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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28 19:22 수정 : 2016.09.28 19:46

[매거진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지구에서 가장 높은 호수 ‘티티카카’에 뜬 보름달

태양의 섬에서 내려다본 티티카카 호수.
‘이슬라 델 솔’로 들어가는 길이었어. 이슬라는 섬, 솔은 태양. 안데스산맥 해발 3800미터에 자리잡은 티티카카 호수가 품고 있는 섬 중 가장 큰 섬이지. 잉카의 황제가 된 망코 카팍과 그의 아내가 태어났다는 곳으로 페루와 볼리비아 원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에게 가장 신성시되는 곳이야. 우리로 치자면 단군이 내려온 곳이지. 서울 면적의 13배. 큰 배가 다니는 호수 중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로 맑기가 이를 데 없었지. 맑은 수면 아래를 내려다보다 문득 궁금해졌어. 고인 호수가 이렇게 맑은데, 흐르는 강이 흐릿하다 못해 큰빗이끼벌레와 녹조로 가득하다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사람들은 4대강 사업으로 강이 호수로 변했다지만 티티카카 호수를 보면 차마 그런 표현조차 할 수 없을걸.

여객선은 승객으로 가득 차 있었어. 강렬한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아래층은 말할 것 없고, 갑판도 유럽, 북미에서 온 관광객들로 빈자리 하나 없었지. 관광객은 피부색뿐 아니라 복장으로도 섬 주민과 금세 구분할 수 있었어. 하나같이 아웃도어 브랜드를 입고 있었거든. 외국 나가면 아웃도어룩으로 한국인 여행자를 알아본다지. 자기 나라 벗어나 남미를 여행하는 유럽, 북미 관광객의 복장도 별반 다르지 않아. 현지에서 기념품 삼아 사 입는 알파카 니트 아니면 아웃도어룩이지. 아웃도어룩은 자연스럽고 소박한 생활을 지향하는 아웃도어 라이프에서 파생해 주로 산, 강, 바다, 들에서 입는 기능성 옷. 그런 옷을 입는 사람들은 자연을 닮아 느긋하고 따뜻할 것 같아. 근데 의아한 게 아웃도어룩을 입은 여행자일수록 중남미 현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많고, 차가웠어.

당나귀 등에 짐을 싣고 돌계단을 오르는 태양의 섬 원주민.
중남미 외 다른 대륙에서 온 관광객이 현지인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경계하거나, 동정하거나. 방금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관광객과 현지인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는데 관광객이 원주민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어. “먹고살기 힘들지 않나요?” 그 질문은 몇 년 전 내가 출연한 여행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했지. 피디가 오지의 원주민에게 물었어. “여기서 사는 게 어떤가요?” “행복하죠. 아름다운 산이 있고, 맑은 공기며 밝은 별, 온 마을 사람이 다 가족 같고.” 피디는 되물었어. “음, 힘든 건 뭔가요?” “그게… 딱히 없는데… 아, 맞다! 학교가 멀어서 아이들이 힘들죠. 그리고 또 대중교통이 없어서….” 방송에선 “이곳에서 사는 게 어떤가요?” “학교가 너무 멀어서… 삶이 힘들어요”로 편집되어 있었어. 기술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런 식으로 편집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며 위안했을 거야. “내가 사는 나라가 최고야, 난 정말 편한 데서 살고 있구나!”

두 시간 걸리는 뱃길이 심심했는지 ㄴ사 외투와 ㅁ사 등산화를 신은 관광객이 서로 국적을 묻고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어. 소매치기, 좀도둑이 들끓는다고 알려진 중남미에서 아웃도어 브랜드는 안심보증수표가 되지. ‘우린 서로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같은 선진국 여행자군요!’ 브랜드를 입지 않은 원주민은 동류에서 배제되고 경계의 대상이 되곤 했어.

기능성 아웃도어룩과 배낭을 메고 산책하는 관광객.
중남미에서도 대도시 중심으로 아웃도어 브랜드를 입는 현지인이 부쩍 늘었어. 짝퉁도 재래시장을 통해 퍼지는 중. 이런 현상은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마주친 모습을 떠올리게 해. 외국인이라곤 30년 만에 처음이라던 오지에 들어와 있던 서구식 옷.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을 제외하면 어른, 아이 막론하고 티셔츠 차림이었지. 보수적 사회에서 최후까지 전통을 지키는 이는 여성들.(표면적으론 지킨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속엔 남성에게 외래 문물이 먼저 허용되는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자리잡고 있지.) 티셔츠는 주로 부자 나라 사람이 가난한 나라 사람을 위해 기부하거나, 재활용 차원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넘어온 옷인데 그런 옷이 원주민의 문화를 파괴하고 있었어. 면을 뽑고 베틀로 짜는 노동으로 만든 전통 옷은 관광객에게 팔고, 정작 그 옷을 입어온 원주민들은 티셔츠를 입고.

해방감 느낄 수 있는 축제가
한국에서 사라져버린 건
문화 다양성이 파괴된 탓
‘다름’이 없는 세계화가 좋은 걸까

세계화는 어떤 면에선 다양성 파괴로 이어져. 머지않아 안데스산맥 어디서나 아웃도어룩을 입은 원주민을 보게 될까, 염려하는 건 기우일까. 더운 동남아를 값싸고 가벼운 티셔츠가 점령했다면, 일교차 큰 안데스는 아웃도어룩이 점령할 가능성이 높겠지. 그렇게 되면 동남아처럼 ‘오지 탐방’이란 이름으로 관광객의 눈요기와 인증샷을 위한 여행상품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따르릉. “오늘 미국 관광객들 모시고 3시쯤 마을에 들어갑니다, 아시죠?” “아무렴. 한두번 하는 일도 아닌데.” 아웃도어룩을 입고 밭일하다 오후 2시쯤 집으로 돌아와 장롱 속에서 전통의상을 꺼내는 사람들.

페루 쿠스코에서 만난 한복 입은 소녀들. 페루 사람들은 한복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는 것과 한글로 자신의 이름을 써주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지구상의 생물이 하나둘 멸종되어 가듯 다채로운 전통의상이 장롱 속으로 들어가는 걸 목격하는 건 슬퍼. 이런 현상은 현재 세계화가 진행 중인 가난한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냐. 실은 지난 30년 우리가 겪은 일이지. 얼마 전의 한가위를 돌아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기차역에서 한복 입은 사람을 몇이나 봤지? 1980년대 어머니는 치마저고리, 아버지는 두루마기, 아이들은 색동옷을 입고 골목을 오갔지. 이젠 명절에도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을 찾기 어렵더군.

각국을 여행하던 중 느낀 게 있어.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일수록 세계화(단일화)가 천천히 진행되고, 단일민족을 강조하며 다양성이 결핍된 사회일수록 세계화에 발 들여놓는 순간 고유의 전통이 급속도로 무너진다는 것. 굳이 다른 나라의 예를 들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배달민족의 전통을 자부하면서 거리에서 한복 입은 이 찾아볼 길 없는 우리 모습이니까.

잉카 축제를 맞아 전통의상을 입고 춤추는 사람들.
오늘날 관광은 국가수익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이 되었어.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시기는 그 나라 축제 기간이지.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 건 그 축제에 어울리는 전통의상이고. 모든 여행자의 사진작가화가 이뤄진 오늘 ‘찍을 거리’는 최대 관심사. 티셔츠, 아웃도어룩을 입은 현지인은 피사체가 되지 않지만 전통의상 입은 현지인을 찍은 사진은 에스엔에스(SNS)에서 ‘좋아요’가 수없이 매달리며 세계 곳곳으로 퍼지지. ‘나도 저곳에 가서 저런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어쩌면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 전통의상의 보편화인지 몰라. 명절이라도 한복 착용자에게 혜택을 준다면 한복 입은 이들 하나둘 늘겠지. 한가위 무렵 방문한 외국 관광객이 올린 ‘한복 입은 한국인들’ 사진이 에스엔에스를 통해 퍼져나가 ‘한국 방문하기 최적기, 한가위 축제’ 하고 외국여행 사이트 족보에 뜰지도. 곡선미, 우아미, 색채미 등 한복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들은 많지만 무엇보다 그 아름다움은 ‘다름’ 때문일 거야.

중남미의 축제를 보며 늘 아쉬웠어. 우리에겐 연중 단 하루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축제가 없구나! 아니, 없던 건 아니고 사라진 거지. 한가위도 원래는 축제였대. 대낮처럼 훤한 달이 떠 사람들이 온 마을을 쏘다니던. 나 어릴 적엔 축제의 성격이 남아 있긴 했지. 그건 일상과 다른 옷에서 시작되었어. 색동 치마저고리 입은 소녀들, 두루마기 걸친 아저씨들. 그들은 얼마나 예쁘고 기품 있어 보이던지! 축제성이 사라진 혐의를 한복이 사라진 데서 찾는다면 억지일까.

티티카카 호수 위로 뜬 보름달.
한가위 지나 그믐달이 뜨겠구나. 달 이울듯 우리 전통도 쪼그라드는 것 같아. 난 전통주의자는 아냐. 생물 다양성이 깨진 강이 강 아닌 게 되듯 문화 다양성이 깨진 세계는 세계가 아닐 테니, 그게 안타까운 거야. 고국의 지인에게 보름달 소원을 빌었냐고 물었어. 그는 말했지. 날 흐려 올해 한가위엔 보름달을 볼 수 없었다고. 내가 대신 빌어주겠다는 말과 함께 난 덧붙였어.

오늘 볼 순 없어도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글·사진 노동효/여행작가

티티카카 호수 위로 뜬 보름달.

당나귀 등에 짐을 태양의 섬 원주민.
잉카 축제를 맞아 전통의상을 입고 춤추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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