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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는 1994년 중학교 2학년을 보낸 은희라는 평범한 학생의 일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은희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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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벌새>
만화가 꿈꾸는 평범한 중2의 삶
그의 날개가 끊임없이 부딪히는
허술한 세상의 단단한 철창
큰 소리 내거나 포장하지 않은
평평하고 잘 닦인 유리 같은 은희
지금의 세상도 겹쳐놓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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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는 1994년 중학교 2학년을 보낸 은희라는 평범한 학생의 일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은희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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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현상 중 공진이라는 것이 있다. 엄밀한 정의는 아니지만 공진 현상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물체는 모두 저마다의 고유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외부에서 가해지는 소음이나 바람 같은 진동이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면 물체의 반응은 무한대가 된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지만.
재미있는 점은, 공진이 일어나기 위해 외부에서 가해지는 진동이 꼭 크거나 강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불어오던 산들바람에 출렁이다가 마침내 산산이 조각나고 만 미국의 터코마 현수교에 관한 전설(이 다리의 붕괴 원인은 공진이 아니었다)로 상징되고 있는데, 그런데 예술에서도 이런 공진이 일어날 때가 있다.
목소리가 크거나 강하지도 않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나 기발한 플롯도 없다.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그런 작품이 서서히 내 안의 뭔가를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진폭은 점점 커진다. 진동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 여파는 오랫동안 또는 영구히 남는다. 작품의 진동수와 내 안의 고유 진동수가 일치하며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울림을 느끼는 그런 경험은, 아마도 예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경험일 것이다. 아무튼.
곰팡내 나는 계단실 ‘14살의 키스’
<벌새> 얘기를 하자.
일단 <벌새>의 주인공 은희(박지후)에게는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특이점 같은 것은 없다. 일단 만화가가 꿈이기는 하지만, 만화에 대한 놀라운 재능이나 무시무시한 열정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지나가다 슬쩍 보면 “평범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한, 그런 14살, 그런 중2다.
한편으로 은희는 매우 구체적이다. 은희가 사는, 따라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꽤 자주 뉴스 화면에 등장하여 전 국민의 눈에 익은 아파트단지다. 은희의 학교 이름 또한 그대로 거론된다. 익명, 즉 ‘○○동’, ‘△△중학교’ 같은 식이나 가상의 지명 등으로 특수성을 다림질하여 ‘그 시대의 어디든지’라는 일반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와는 정반대로, <벌새>는 ‘은마아파트’나 ‘진선여중’같이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장소들을 그대로 거론한다.
은희의 개인적 세계도 그만큼이나 구체적이다. 아파트 상가에서 떡집을 하는 부모님, 아파트 상가 안의 한자학원이라는 그리 흔치는 않은 공간, 그 안의 일상 묘사, 그리고 1994년이라는 시간 배경과 14살이라는 주인공 은희의 나이 같은 것들은 자연스럽게 이 영화에 ‘자전적’이라는 꼬리표를 붙도록 한다.
하지만 당연히도, 어디까지가 창작자의 실제 경험이며 어디서부터가 픽션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감독 자신은 픽션과 실제가 ‘반반’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모든 기억의 재현은 기본적으로 픽션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므로.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대목은 실제인지 아닌지를 실증할 수 없는 은희의 개인적 경험들이다.
예컨대 은희가 아파트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실 꼭대기에 숨어서 남자친구 지완(정윤서)과 시험 삼아, 호기심 삼아 키스하는 장면을 보자. 영화는 14살의 키스라는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옥상 앞 계단실의 곰팡내 떠도는 그 침침함과 칙칙함을 표백하지 않는다. 실로 그렇다. 많은 성장통 영화들이 당연한 듯 자신의 인물들에게 옥상을 개방하고 있지만,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면 옥상으로 통하는 문은 언제나 잠겨 있었다. 결국 14살 중2가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이란, 키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좁고 칙칙한 그 공간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공간의 어둠과 갑갑함을 굳이 표백하지 않는다. 애써 밝으려 하지 않은 조명과 회색 콘크리트 벽을 가득 담은 쇼트를 통해 그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이 은희가 사는 세계이자 우리가 사는 세계이므로.
그리고 은희는 키스 뒤 곧장 이어지는 행동(스포일러 우려로 적지 않음을 양해 부탁드린다)을 통해, 그녀 역시 그런 곳에 갇혀 있는 자신의 좌표를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낸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둡고 비좁은 곳에서 허락된 최선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음 역시. 그렇다. 그녀의 모습은 꿀 몇 방울을 얻기 위해 초당 90회의 날갯짓을 하는 벌새와 닮았다.
그녀의 바쁘고 절박한 날갯짓은 투명비닐에 포장된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언니 신청’을 하는 후배 유리(설혜인)와 단둘이 노래방에 있을 때도, 학교 성적 좋은 장남으로 아버지의 비호를 받으며 툭하면 동생에게 손찌검하는 오빠 대훈(손상연)을 마주할 때도, 혼자 있는 집에서 아빠의 사교댄스 연습곡인 ‘여러분’의 뽕짝 버전을 들을 때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날개는 끝없이 어딘가에 부딪힌다. 아들을 서울대로 쏘아 올릴 발사대인 강남 8학군에 머물기 위해 먹고사는 일의 울분을 누른 채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아버지와, 아이들에게 날라리 두 명을 적어내라고 시킨 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를 복창시키는 담임과, 자신을 방앗간집 딸이라고 부르는 남자친구의 엄마와, 그리고 대교(大橋)라는 호칭이 버젓이 붙어 있는 다리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버리는, 지극히 허술한 세상이 쳐 놓은 단단한 철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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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와 친구 지숙이 트램펄린을 타고 공중을 뛰어오르며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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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투명도 유지하는 힘
오해는 말자. <벌새>는 자신의 세계를 한 개의 소실점으로 몰아가지는 않는다. 아파트 계단실의 갑갑함만큼 많이 그 아파트를 채운 오래된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녹색을 담은 촬영(그것은 감독이 애호해 마지않는다고 말한 에드워드 양의 작품들을 곧장 떠올리게 한다)으로도 드러나듯, 영화는 은희의 시간을 희생자의 시간으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아이처럼 소리를 내며 우는 사람은 은희가 아니다. 이들은 모두 남자이고, 이들은 모두 가해자로 변해버린 희생자들이다.
은희의 삶에 슬그머니 비쳐든 빛인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가 그녀에게 준 편지 글귀처럼, 은희의 시간에는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 물론 삶이 원래 그러하듯, 딱 떨어지는 50 대 50의 비율은 아니어도.
그리고 한문선생님 영지는 은희의 세계에 ‘상심 만천하 지심 능기인’ 같은 논어 말씀만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영지의 등장으로 영화에는 상당히 사회적인 색채가, 그것도 상당히 뚜렷한 관점의 정치적 색채가 들어온다. 그녀의 서가에는 <크눌프> 같은 책과 함께 <자본론>이나 <노동과 가치> 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한바탕 다툰 뒤 썰렁한 침묵을 메우지 못하는 은희와 그녀의 단짝 지숙(박서윤)에게 영지가 불러주는 노래는 민중가요 ‘잘린 손가락’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멋진 선생님’을 구성하는 은희의 기억으로 다뤄질 뿐, 어떠한 주장으로 전용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지는 다른 방식으로 은희의 눈을 더 넓은 세계로 돌리도록 만드는데, 이 역시 경험을 빙자한 주장이 되어 14살 은희의 세계를 찢고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심지어 성수대교 붕괴라는 거대한 사건마저도 은희의 시선이 미치는 곳 안에 고스란히 머문다.
그렇게 <벌새>는 주인공 은희를 세상에 대한 고발이나 규탄을 증폭시키기 위한 앰프로 만들지도, 90년대 향수를 자극하기 위한 팬시 상품으로 전락시키지도 않는다. 우리가 만일 은희를 둘러싼 세계를 보면서 고발이나 규탄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그것은 영화가 아닌 우리 자신의 세계를 보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은희는, 아주 평평하고 잘 닦여 있어서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잊기 쉬운 유리다. 우리는 그 유리 위에 1994년의 세상뿐 아니라 지금의 세상도 아무 어려움 없이 겹쳐놓을 수 있다. 그래도 유리는 뿌옇게 흐려지지 않는다. 영화는 그 투명도를 마지막까지 유지하는, 쉽지 않은 일을 해낸다. 덕분에 은희가 날갯짓하는 그곳은 은마아파트도 진선여중도 아닌 모든 곳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감독이 이 작품의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한 에드워드 양의 걸작 <하나 그리고 둘>과 그랬던 것처럼, 은희의 날개와 공진한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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