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에고 마라도나는 만년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던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나폴리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월드컵에선 조국 아르헨티나에 우승컵을 안기며 신으로 추앙받았다. 축구의 신이 아닌 그냥 신으로. 영화 <디에고> 예고편 갈무리
|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디에고>
<세나>의 카파디아 세번째 다큐
나폴리·아르헨 우승 ‘신 추앙’
그라운드 밖에선 어둠의 존재로
‘좋은 소년’ ‘축구업계용’ 두 자아
몰락의 씨앗도 있는 그대로 공개
희귀촬영본 등 자료화면으로 구성
|
디에고 마라도나는 만년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던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나폴리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월드컵에선 조국 아르헨티나에 우승컵을 안기며 신으로 추앙받았다. 축구의 신이 아닌 그냥 신으로. 영화 <디에고> 예고편 갈무리
|
성별 연령을 초월해 누구나 알고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 불세출의 축구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를 소재로 삼고 있는 다큐멘터리 <디에고>(원제 ‘디에고 마라도나’). 이 영화는 이미 천재 겸 유명인 겸 스타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세나>(2010년)와 <에이미>(2015년)를 만든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다.
사실 카파디아 감독은 ‘천재 다큐멘터리 3부작’은 고사하고, 첫 다큐멘터리 <세나>도 우연한 기회에 연출하게 된 극영화 감독이다. 하지만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그의 두 전작은 ‘신화적인 포뮬러원(F1) 레이서 아일톤 세나’나 ‘혜성처럼 등장한 재즈-솔 뮤지션 에이미 와인하우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조차도 제대로 흔들어 놓기 충분할 만큼 높은 흡인력과 설득력을 보였다. 하여 궁금증이 커지지 않을 수 없다. 카파디아 감독은 이미 오랫동안 숱한 이야기의 중심에 섰던 마라도나라는 거물을 과연 어떻게 다뤘을까.
특히 관심이 가는 대목은 취사선택이다. 마라도나처럼 오랫동안 전무후무한 성취를 이뤄낸 인물을 이야기할 때 ‘그의 삶 중 어느 기간을 택할 것인가’부터 ‘어떤 면에 주목할 것인가’에 이르는 취사선택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대목이라 할 것이다.
감독이 선택한 기준은, 하지만, 허망하리만큼 간단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궁금한 것’이다. 감독은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완전히 몰라볼 만큼 극단적으로 살이 찐 마라도나의 모습을 보며 다음과 같은 궁금증을 품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마라도나 같은 어마어마한 천재 겸 스타를 저렇게 극단적으로 무너뜨린 걸까.’
맞다. 이 궁금증은 사실 우리 모두의 궁금증이기도 했다. 어디에서도 속 시원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그라운드 안팎 ‘양면성’
영화는 일단 그 답을 찾기 위해 마라도나가 스페인의 FC바르셀로나를 떠나 이탈리아의 SSC나폴리 선수로 보낸 8년의 시간(1984년부터 1992년까지)에 초점을 맞춘다.
마라도나는 나폴리가 어떤 곳인지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리그 강등만 간신히 면하고 있는 하위팀 나폴리로 이적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도 아닌, 그저 소속팀의 연고지일 뿐인 나폴리 사람들이 이탈리아 내에서 받는 차별과 무시에 분노해, 나폴리를 이탈리아 최고, 나아가 유럽 최고의 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투지를 불사른다. 그리고 그것을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도 조국인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을 위해 모든 것을 던져,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경기들을 선보인다. 그것은 과연 ‘업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기적적인 성취들이다. 그렇게 그는 결국 나폴리 사람들로부터 신으로 추앙받는다. 축구의 신이 아니라 그냥 신 말이다.
더구나 아르헨티나 판자촌 출신인 그는 15살 때부터 축구로 부모를 포함한 여덟 식구를 먹여 살리면서, 그 모든 부담을 혼자 떠안았다. 그리고 엄청난 성공과 명성을 얻은 뒤에도 16살 때에 처음 만난 여자친구 ‘클라우디아’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자, 이렇게 영화 전반까지의 마라도나는 <세나>의 아일톤 세나와 상당히 비슷하다. 물론 부유한 집안 출신에 귀티 뚝뚝 떨어지는 외모와 지적인 면모까지 거의 완벽남인 세나와 비교했을 때 외모나 배경은 정반대에 가깝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또 하나의 마라도나가 있다. 그것은 그라운드 밖, 스포츠 뉴스가 아닌 사회 뉴스에 등장하는 마라도나다. 그 마라도나는 밤문화, 섹스, 마약, 혼외출산, 발뺌, 그리고 마피아까지 아우르는, 거의 살인 빼고는 어둠의 뒷골목 키워드를 한 몸에 총망라하고 있는 존재다.
그런 그의 양면적 면모를 가장 단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린 사건이 바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있었던 ‘신의 손’ 사건이다. 4년 전 있었던 포클랜드 전쟁으로 인해, 축구 경기가 아닌 전쟁 그 자체였던 아르헨티나-잉글랜드 전에서 마라도나가 첫 골을 넣으면서 했던 핸드볼 반칙, 그리고 그 첫 골 3분 뒤에 다들 입 다물라는 듯 꽂아 넣은 환상적인 두번째 골. 영화 속 인터뷰가 말하듯, 이 경기야말로 디에고 마라도나를 그대로 상징하는 경기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반환점을 돈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세나>가 보여줬던 ‘부당한 시스템에 맞서 승리를 쟁취한 거인의 신화’에서, <에이미>가 보여줬던 ‘천재적 재능이 불러들인 명성의 무게에 눌려 무너져가는 소녀의 비극’으로 유턴한다.
|
마라도나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골키퍼와 공중볼을 다투다 왼손을 슬쩍 들어올려 공을 건드리고 있다. 이 공은 골로 기록돼 ‘신의 손’ 사건으로 불린다. 영화 예고편 정지화면 갈무리
|
인물의 입체적 탐구
하지만 <디에고>에서 신화와 비극은 따로 분리되지 않은 채 한 몸에 존재한다. 즉, 영화는 마라도나의 최측근이라 할 개인 트레이너 페르난도 시뇨리니의 말처럼, 자신의 주인공 안에 “겁 많고 좋은 소년”인 ‘디에고’와 그가 축구업계와 미디어를 위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인 ‘마라도나’, 이 두 자아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전제로 깔고 들어간다(이 영화가 성만 쓴 <세나>와 이름만 쓴 <에이미>와 달리, ‘디에고 마라도나’라는 원제목을 붙이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덕분에 <디에고>는 마라도나를 덮친 몰락을, 시스템의 탐욕과 대중의 변덕, 이기심이 합작해낸 덫으로만 단순 환원시키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처음부터 마라도나 내부에 있었던 몰락의 씨앗 역시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렇게 입체성을 얻는다.
이 입체성은 카파디아 감독이 앞선 두 작품에서도 고수했던 원칙들, 즉 ①(인터뷰가 아닌) 별도의 해설 내레이션을 쓰지 않는다 ②재연을 쓰지 않는다 ③(몇몇 설정 숏들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영화는 영화 제작 전 이미 촬영된 자료 화면으로 구성한다 등의 원칙으로 더욱 선명해진다. 한마디로 ‘화면 그 자체가 말하게 한다’로 요약되는 이 원칙들은 다큐멘터리뿐 아니라 극영화에서도 기본으로 일컬어지는 원칙인데, 상업적 극장 개봉을 전제로 한 다큐멘터리들에서 이런 원칙을 고수하는 작품을 발견하기란 지극히 어렵다는 점에서 <디에고>를 위시한 카파디아 감독의 다큐멘터리들은 돋보인다. 게다가 <세나>, <에이미>, <디에고> 세 작품이 보유한, 일단 보기 시작하면 절대로 중간에 멈출 수 없는 흡인력과 흥미진진함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짐작하셨겠지만 위의 원칙들을 고수한다는 것은 대단히 느리고 불편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려운 과정이다. 제작진은 오래전에 마라도나 영화를 위해 촬영됐던 비디오를 찾아내고, 이혼한 마라도나의 전부인 클라우디아가 처박아 뒀던 엉겨 붙은 비디오를 복원해내고, 그런 희귀자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기존 자료 화면들을 일일이 검토하고 조합한다.
이 엄청난 양의 화면들에서 추리고 추려 편집된 화면을 또다시 엄청나게 압축한다. 예컨대 영화 시작부터 타이틀까지 이어지는, 마라도나가 바르셀로나를 떠나 나폴리로 이적하게 되는 과정을 압축한 5분40초짜리 인트로는 첫 편집에서는 45분 분량이었다(그 엄청난 압축에도 이 인트로는 영화의 핵심적인 이슈들을 남김없이 제시하고 있다).
감독의 고집
영화는 심지어 경기 장면에서조차 일반적인 텔레비전 중계 화면이 아닌, 그라운드 현장에서 촬영된 화면을 고집한다. 덕분에 영화에는 왕년 아날로그 티브이 시절의 굵은 픽셀은 물론, 심지어 씹힌 비디오테이프로 인한 일그러짐까지 종종 그대로 등장한다.
이 집요한 고집과 지난한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통기성(공기가 통할 수 있는 성질)이다. 관객 한명 한명이 각자의 생각과 해석을 가지고 영화 속을 파고들고, 그 안의 공기를 들이켜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숨으로 만들어 내뱉을 수 있는, 눈에 띄지는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미세한 구멍들이다.
지난해까지 우리나라에서 다큐멘터리는 각종 주장을 제약 없이 펴기 위한 최고의 루트로 주목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다큐멘터리들의 등장이 이어지면서 점점 팩트라는 키워드가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대략 이럴 것이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것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즉,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정답이다.’
하지만 각종 팩트 다큐멘터리들이 플라스틱 밀폐용기처럼 깔끔한 내레이션과 해설용 컴퓨터그래픽 및 재연 화면에 담아 내놓는 정답들에 시야를 좁혀놓는 동안, 우리가 잃는 것은 결국 방향감각이다. 관찰과 경청과 숙고, 그리고 그 결과인 통찰이 주는 큰 그림을 통해 얻어지는.
이 통기성 높은 다큐멘터리를 보며, 그리고 자신의 옳음만을 믿어 의심치 않는 맹목과 광기에 의해 순식간에 ‘신’에서 고도비만 아저씨로 끌어내려진 마라도나의 모습을 보며, 팩트 다큐멘터리들의 귀 먹먹한 고함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원 영화평론가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