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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6 09:24 수정 : 2019.11.16 11:48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로버트 드 니로는 1995년 영화 <카지노>에서 공동작업을 한 이후 24년 만에 다시 손을 잡았다. 로버트 드 니로가 한 식당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유심히 보고 있다. 넷플릭스 예고편 화면 갈무리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아이리시맨>

스코세이지 감독의 25번째 작품
로버트 드 니로 등 거물 배우 3인
‘어쩌다 범인이 됐나’에서 출발

스코세이지 특유의 비정한 유머·냉소
“그 부드럽지만은 않은 목 넘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흔적”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로버트 드 니로는 1995년 영화 <카지노>에서 공동작업을 한 이후 24년 만에 다시 손을 잡았다. 로버트 드 니로가 한 식당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유심히 보고 있다. 넷플릭스 예고편 화면 갈무리

얼마 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마블 영화 관련 발언이 꽤 화제가 됐다. ‘영화 제작에서 예술이 죽고 있다’는 제목의 이 기고에서 감독은 ‘마블 영화는 영화(cinema)라기보다 테마파크다’라고 언급했다. 사실 이것은 디즈니를 위시한 많은 거대 스튜디오가 매우 오랫동안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추진해온 일이다. ‘극장이 테마파크가 되면 안 될 건 또 뭐란 말인가? 애초에 영화의 태생부터가 그렇지 않았나?’라는 문제에 스코세이지 감독이 짤막하게 밝힌 견해에 필자도 슬쩍 밥숟가락 한 술 얹고 싶다만, 이에 대해 본격 이야기를 하려면 지면의 2회 분량도 모자랄 것이기 때문에 일단 접고, 넷플릭스가 제작해 매우 제한된 수의 극장에서만 상영될 스코세이지 감독의 신작 <아이리시맨> 이야기를 하겠다.

대뜸 연세부터 거론하는 것은 상당한 실례이겠지만, 올해로 77살(1942년생)인 스코세이지 감독의 25번째 작품 <아이리시맨>을 논하는 데 그의 나이는 중요한 요소다. 더구나 주연인 로버트 드 니로를 필두로 조 페시, 알 파치노, 이 세 대인급 거물들의 연세 역시 70대를 훌쩍 넘기고 있는 상황인데다, 이 영화가 1995년 작품 <카지노>를 마지막으로 스코세이지 감독과 공동작업이 없었던 로버트 드 니로의 제안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라는 점을 고려하면 나이라는 포인트는 더욱 부각된다. 24년 만에 다시 성사된 이 두 영화적 동지의 의기투합에는 나이라는 요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세계관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①미국 내에서 “50년대에는 엘비스, 60년대에는 비틀스” 급으로 유명했고 “대통령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누렸던 트럭노조 지도자 ‘지미 호파’(알 파치노)라는 인물과 그의 돌연하고도 미스터리한 실종 사건을 태풍의눈으로 놓고, ②그와 공생했던 갱들과의 관계를 반경 30년 정도의 초대형 태풍으로 설정한 다음 ③갱들과 지미 호파 양쪽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이란 인물을 바다에 띄워, 그 태풍의 외곽부터 태풍의눈까지 항해시킨다.

엔딩의 둔중한 충격

관객들은 아일랜드계인 프랭크 시런(그렇다. 그가 바로 영화 제목의 ‘아이리시맨’이다)의 시선을 통해,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미국을 관통하는 이 태풍의 일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런 접근은 1992년 대니 드비토가 감독하고 잭 니컬슨이 주연한, 밋밋한 ‘지미 호파’(미국 노동운동가)의 전기영화 <호파>와는 전혀 다른 흥미진진한 접근이라 할 것이다. 왜냐.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은, 2016년까지도 주검 수색 작전이 실시되고 그것이 뉴스가 됐을 정도로 살해범(들)은 물론 살해 장소와 주검의 소재 등이 모두 미궁에 빠져 있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미제 사건 중 하나다. 그런데 <아이리시맨>은 아예 처음부터 살해범을 특정하고 들어간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자기가 범인임을 밝힌 프랭크 시런의 고백을 바탕으로 쓰인 <자네, 페인트칠을 한다던데>(여기에서 페인트는 다름 아닌 피다)라는 책을 원작으로 하는, 장장 3시간29분에 이르는 이 ‘대서사극’은 아직도 논란이 적지 않은 프랭크 시런의 고백 진위 자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프랭크 시런이 태풍의눈까지 빨려 들어가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과 인생의 단맛과 쓴맛, 그리고 마침내 남는 텅 빈 맛이다.

바로 이 점이, 예컨대 1970년대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조디악> 같은 영화들과 <아이리시맨>이 선을 긋는 가장 기본적 차이점이겠다. <아이리시맨>은 ‘누가 범인인가’라는 장르적 질문을 기본으로 깔아두고, 그 위에 사건에 얽힌 인물들과 시대의 모습을 쌓아가지 않는다. 대신 ‘어쩌다가 그는 범인이 됐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예상하듯, 영화는 그 질문을 통해 늙어감의 의미를 체감할 만큼 삶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크게 건 작게 건 있었을 법한 일들-우연인 듯 보이는 필연, 그로 인해 결정적으로 바뀌는 삶의 방향, 빚을 내 누리는 사치처럼 위태롭게 유지되는 순탄함,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대출 만기일의 참담함, 우정과 믿음, 증오, 배신, 파국, 그리고 마침내 공허함-을 망라하게 된다.

그 과정은 마틴 스코세이지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유머와 냉소, 그리고 그가 언제나처럼 애호해 마지않는 주옥같은 블루스 명곡들을 곁들인 능수능란한 어법과, 스티븐 자일리언(<쉰들러 리스트> <갱스 오브 뉴욕> <아메리칸 갱스터> <머니볼>로 국내에 유명해진 시나리오 작가)의 ‘깊은 숲속에서도 목적지의 좌표를 놓치지 않는’ 시나리오로 술술 풀려나간다. 그것은 프랭크 시런과, 그의 엄마 오리 격인 마피아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 아내들의 흡연 습관과, 그에 얽힌 이 험악한 남자들의 고충을 논할 만큼 세세하면서도, 케네디 당선과 암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영화의 핵심 인물들과 연결할 만큼 규모가 있다.

이 ‘세세함’과 ‘규모’ 둘 가운데,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은커녕 지미 호파라는 인물의 존재도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호소해오는 보편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세세함 쪽일 것이다. 특히 결말에서, 영화 내내 1인칭 내레이션(스코세이지 영화의 두드러진 장치 중 하나)으로 자신의 지난날을 되짚던 ‘늙은’ 프랭크 시런이 보여주는 지극히 정서적이지만 결코 감상적이지는 않은 말년의 모습은, 단순히 늙음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생의 어떤 핵심을 드러내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덕분에 우리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한동안 그 단순하고 조용한 엔딩이 남긴 고무망치 같은 둔중한 충격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 최소한 <아이리시맨>의 경우, 나이는 과연 결정적인 대목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관객들로서는 이 ‘보편적 설득력’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리 말랑말랑하지만은 않은 세 시간가량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겠다.

<아리리시맨>은 70살을 넘긴 로버트 드 니로와 조 페시, 알 파치노의 주름살을 당겨주는 ‘회춘’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사용됐다. 로버트 드 니로가 전화 통화하는 옆모습. 넷플릭스 예고편 화면 갈무리

살가운 영화는 아니지만

무엇보다 위에서 이미 말했듯, 지미 호파라는 인물은 영화 자체에서도 “요즘 (미국의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할 정도니, 우리에게는 당연히도 낯설다. 더불어, 대다수 한국 관객에게는 이 영화에서 거론되고 있는(거론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1960~70년대의 정치적 상황, 특히 케네디 당선 전후부터 닉슨 시대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의 내밀한 속내나 그것이 촉발한 그 시대의 공기를 곧바로 떠올리긴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어쨌거나 남의 나라 일’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이리시맨>에 등장하는 정치적 사건들은 단순한 배경 정도가 아니라, 열대성저기압이던 사건이 태풍으로 발달하는 데 중요한 에너지원 중 하나로 기능하고 있는 마당에야.

이 영화에는 실로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흡사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 복잡다단한 등장인물 성명 체계로 겪어야 하는 고충에 맞먹는…’이라면 좀 과장이겠고, 아무튼 직접 등장하거나 대화에서 거론되거나 하는 인물(각종 마피아 조직원, 노조 간부와 관계자, 주요 정치인과 관료)의 이름들은 게릴라성 호우처럼 흠뻑 쏟아져내리곤 한다. 설상가상으로 영화 속 갱들은 꽤 복잡한 이탈리아식 성 외에도, ‘면도날’이라든가, ‘족제비’라든가, ‘아이리시’라든가 하는 별명까지 하나씩 보유하고 있다.

또한 영화는 노년의 프랭크 시런과 범행 당일의 프랭크 시런이라는 이중 액자로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어, 시간의 흐름도 주의 깊게 따라가야 한다. <아이리시맨>은 한국 관객에게 살갑게 감기고 흡수력도 출중한 그런 ‘카인드 오브’ 영화는 아니다. 더구나 상영시간마저 녹록지 않다.

하지만 이미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 부드럽지만은 않은 목 넘김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흔적으로 충분히 보상받는다. 극장식 테마파크 추구를 거부한 많은 용감한 영화가 그러하듯. 최신 기술의 추진체를 장착한 거대 자본이라는 광역 초토화 탄두가, 말 그대로 멸종시켜가고 있는 ‘개인적 지문이 가득한 영화들’이 대개 그러하듯.(그렇다. 마블 영화를 위시한 거대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멸종시키고 있는 것은 ‘예술’이기에 앞서, 그 가능성의 토양인 ‘개인들’이다. 그 영화들의 제작 과정에서 감독과 작가는 그들의 재능이나 가능성과는 별개로 그저 고용된 회사원과 용병으로 운신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거대 프랜차이즈 영화들에도 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로버트 드 니로-조 페시-알 파치노라는 놀라운 캐스팅과 70살을 넘긴 그들의 연기를 가능하게 했던, 그럼으로써 기적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실현한 수훈갑은, 그 비싸디비싼 ‘회춘’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아니었던가. 흠, 이런 식의 아이러니는 결국 영화라는 매체가 태내에 품고 있던 숙명인가. 흠….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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