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11.09 19:25 수정 : 2016.11.09 19:40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정치인 풍자가 자유로운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음악에 맞춰 탱고를 추는 아르헨티나 사람들.
나 어릴 적 신문을 펼치면 한 꼭지쯤은 미국에선, 선진국에선 이렇더라며 한국과 비교하는 글이 실려 있곤 했어. 주로 미국물 먹고 돌아온 교수들이 쓴 칼럼이었는데 나름 합리적인 사례가 많았으므로 선진국과 한국을 비교하는 글은 ‘하수구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기를 끌었지. 여행자율화 전이었고, 그래서 대부분의 국민이 외국물이든 외국문화든 접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어.

‘88 올림픽’이 끝나고 누구나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그런 유의 기사나 칼럼은 차츰 줄어들었어. 세계경제대국 순위가 오르며 선진국이란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나 정책이 우리보다 우월하고 옳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도 사실이야. 더구나 프랑스, 영국, 독일, 덴마크도 아닌 선진국 문턱에서 자빠져 버둥거리는 아르헨티나와 비교하는 거라면 더더욱! 그런데,

“왜 그리 큭큭거리며 웃는 거니?”

하루는 카루셀 호스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프랑코가 뭔 일인지 키득키득 계속 웃음을 터트렸어. 내 질문에 그는 손을 번쩍 들어 나의 등 뒤를 가리켰어. 거긴 <롤링 스톤스>에서 오려낸 사진을 붙여놓은 카루셀 호스텔 내 ‘록의 전당’ 자린데? 돌아보니 그 자리에 포르노 그림이 놓여 있었어.

카루셀 호스텔 내 ‘록의 전당’.
벌거벗은 남자가 엉덩이를 뒤로 내밀고 있었고, 벌거벗은 여자가 그물 스타킹 차림으로 사타구니에 차고 있는 딜도를 남자의 항문에 반쯤 밀어 넣은 상태로 활짝 웃고 있었어. 성인용 잡지인가, 했는데 다시 보니 그 그림이 실린 지면은 신문이었어. 선정적인 그림이 신문 전면을 다 채우고 있었지. 만평도 아니고 이게 뭐야? 테이블 위로 그림을 옮겨 내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프랑코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어.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 거야?”

“지나간 신문인데 오늘 화덕에 불을 지피다가 발견했지 뭐야. 크큭. 이 여자는 크리스티나고, 모자 쓴 남자는 방송 피디야. 크크큭. 남자가 쓰고 있는 모자에 그려진 ‘678’은 아르헨티나 공영 방송국을 가리켜!”

크리스티나는 2007년 말부터 2015년 말까지 재임한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 그녀가 현직이던 당시 <바르셀로나>(2003년 창간한 아르헨티나의 격주간지로, 정치·사회 풍자를 전문으로 한다)에 게재된 그림이었어. 프랑코는 크리스티나가 공영방송을 제 맘대로 하던 걸 풍자한 그림이라고 설명했어. 듣고 보니 한국의 현실과 유사했어. 그래서 난 상상해 봤지. 가령 저 자리에 크리스티나 대신 대한민국 대통령을, 678 방송국 피디 대신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그려 넣은 그림이 신문 전면에 실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자신의 뇌’에 먼저 배포를 해봐. “뭐 어때?”니 아니면 “감히 너무하잖아!”니?)

대통령 비판 신문 만평이
성인잡지 수위로 그려져도
“그림 그리고 웃는 게 뭐 어때?”
그들과 한국은 왜 다른 걸까

주말엔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는 아르헨티나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
“뭐 어때?”든 “감히 너무하잖아!”든 ‘서양이야 우리나라보다 성적으로 더 개방적이니까 저럴 수도!’라든가 ‘서양은 정치인을 풍자하는 표현의 자유가 우리보다 일찍 시작되었으니 그럴 수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더러운 전쟁(1976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독재정권이 독재의 부당함과 잔학행위에 불만을 ‘표현’하는 시민을 잡아 가두고 죽이던 때를 일컫는 용어. 그 무렵 군부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무려 3만명에 이른다)에서 벗어난 건 1983년이니 그들이 군부독재 시대로부터 벗어나 ‘표현의 자유’를 얻은 건 겨우 30여년에 지나지 않아. 그 시절 대통령이나 정부 욕한다고 잡아 가두던 건 그들이나 군사정권 시절 한국이나 매한가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태우 대통령이 신문 만평 소재로 등장했으니, 그 기준으로 봐도 우리보다 겨우 4년 앞설 뿐이지.

30여년이 흘러 아르헨티나 국민이 제 나라 정치인에 대해 이 정도 수위로 풍자를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에 이르는 동안 우리는 어디쯤 도달했을까. 내가 본 아르헨티나 신문 정도의 수위는 고사하고, 시민이 대통령을 쥐로 그렸다고 잡아들이고, 화장실에 그려진 낙서까지 경찰이 추적할 뿐 아니라 2014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홍성담 화가의 경우는…. 말을 말자. 한국은 정치인 풍자에 관한 한, 키스하는 것만 봐도 ‘어머나 이를 어째!’ 하며 눈 가리던 시절 같아.

“근데 이런 걸 그리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지 않니?” 프랑코에게 물었어.

“우리가 선출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잘못하고 있다고 시민이 이 정도 그림 그리고 웃는 게 뭐 어때?”

카루셀 호스텔에 모인 막심네 가족과 친지들.
답변이 더 멋지군. 근데 그림이 좀 노골적이긴 했어. 사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성적 농담 수위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좀 높은 편이긴 해. 막심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을 초대해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놀던 날이었어. 내가 여행작가라고 하니 막심의 삼촌이 물었지. “인도 바라나시에 가봤니?” 그렇다고 했더니 “인도 사람들은 화장한 시체를 버린 강물을 마신다던데 정말이야?” 하고 되물었어. 그렇다고 하자 옆에 있던 막심의 어머니가 “그 강물 마신 사람들은 자지가 잘 서지 않을 거야!”라고 농을 했어. 아들과 며느리를 비롯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온 가족이 웃어댔어. 나만 못 웃었지. 남자 성기를 가리키는 스페인어를 몰랐거든. 멀뚱히 눈만 껌벅이며 쳐다보자 루이스가 통역을 해줬어. 그제야 웃으며 내가 말했지. “천만에요. 나도 그 강물로 끓인 차를 마셨는데, 더 잘 서던데요!” 또 한바탕 온 가족과 친구들이 웃어댔지.

근데 이런 농담을 며느리 앞에서 해도 시어머니로서 권위가 설까? 하긴 가족들뿐 아니라 유명한 가수나 음악가에게도 권위주의를 찾아보긴 힘들어. 하루는 카루셀에서 저녁 먹고 놀다가 밤 11시쯤 프랑코와 시내의 밀롱가(탱고를 추거나 듣는 술집)로 갔어. 마르델플라타 출신의 최고 기타리스트가 매일 찾는 곳이라고 했어.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테이블은 거의 비어 있었지. 파장 분위기인가?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좌석이 점점 차더니 새벽 1시에 이르니 한자리도 남지 않더군. 손님들 중 음악과 술기운에 취해 흥이 난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신청해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 기타 반주를 해주는 이는 바로 프랑코가 언급한 기타리스트, 가치토 로드리게스였지.

그는 전국 콘서트가 없을 땐 마르델플라타로 돌아와 단골 밀롱가에서 매일 저녁 연주를 한대. 유명인과 일반인 사이를 나누는 거리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어. 연주를 마치면 손님이 그의 모자에 팁을 내려놓았고, 그는 웃으며 “니콜이 무려 10페소(800원)나 냈구먼, 고마워!” 하는 식이었어. 무게를 잡지도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의식도 없었지. 사람들은 매스컴에 회자되는 직업군이 서민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도 여기지 않았고, 그들에 대한 선망도 없었어. 정치인으로서, 예술가로서, 연예인으로서 존경할 만하면 존경하고 능력이 탁월하면 그 부분을 높이 살 뿐. 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노년의 사내가 일어나 가치토 로드리게스에게 소리쳤어.

아르헨티나의 밀롱가에서 열린 탱고 콘서트.
“나 노래 한 곡 할래. ‘포르 우나 카베사’(Por Una Cabeza) 좀 쳐 줄래?”

“응, 잠깐만.”

기타와 반도네온 반주에 맞춰 배 나온 사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젊은 때 한가락 한 솜씨인 듯 목청은 굵고 우렁찼어. <트루 라이즈>와 <여인의 향기> 등에서 주인공들이 추면서 전세계인의 귀에 익은 탱고곡. 감미로운 선율에 비해 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좀 웃기지. ‘대가리 하나 차이로’. 경박한 여자에게 홀린 청년이 경마에 전 재산을 걸었다가 날리는 얘기라지. 근데 지금 가사를 떠올리니 왜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환호했다가 이제 와 후회하는 사람의 심정처럼 들리는 걸까?

져 버렸네, 대가리 하나 차이로/ 그 고결한 말은 쭉 나가다가 늘어져 버렸지/ 말은 돌아오면서 내게 말하는 것 같았어/ 잊지 말게, 형제여/ 알다시피 넌 도박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중략) 경마는 이제 신물 나, 더 걸 돈도 없어/ 사진 판정 따윈 이제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일요일에, 정말 그럴듯한 말이 나온다면/ 난 모든 걸 또 걸겠지, 어쩌면 좋아?

글·사진 노동효/여행작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