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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18 20:25 수정 : 2016.05.19 10:24

짧은 치마에 망사 스타킹을 신고 거리를 걷는 여공무원. 쿠바에서 망사 스타킹을 신은 여성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다. 노동효 제공

[매거진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쿠바에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①…낯선 ‘외계’ 나라 새 변화가 시작됐다

“이 나라에선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어요.”

이 말을 처음 접한 건 18년 전 파키스탄에서였다.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니! 도무지 속뜻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파키스탄 친구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죠?’라고 묻고 싶었지만 며칠 전 식당에서 개가 풀을 뜯어먹는 모습을 직접 본 탓에 그런 비유는 접어두고 얌전히 되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죠?” “이 나라에선 될 일이 안 되기도 하고, 안 될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별반 다르지 않은데 ‘되기도 안 되기도’라는 ‘확률의 세계’가 끼어들자 다소 이해가 갔다. 대신 그가 ‘이 나라에선!’을 극구 강조했기에 파키스탄만 그런 줄 알았다.

그랬는데 네팔에서도,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라오스에서도…, 심지어 바다 건너 볼리비아·페루·아르헨티나에서도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했다. “이 나라에선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어요.” 다녀보니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나라가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여권에 찍힌 스탬프가 늘어나면서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나라도 점점 불어났다. 결국,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행성이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쿠바에 가게 됐다. 쿠바는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 혹은 ‘정통 사회주의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국가’로 불리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쿠바를 다녀온 사람들은 그동안 경험한 나라와 달라서일까, 쿠바를 ‘외계’(外界)라고 부르기도 했다. 세상 밖이라! 뭔지 모르지만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페루 쿠스코에서 아바나로 가는 항공권을 끊었다.

‘되는 일’과 ‘안 되는 일’ 알아보는 게
한 나라 파악하는 가장 쉬운 방법
낯선 풍경을 접하고 나면 깨닫게 된다
뭔지 몰라도 다른 세계에 왔다는 걸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에서 그 ‘일’이란 건 통상 ‘공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일이 뭐가 됐든,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알아보는 게 한 나라의 사회 분위기를 파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돼!’를 쭉 늘어놓다 보면 그 나라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가령, 한국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중년 남녀가 키스를 하면, 돼, 안 돼? 사원이 사장 어깨를 두드리며 “주말 잘 보냈어?”라고 반말을 하면? 북한 인공기 디자인의 옷을 입고 다니면? 신시가지 빌딩에 ‘안마시술소’와 ‘중고생 학원’과 ‘모텔’과 ‘교회’가 한꺼번에 입주하면? …. 이런 물음에 ‘돼!’ ‘안 돼!’를 답하다 보면 한국이란 사회가 그려진다.

쿠바도 마찬가질 테지. 첫번째 질문은, 미니스커트에 망사 스타킹 차림으로 일하는 여성들에 관한 것이다. 쿠바에서 여자 경찰이 짧은 치마에 망사 스타킹을 신고 일하면?

너무 생뚱맞나? 어쩔 수 없는 게 쿠바에 도착한 여행자가 접하는 최초의 문화적 충격이 망사 스타킹이기 때문이다. 쿠바 공항검색대에 서면, 보안검색요원 다수가 여자고 그 여자들 대부분이 짧은 치마에 망사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다. ‘망사 스타킹’ 하면 ‘에로틱’으로 직결되고, 면접 때 망사 스타킹 착용을 금기시하는 문화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정복에 망사 스타킹을 착용한 여자들을 보게 되면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게 된다.

“어, 이건 대체 뭐지?”

나뿐 아니라 같이 도착한 한국인 여성도 입을 다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은 공항을 빠져나와 도심으로 들어가서도 계속된다. 망사 스타킹을 신고 일하는 은행 여직원, 전화국 여직원…. 그러다 여성 경찰이 망사 스타킹을 착용하고 거리에 서 있는, 낯선 풍경을 접하고 나면 깨닫게 된다.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조금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것을.

성조기 디자인 옷을 입은 쿠바 젊은이. 성조기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다니는 쿠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다. 노동효 제공

쿠바에서 미국 ‘성조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다니면?

미국과 쿠바는 적대국이었다. 1959년 카스트로 형제, 체 게바라, 카밀로를 주축으로 한 혁명이 성공하고, 1961년 쿠바와 미국은 국교를 단절한다. 그 후 반세기 넘게 미국은 쿠바에 금수조처를 취했고, 쿠바는 핵미사일을 설치하려는 등 극렬하게 대립했다. 미국은 쿠바를 비난하고, 쿠바는 미국을 비난했다. 그래서 미국 성조기가 그려진 옷을 쿠바에서 입고 다니는 건, 북한 인공기가 그려진 옷을 한국에서 입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근데 쿠바에선 성조기가 그려진 옷을 입은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미군 모자를 쓰고 다니는 농부, 성조기 디자인 레깅스를 입은 주부, 미국 보안관 복장을 하고 다니는 노인들도 있다. 중요한 건 이런 풍경이 최근 미국-쿠바 간 국교 정상화 선언 이후에 생긴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쿠바인들은 과거 미국의 금수조처에 대해 화를 누그러뜨리진 않았다. 그러나 성조기 디자인 옷을 입었다고 해서 ‘종미’(從美)라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아 왔다. “디자인일 뿐이잖아, 옷이든 모자든 제 자유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용광로. 쿠바에 사는 사람들에게 적대국의 국기 정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듯, 대범했고 쩨쩨하지 않았다. 그래선지 쫓아낸 독재자와 적대국의 대통령을 조롱할 때조차 위트를 발휘했다. 그들은 감사하다고 했다. 독재자 바티스타에겐 “혁명을 일으키게 해줘서!”, 레이건에겐 “혁명을 강화하게 해줘서!”, 부시에겐 “사회주의를 돌이킬 수 없게 해줘서!”

노동효 여행작가
오래전 피델 카스트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고, 라틴아메리카인이 교황이 되면, 미국과 악수하고 세계로 문을 열 거야.” 물론 피델이 그 말을 했을 땐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기에 한 말이었으리라. 그랬는데 2008년 11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당선됐다. 쿠바인은 “이게 뭔 일이야?” 하고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5년 뒤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출됐다. 쿠바인은 제 머리를 잡고 소리쳤다. “오, 디오스!(신이시여!)” 신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면서 피델이 한 말은 예언이 되어버렸다. 쿠바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과연, 지구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행성이었다.

노동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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