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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로버트 드 니로는 1995년 영화 <카지노>에서 공동작업을 한 이후 24년 만에 다시 손을 잡았다. 로버트 드 니로가 한 식당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유심히 보고 있다. 넷플릭스 예고편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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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아이리시맨>
스코세이지 감독의 25번째 작품
로버트 드 니로 등 거물 배우 3인
‘어쩌다 범인이 됐나’에서 출발
스코세이지 특유의 비정한 유머·냉소
“그 부드럽지만은 않은 목 넘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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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로버트 드 니로는 1995년 영화 <카지노>에서 공동작업을 한 이후 24년 만에 다시 손을 잡았다. 로버트 드 니로가 한 식당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유심히 보고 있다. 넷플릭스 예고편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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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마블 영화 관련 발언이 꽤 화제가 됐다. ‘영화 제작에서 예술이 죽고 있다’는 제목의 이 기고에서 감독은 ‘마블 영화는 영화(cinema)라기보다 테마파크다’라고 언급했다. 사실 이것은 디즈니를 위시한 많은 거대 스튜디오가 매우 오랫동안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추진해온 일이다. ‘극장이 테마파크가 되면 안 될 건 또 뭐란 말인가? 애초에 영화의 태생부터가 그렇지 않았나?’라는 문제에 스코세이지 감독이 짤막하게 밝힌 견해에 필자도 슬쩍 밥숟가락 한 술 얹고 싶다만, 이에 대해 본격 이야기를 하려면 지면의 2회 분량도 모자랄 것이기 때문에 일단 접고, 넷플릭스가 제작해 매우 제한된 수의 극장에서만 상영될 스코세이지 감독의 신작 <아이리시맨> 이야기를 하겠다.
대뜸 연세부터 거론하는 것은 상당한 실례이겠지만, 올해로 77살(1942년생)인 스코세이지 감독의 25번째 작품 <아이리시맨>을 논하는 데 그의 나이는 중요한 요소다. 더구나 주연인 로버트 드 니로를 필두로 조 페시, 알 파치노, 이 세 대인급 거물들의 연세 역시 70대를 훌쩍 넘기고 있는 상황인데다, 이 영화가 1995년 작품 <카지노>를 마지막으로 스코세이지 감독과 공동작업이 없었던 로버트 드 니로의 제안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라는 점을 고려하면 나이라는 포인트는 더욱 부각된다. 24년 만에 다시 성사된 이 두 영화적 동지의 의기투합에는 나이라는 요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세계관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①미국 내에서 “50년대에는 엘비스, 60년대에는 비틀스” 급으로 유명했고 “대통령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누렸던 트럭노조 지도자 ‘지미 호파’(알 파치노)라는 인물과 그의 돌연하고도 미스터리한 실종 사건을 태풍의눈으로 놓고, ②그와 공생했던 갱들과의 관계를 반경 30년 정도의 초대형 태풍으로 설정한 다음 ③갱들과 지미 호파 양쪽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이란 인물을 바다에 띄워, 그 태풍의 외곽부터 태풍의눈까지 항해시킨다.
엔딩의 둔중한 충격
관객들은 아일랜드계인 프랭크 시런(그렇다. 그가 바로 영화 제목의 ‘아이리시맨’이다)의 시선을 통해,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미국을 관통하는 이 태풍의 일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런 접근은 1992년 대니 드비토가 감독하고 잭 니컬슨이 주연한, 밋밋한 ‘지미 호파’(미국 노동운동가)의 전기영화 <호파>와는 전혀 다른 흥미진진한 접근이라 할 것이다. 왜냐.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은, 2016년까지도 주검 수색 작전이 실시되고 그것이 뉴스가 됐을 정도로 살해범(들)은 물론 살해 장소와 주검의 소재 등이 모두 미궁에 빠져 있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미제 사건 중 하나다. 그런데 <아이리시맨>은 아예 처음부터 살해범을 특정하고 들어간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자기가 범인임을 밝힌 프랭크 시런의 고백을 바탕으로 쓰인 <자네, 페인트칠을 한다던데>(여기에서 페인트는 다름 아닌 피다)라는 책을 원작으로 하는, 장장 3시간29분에 이르는 이 ‘대서사극’은 아직도 논란이 적지 않은 프랭크 시런의 고백 진위 자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프랭크 시런이 태풍의눈까지 빨려 들어가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과 인생의 단맛과 쓴맛, 그리고 마침내 남는 텅 빈 맛이다.
바로 이 점이, 예컨대 1970년대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조디악> 같은 영화들과 <아이리시맨>이 선을 긋는 가장 기본적 차이점이겠다. <아이리시맨>은 ‘누가 범인인가’라는 장르적 질문을 기본으로 깔아두고, 그 위에 사건에 얽힌 인물들과 시대의 모습을 쌓아가지 않는다. 대신 ‘어쩌다가 그는 범인이 됐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예상하듯, 영화는 그 질문을 통해 늙어감의 의미를 체감할 만큼 삶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크게 건 작게 건 있었을 법한 일들-우연인 듯 보이는 필연, 그로 인해 결정적으로 바뀌는 삶의 방향, 빚을 내 누리는 사치처럼 위태롭게 유지되는 순탄함,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대출 만기일의 참담함, 우정과 믿음, 증오, 배신, 파국, 그리고 마침내 공허함-을 망라하게 된다.
그 과정은 마틴 스코세이지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유머와 냉소, 그리고 그가 언제나처럼 애호해 마지않는 주옥같은 블루스 명곡들을 곁들인 능수능란한 어법과, 스티븐 자일리언(<쉰들러 리스트> <갱스 오브 뉴욕> <아메리칸 갱스터> <머니볼>로 국내에 유명해진 시나리오 작가)의 ‘깊은 숲속에서도 목적지의 좌표를 놓치지 않는’ 시나리오로 술술 풀려나간다. 그것은 프랭크 시런과, 그의 엄마 오리 격인 마피아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 아내들의 흡연 습관과, 그에 얽힌 이 험악한 남자들의 고충을 논할 만큼 세세하면서도, 케네디 당선과 암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영화의 핵심 인물들과 연결할 만큼 규모가 있다.
이 ‘세세함’과 ‘규모’ 둘 가운데,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은커녕 지미 호파라는 인물의 존재도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호소해오는 보편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세세함 쪽일 것이다. 특히 결말에서, 영화 내내 1인칭 내레이션(스코세이지 영화의 두드러진 장치 중 하나)으로 자신의 지난날을 되짚던 ‘늙은’ 프랭크 시런이 보여주는 지극히 정서적이지만 결코 감상적이지는 않은 말년의 모습은, 단순히 늙음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생의 어떤 핵심을 드러내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덕분에 우리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한동안 그 단순하고 조용한 엔딩이 남긴 고무망치 같은 둔중한 충격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 최소한 <아이리시맨>의 경우, 나이는 과연 결정적인 대목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관객들로서는 이 ‘보편적 설득력’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리 말랑말랑하지만은 않은 세 시간가량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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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리시맨>은 70살을 넘긴 로버트 드 니로와 조 페시, 알 파치노의 주름살을 당겨주는 ‘회춘’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사용됐다. 로버트 드 니로가 전화 통화하는 옆모습. 넷플릭스 예고편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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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가운 영화는 아니지만
무엇보다 위에서 이미 말했듯, 지미 호파라는 인물은 영화 자체에서도 “요즘 (미국의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할 정도니, 우리에게는 당연히도 낯설다. 더불어, 대다수 한국 관객에게는 이 영화에서 거론되고 있는(거론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1960~70년대의 정치적 상황, 특히 케네디 당선 전후부터 닉슨 시대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의 내밀한 속내나 그것이 촉발한 그 시대의 공기를 곧바로 떠올리긴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어쨌거나 남의 나라 일’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이리시맨>에 등장하는 정치적 사건들은 단순한 배경 정도가 아니라, 열대성저기압이던 사건이 태풍으로 발달하는 데 중요한 에너지원 중 하나로 기능하고 있는 마당에야.
이 영화에는 실로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흡사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 복잡다단한 등장인물 성명 체계로 겪어야 하는 고충에 맞먹는…’이라면 좀 과장이겠고, 아무튼 직접 등장하거나 대화에서 거론되거나 하는 인물(각종 마피아 조직원, 노조 간부와 관계자, 주요 정치인과 관료)의 이름들은 게릴라성 호우처럼 흠뻑 쏟아져내리곤 한다. 설상가상으로 영화 속 갱들은 꽤 복잡한 이탈리아식 성 외에도, ‘면도날’이라든가, ‘족제비’라든가, ‘아이리시’라든가 하는 별명까지 하나씩 보유하고 있다.
또한 영화는 노년의 프랭크 시런과 범행 당일의 프랭크 시런이라는 이중 액자로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어, 시간의 흐름도 주의 깊게 따라가야 한다. <아이리시맨>은 한국 관객에게 살갑게 감기고 흡수력도 출중한 그런 ‘카인드 오브’ 영화는 아니다. 더구나 상영시간마저 녹록지 않다.
하지만 이미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 부드럽지만은 않은 목 넘김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흔적으로 충분히 보상받는다. 극장식 테마파크 추구를 거부한 많은 용감한 영화가 그러하듯. 최신 기술의 추진체를 장착한 거대 자본이라는 광역 초토화 탄두가, 말 그대로 멸종시켜가고 있는 ‘개인적 지문이 가득한 영화들’이 대개 그러하듯.(그렇다. 마블 영화를 위시한 거대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멸종시키고 있는 것은 ‘예술’이기에 앞서, 그 가능성의 토양인 ‘개인들’이다. 그 영화들의 제작 과정에서 감독과 작가는 그들의 재능이나 가능성과는 별개로 그저 고용된 회사원과 용병으로 운신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거대 프랜차이즈 영화들에도 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로버트 드 니로-조 페시-알 파치노라는 놀라운 캐스팅과 70살을 넘긴 그들의 연기를 가능하게 했던, 그럼으로써 기적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실현한 수훈갑은, 그 비싸디비싼 ‘회춘’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아니었던가. 흠, 이런 식의 아이러니는 결국 영화라는 매체가 태내에 품고 있던 숙명인가. 흠….
한동원 영화평론가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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