 더 마시자!”
하고 팠던 말을 프랑코가 꺼낸 데 감사하며 자리를 옮겼어. 프랑코가 부엌의 전등을 끄고 초를 켰지. 막심이 포도주병을 따는 동안 모두 타오르는 초를 들여다보았어. 살룻! 모두 잔을 들어 건배를 했어. 포도주병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지. 소피와 프랑코가 얘기를 나누며 빈 잔을 씻는 모습을 보며 루이스가 혼잣말처럼 속삭였어.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을까?” “…?” “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랐어. 같은 아르헨티나인이지만 이들은 정말 아름다워. 수도 사람들은 이렇지 않거든.”
카루셀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어.
|
창밖에서 바라본 카루셀 부엌 풍경.
|
아침 8시. 프랑코가 나를 깨운 뒤 출근 직전까지 포옹을 하며 같은 말을 반복했어. “로, 넌 내 친구야, 진정!” 늦잠자기 일쑤인 막심도 일찍 깨어 제가 만든 셰이크를 다 마셔야 택시를 불러주겠다며 바나나와 배를 믹서에 밀어 넣었어. 셰이크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사이 1시간이 금세 지나갔지. “이러다 나 오늘 못 떠나겠다.” “그럼 내일 가면 되지! 그리고 내일이 되면 또 내일, 하하하.”
택시가 도착했어. 대문 밖까지 배웅을 나온 친구들과 작별의 키스를 나누고 차에 올랐어. 운전수가 시동을 걸었어. 차창을 사이에 두고 우린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지. 그때 소피가 소리쳤어.
“로, 네가 택시에 탔을 뿐인데, 벌써 네가 그리워.”
대서양을 따라 달리는 동안 나는 생각했어. 유명한 미술관(박물관)과 카루셀 호스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망설임 없이 카루셀 호스텔을 선택할 거라고.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 소장된 미술관과 아무리 대단한 유물이 소장된 박물관이라 할지라도 1년, 2년, 3년이 지나면 대부분 잊혀져. 그러나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보낸 날들은 10년, 20년, 아니 더 오랜 세월이 지나도 기억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글·사진 노동효/여행작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