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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24 19:47 수정 : 2016.08.25 14:45

[매거진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쿠스코의 숨결을 전한 ‘역사 기행 안내자’ 파블로

쿠스코의 ‘달의 사원’ 정상에서 본 풍경. 노동효 제공

“자, 여기 오늘의 메뉴를 보세요. 수프와 샐러드 중 선택하실 수 있고요, 메인 요리로 소고기랑 알파카 스테이크, 송어구이가 있습니다. 후식으론 커피, 마테, 레모네이드 중 골라 마시고요. 네네, 전부 합쳐서 20솔이라니까요. 자, 이쪽으로 들어가십시오.”

파블로의 직업은 식당 여리꾼(삐끼)이야. 아르마스 광장과 접한 식당 앞에서 전 세계 관광객을 붙잡고 호객행위를 하지. 고국인 아르헨티나를 떠난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쿠스코까지 흘러왔어. 지난달까진 부엌과 화장실까지 딸린 월세방에서 지낼 정도로 여유(?)도 있었대. 최근 축제가 시작되면서 수입이 뚝 떨어졌지. 식당 앞이 시가행진과 인파가 뒤섞인, 지나기도 힘든 길이 되어 버렸거든. 하루 매상 중 일부를 받던 그의 재정은 곤두박질쳤어. 그래서 알렉산더가 세상의 끝, 즉 ‘막장’이라고 부른 아우키하우스에 오게 된 거야.

잉카시대의 담벼락 위에 세워진 현대식 식당. 노동효 제공

처음 봤을 때 미국의 코미디 배우, 벤 스틸러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 부리부리한 눈에 항상 들떠 있었고 큰 목소리에 말은 빨랐지. 게다가 무슨 말을 꺼내든 ‘자, 이건 무진장 중요한 문제야!’라는 투였어. 조증 환자 같기도 하고 허풍쟁이 사기꾼 같기도 했어. 처음 만난 날 나의 “그라시아스”는 “그라씨아스”로 발음을 고쳐야 한다며 거들먹거리는 파블로의 행동을 지켜보던 숙소 친구들도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어. ‘아무래도 좀 또라이 같으니까 네가 이해해’ 하는 표정으로.

며칠째 감기 기운이 사라지지 않던 날이었어.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 할 것 같더군. 친구가 일하는 식당으로 갔어. 손님을 끌다 말고 파블로는 식당 안까지 따라 들어와 어깨를 으쓱이며 지배인에게 날 소개했지. “이 손님은 한국에서 온 내 친구랍니다.” 뜨끈한 야채 수프와 알파카 스테이크, 그리고 레모네이드로 배를 가득 채웠어.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귀가한 파블로는 조만간 ‘템플로 데 라 루나’, 즉 달의 사원엘 같이 가자고 했어. 시원한 맥주도 마시고, 기분 좋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자고. 좋다고 대답하고, 언제 갈 거냐고 물었어. 요즘 무릎이 좋지 않으니 다 낫는 대로 가자고 하더군. 아무러면 어때, 그러자고 했지.

“여긴 궁전, 저긴 잉카 흔적이야”
길 아닌 길에서 알게 된 이야기를
열정으로 들려주고 돌아서던 너
무릎이 안 나은 걸 그제야 알았어

며칠 지났을까. 파블로가 일요일엔 쉬니까 달의 사원을 다녀오자는 거야. “너 무릎은 다 나은 거니?” 하고 물었어. 계단을 오르내릴 때 조심하는 모습이 역력했거든. 그는 거의 다 나았다고, 낼모레면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했어. 그리고 토요일 저녁.

“퍼킹 투데이! 퍼킹, 퍼킹. 손님이 너무 없어. 수입도 없어. 숙박비 내려면 내일 일하러 가야 해, 빌어먹을!”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파블로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어. 흠, 약속을 해놓고선 못 지킬 것 같으니 손님 핑계를 대는 거겠지. 이어서 나올 말도 짐작할 수 있었어. 달의 사원에 못 간다는 말이겠지. 근데 그게 아니었어.

“오전에 일찍 가면 점심 전에 다녀올 수 있을 거야. 우리 아침 8시에 출발하자. 난 7시면 잠이 깨니까. 평소보다 네가 좀 일찍 일어나면 돼.”

나는 물었어. “무릎은 정말 괜찮은 거니?”

“문제없어. (제자리뜀을 하며) 이거 봐, 전혀 지장 없다니까!”

그래도 걱정이 됐지. “몇시까지 레스토랑에 돌아가야 하는데?”

“12시30분. 난 달의 사원까지만 갔다가 먼저 내려오고, 넌 천천히 구경하다가 와.”

여전히 난 믿지 못했어. 낼 아침엔 늦잠을 자는 바람에 못 간다고 핑계를 대겠지. 중남미 친구들이 약속시간을 어기는 데 익숙해져 있던 터라 난 녀석을 8시에 볼 일은 없을 거라 여겼어. 근데 웬걸! 아침에 일어나니 7시부터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8시 정각에 우린 길을 나섰어.

스페인 지배기의 수도원을 개조해 지은 호텔 모나스테리오의 홀. 노동효 제공
파블로는 달의 사원에만 나를 데려가려던 게 아니었어. 내가 들른 적조차 없는 쿠스코의 고급 호텔, 은행, 관공서, 부티크 상점을 헤집고 다니며 잉카 문화와 스페인이 파괴한 흔적을 보여주고 얽힌 사연을 쏟아내기 시작했어. 예상치 못한 인물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고고학적 지식에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 무작정 문을 열어젖히고 날 이끌고, 때론 지배인에게 양해를 구해 날 안내했어, 쿠스코에서 보름째 지내면서도 몰랐던 낯선 세계로.

“이 호텔과 저 은행은 원래 궁전의 일부였어. 지금은 길이 나서 끊겼지만 연결되어 있던 성벽이지. 상상이 가니? 당시 건물이 얼마나 거대했을지?” 그러던 그가 산블라스 광장으로 오르다가 갑자기 표정이 굳었어.

“아무 한국말이나 나한테 가르쳐 줘 봐.”

“지금? 왜?”

“이제 우리가 갈 곳은 대통령들이 묵는 최고급 호텔이야. 날 보면 문전에서 쫓아낼 거야. 그러니 귀빈을 모시고 온 가이드 행세를 한다는 거지. 한국말을 하면 날 우습게 보지 않을 거야.”

그래서 가르쳐줬지. “여기가 제가 말한 그 건물입니다!” 몇 번 그 문장을 반복하던 파블로가 당당하게 호텔 문을 열어젖혔어. 근데 들어서자마자 나도 알아듣지 못할 외계어를 떠들어대는 거야. “요마쿠 차카파 마피코 가라임니다.” 하긴 호텔 관리인이 한국어를 알 게 뭐야. 한국말과 상관도 없는 말을 한바탕 떠들어댄 파블로가 관리인에게 다가갔어. “한국에서 온 귀빈에게 이 호텔의 유래에 대해 알려주려는데 둘러봐도 될까요?” 양복을 입은 사내가 날 보더니 다행히 고개를 끄덕였어. 파블로는 국빈을 대하듯 날 안내했지. 세상에나! 깜짝 놀랐어. 옛 수도원을 통째로 개조해 호텔로 만든 곳, 미사를 보던 성당은 거대한 홀로 사용되고 있었어. 온통 황금빛으로 들어찬 화려한 공간.

잉카와 스페인 문화가 뒤섞인 호텔을 섭렵한 뒤 파블로는 수상쩍은 길로 날 안내하기 시작했어. 깨진 병, 버려진 콘돔, 과자봉지가 뒹구는 개울가와 가파른 오르막. 대체 왜 반듯한 길을 버리고 이런 길로 날 데리고 오는 걸까. “잉카의 옛길들이야. 이 돌을 보라고.” 파블로가 가리키는 곳은 빈민의 터에 남아 있는 잉카의 흔적이었어. 길 아닌 길을 그동안 얼마나 싸돌아다녔던 걸까.

잉카시대 만들어진 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마을. 노동효 제공
오전에 쉬지도 않고 날 위해 시간을 내준 파블로가 너무나 고마웠어. 그러다 그가 쓰레기로 너저분한 담벼락 사이 풀숲을 파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누고 간 똥이 진득하게 얹혀 있는데도 맨손으로 걷어내며 “이걸 봐, 풀 아래 이 돌을! 여긴 잉카의 수로였다니까.” 열을 다해 설명할 때, 난 그만 눈물이 나고 말았어. 안내한 대가로 뭘 바라는 것도 아니었어. 그저 자신이 알게 된 바를 내게 얘기해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바닥을 가리키는 손엔 똥이 그대로 묻어 있었어.

달의 사원에 이를 때까지 그는 거듭 시간을 확인하곤 했어. 사원까지 거리와 그 사이에 있는 유적들 중 무엇을 얼마나 보여줄지 계산하려는 듯. 몇 개 유적을 더 지나 우린 달의 사원 입구에 도착했어. 낮 12시. 식당까진 1시간30분은 족히 걸릴 거리였어.

달의 사원 암석 아래 잉카시대 제사를 지내던 동굴이 있다. 노동효 제공
“여기서도 보여줄 게 많은데 시간이 없어 너무 아쉽군. 참, 이 돌을 봐. 뭐가 연상되니? 발과 다리야. 사타구니쯤엔 동굴이 있지. 맞아, 이곳은 여자 몸의 형상을 하고 있어. 그래서 달의 사원이라 불리는 거고. 이젠 정말 시간이 없군. 난 가볼 테니 넌 동굴도 들어가고, 사원 꼭대기도 올라가 봐. 정말 기막힌 풍경을 보게 될 거야.”

차비를 줄 테니 택시를 타라고 파블로에게 권했어. 그는 여긴 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라며, 뛰어가면 30분이면 내려갈 수 있다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어. 난 시야에서 파블로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어. 그러다 알고 말았지. 그가 낫지 않은 무릎 때문에 다리를 절룩이며 가고 있다는 것을.

달의 사원으로 가는 언덕에서 바라본 쿠스코 시내. 노동효 제공

노동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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