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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05 09:48 수정 : 2019.10.05 10:02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조커>

1980년대 뉴욕 닮은 고담시
일용직 광대에 노모 부양하는
‘아서’에게 들러붙는 삶의 불행

첫 살인 계기로 ‘조커’로 폭주
“부자를 죽여라” 분노의 외침
관객들, 이율배반적 카타르시스

영화 <조커>는 일반 슈퍼히어로물 영화와 달리 외계 괴물도, 슈트 입은 슈퍼히어로도 등장하지 않고 지극히 사실적이다.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이 화장붓으로 자신의 입술에 붉은색 칠을 하고 있다. 워너브러더스 누리집 갈무리
대략 3년에 2편 정도 빈도로 ‘아무튼 무시할 수는 없는 영화’가 등장하곤 하는데, <조커>가 바로 그것의 전형이다.

영화는 1980년대 고담시를 배경으로 한다. 감독 겸 공동각본 토드 필립스에 따르면 1981년인데, 왜 하필 그 시대인가? 감독은 ‘요즘 세상의 테크놀로지(대표적으로 핸드폰)가 이야기 전개에 훼방을 놓지 않아서’라는, 십분 이해 가는 점을 이유 중 하나로 꼽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잘 아시다시피 <조커>는 1980년 전후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를 참조하고 있다. 특히 마틴 스코세이지의 <코미디의 왕>과 <택시 드라이버> 같은 영화들이 없었더라면 과연 <조커>가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높은 디엔에이(DNA) 일치율을 보여주고 있다(실제로 <조커>에는 <택시 드라이버>의 오마주인 총 모양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쏘는 동작이 등장한다). 또다른 뉴요커 거장인 시드니 루멧의 <형사 서피코>, <뜨거운 오후>, <네트워크> 등 거칠거칠한 도시영화도 이 영화가 섭취한 주요 자양분이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밀로시 포르만), <시계태엽 오렌지>(스탠리 큐브릭) 지문도 곳곳에 묻어 있고,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는 아예 영화 속에 등장한다.

하지만 적어도 <수어사이드 스쿼드>나 <저스티스 리그>를 위시한 최근의 ‘디시(DC) 시네마틱 유니버스’ 소속 영화들, 나아가 여타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거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다크 나이트>는 예외). 왜냐. 무엇보다 <조커>가 취하고 있는 사실성 때문이다.

일단 시각적인 면부터 그렇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폭파하는 ‘아캄 주립병원’ 같은 곳이 등장하긴 하지만, <조커>의 고담시는 그냥 1980년대 뉴욕인 듯 보인다(물론 마틴 스코세이지와 시드니 루멧이라는 필터를 거친). 당연히 외계 종족과의 최후 전쟁이나 초고층 빌딩을 무너뜨리는 외계 괴물 같은 컴퓨터그래픽(CG) 대잔치는 물론, 슈트 입은 슈퍼히어로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가장 현실적인 톤의 슈퍼히어로물로 알려진 <로건>도 <조커>에 비한다면 거의 테마파크 수준이다.

웃을 일 없는 아서의 웃음

<조커>의 핵심적인 차별점은 비주얼보다는 선악 구도에 있다. <조커>는 마침내 슈퍼히어로 영화 사상 최초로 선악의 경계를 없애는 데 성공하고 있다.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거리에서 광고판을 들고, 소아병동의 위로 공연을 가는 등의 일로 근근이 먹고사는 일용직 광대다. 그는 정상의 코미디쇼 진행자인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을 우상으로 삼으며 스타 코미디언을 꿈꾼다.

그 꿈은 실현될 가능성이 0%보다도 낮아 보인다. 그에게는 온갖 불운과 불행이 모래주머니처럼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는 뇌 손상으로 한번 시작된 웃음이나 울음을 멈출 수 없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져 주위를 불편하게 하거나 화나게 하는 이 웃음으로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아서는 증상을 설명하는 카드를 들고 다녀야 한다.

더구나 그에게는 그 유명한 병든 노모까지 있다. 아서를 ‘해피’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엄마(프랜시스 콘로이)는 언제나 “너는 세상을 웃게 하기 위해 태어났단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지만, 정작 발작을 일으킬 때 빼고는 웃을 일이 없는 아서에게 웃음은 그저 저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세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광대 분장을 한 아서가 들고 있던 광고 플래카드를 장난 삼아 날치기한다. 그리고 사력을 다해 뒤쫓아온 아서를 떼로 달려들어 구타한다. 용역회사 사장은 잃어버린 플래카드 값을 아서에게 물린다. 지하철에 혼자 탄 여성을 괴롭히던 월스트리트(는 아니겠지만. 이곳은 뉴욕이 아닌 고담시이므로)의 여피 3인조는, 옆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아서의 웃음 발작을 듣고는 아서를 새로운 표적으로 삼는다. 세상의 발톱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정 없이 그를 할퀴고 짓밟는다.

아서가 겪는 이러한 폭력과 절망은, 그가 고담시의 시장으로 출마한 슈퍼리치 토머스 웨인(브렛 컬런. 말할 것도 없이 훗날 배트맨이 되는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과 얽히게 되면서 마침내 그를 영혼의 지하실까지 끌고 내려간다. 그리고 지하실의 봉인이 뜯기는 순간 아서는 조커를 향해 거침없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가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서로를 증오하며 아서 같은 손쉬운 먹잇감들을 공격하던 수많은 ‘가지지 못한 자’들 역시, 광대 마스크를 쓴 군중과 폭도가 되어 “부자를 죽여라”라는 구호로 거리낌 없이 외치기 시작한다.

아서는 반쯤은 정당방위, 반쯤은 오발로 첫번째 살인을 하고, 그 살인이 발견하게 만든(그러나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힘에 이끌려 점차 조커가 되어가는데, 감독이 “세 종류의 웃음이 있다”고 말한 대로 아서의 고통스러운 웃음은 점차 조커 특유의 웃음으로 변해간다. 그렇다. 조커를 아서로부터 해방한 것은 웃음 대신 분노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그 마지막은 그야말로 ‘조커 라이징’이라고 부를 만하다) 아드레날린의 분출과 함께 이율배반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폭약을 한 덩어리씩 쌓아가는 듯한 점층적 연출에 얹어진 호아킨 피닉스의 압도적인 연기는 아무도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히스 레저의 조커 연기와 대등하게 (그러나 매우 다른 방향과 방식으로) 쌍벽을 이룬다. 그리고 그 연기와 한 덩어리가 되어 거의 중독상태 같은 불안과 분노 속으로 관객을 끌고 들어가는 힐뒤르 구뷔드나도티르의 음악 역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자국을 남긴다.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아서의 고통스러운 웃음 발작은 점차 조커 특유의 웃음으로 변해간다. 조커가 계단 중간에 서서 두 팔을 들어올리고 있다. 워너브러더스 누리집 갈무리

“가난한 사람들은 살인자 편”

도입부에서 은행에 넘어간 정든 집을 떠나는 가족과, ‘노력은 해봤어요’라는 구걸용 골판지를 앞에 놓은 노숙자를 보여줌으로써 파렴치한 금융자본이 안긴 절망을 대변하는 현실 비판적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기대를 약 3분가량 품도록 했던 <저스티스 리그>가 안긴 실망과 허탈감은, <조커>에서 충분한 것 이상으로 보상된다.

한편으로 여기에는 착시도 개입돼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라는 범주를 벗어난 뒤에도 <조커>는 여전히 이만큼 놀라운 영화일까. 일단 조커 캐릭터는 메시지부터 그 역을 맡을 배우까지, 뚜렷한 목표지점을 조준하고 만들어진 캐릭터인 만큼(감독이 각본을 쓸 때 벽에 호아킨 피닉스 사진을 내내 붙여뒀다고 한다) 더할 나위 없이 높은 선명도와 흡인력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단선적이기도 하다. 특히 조커 위에 줄줄이 겹쳐 쌓이는 일련의 불행과 폭력은 상당히 편의적이고 심지어 작위적이다. 예컨대 자신의 아이를 웃겨주는 아서에게 “우리 애 좀 귀찮게 하지 말아줄래요?”라고 쏘아붙이는 아줌마의 신경질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우리의 팍팍한 현실에 비춰보더라도.

나아가 고담시장 선거 후보로 나선 토머스 웨인은, 티브이 인터뷰에 출연해 누가 보더라도 역겨운 여피들인 자신의 회사 직원들을 “우리 가족”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살해한 살인범을 규탄한다.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살인범의 편”이지만 “노력해서 성공한 우리”에게 “그들은 광대일 뿐”이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다름도 아닌 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인물이 말이다.

무엇보다도 (주의! 이 단락에 스포일러 있습니다) 정상급 쇼를 진행하는 최고 코미디언인 머레이가, 클럽에서 라이브하는 무명 코미디언의 영상, 그것도 대단히 망가져버린 공연 영상을 자신의 쇼에서 방영하고, 그것을 놀림감으로 삼는다는 설정은 작위성을 넘어 비현실적이다. 정상급 코미디언이 자기 쇼에서 아무도 모르는 무명 코미디언을 놀려 얻을 것이 대체 무엇인가? 적어도 우리가 아는 현실은 그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교활하고 무표정하다.

그러나 몇몇 빈틈에도, <조커>는 어쨌거나 무시무시한 영화다. 미국 극장 체인들이 개봉 전부터 마스크를 쓴 관객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모방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매우 현명한) 발표를 해야 했을 정도로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슈퍼히어로 영화판의 게임 체인저를 넘어 ‘위험한 영화’가 된 <조커>의 힘이, 이제껏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외면하기 바빴던 우리의 실제 삶에서 잉태된 것이란 점이다. 조커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 “당신은 내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아” “그들(가진 자들)은 당신도 나도 신경 쓰지 않아요”라는 조커와 공중보건 정신과 의사의 산탄총 같은 대화가 나지막이 오가는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온실에 들어앉은 채 현실을 외면하는 자들의 눈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소리 없는 그곳에서 말이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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