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6.21 19:22 수정 : 2019.06.21 19:26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토이 스토리 4>

어른도 즐길 수 있는 스토리 여전
‘주인에게 충성과 의리’ 전편과 달리
무소속 장난감들 가족 공동체 등장

새로운 중심 캐릭터들로 물갈이
카리스마 갖춘 여성 ‘보핍' 활약
“장난감에게 생명이란” 질문도

<토이 스토리 4>는 이전의 인기 캐릭터들을 2선으로 배치하고 새로운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장난감들의 위험천만한 모험 이야기를 풀어간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기획 면에서 <토이 스토리>의 절묘함은, 컴퓨터그래픽(CG) 초창기에 불가피했던 특유의 번들번들한 표면 질감을 그대로 쓸 수 있는 플라스틱 장난감을 주요 캐릭터로 설정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토이 스토리>는 장난감 세계를 그 핵심 세계로 삼음으로써 각종 캐릭터를 거의 무한정 공급받은데다, 그들을 백지상태에서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수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성인이건 아동이건, 완구와 접촉하지 않고 성장한 사람은 웬만해선 없을 것이므로. 그리고 완구란 세계적으로 일맥상통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잠깐 조연에서 핵심 캐릭터로

하지만 <토이 스토리>라는 기획의 가장 결정적인 힘은 아동 관객뿐 아니라 어른 관객도 거의 동등한 수준의 감정이입을 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좋건 싫건 아동 관객을 수행·보좌해야만 하는 어른 관객들의 존재를 등한시한 채, 아동 관객들에게만 호소하는 세계관과 코드로 폭주함으로써 성인 관객들을 소외시키다 못해 급기야 정신적인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수많은 ‘방학 특집’ 영상·공연물과는 달리,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너그럽게도 성인 관객들에게도(심지어 성인 관객들에게만) 감정이입을 허함으로써 육아에 지친 그들의 인권까지 배려해주는 접객 자세를 유지해왔다. 이는 픽사의 줄기세포를 이루며 이후 <인사이드 아웃>이나 <인크레더블> 시리즈 같은 걸작의 탄생으로 퍼져나가기에 이른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아동과 성인 관객을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야말로 업계에서 가장 달성해내기 어려운 경지 중 하나일 것인바, 지금까지 이 시리즈가 유지해온 ‘전체관람가’ 겸 ‘비아동 관객 또한 즐거운 관람가’스러움이 이번 4편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가 여부에 우리의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9년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되는 영화는, 전편인 3편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출발점으로 삼는다. 즉 3편 초반에 “새 주인을 찾아갔고”라는 우디의 대사 한마디로 퉁치고 넘어갔던 여류 양치기 인형 ‘보 핍’과의 이별, 그리고 우디(카우보이)와 버즈(우주레인저)를 비롯한 장난감들이 대학생이 된 앤디의 손을 떠나 보니라는 새 주인을 만나게 된 상황을 동시에 짚어주며 시작된다.

영화의 메인 포스터를 보시면 충분히 짐작하시겠지만, 이번 4편에서는 3편에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우디의 연인 보 핍이 우디와 함께 양대 축을 이룬다. 그렇다. 이번 편에서는 우디의 짝패 버즈가 한발 물러서는 형국을 보이는바, 이것이 3편에서 보 핍이 퇴장한 것처럼 5편을 위한 사전포석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겠으나, 아무튼 보 핍은 작금 디즈니와 그 계열사의 여성 캐릭터들(가장 가까이는 <알라딘>의 ‘자스민’ 캐릭터)이 취하는 행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는 모자와 치마를 벗어던진 차림으로 전형적인 여전사 보폭을 취한 채 우디 옆에 서서, 지팡이를 등에 꽂고 끝이 올라간 눈으로 정면을 매섭게 응시하는 포스터 속의 그녀의 모습만으로도 능히 짐작되는데, 그녀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우디와 재회하게 될 것인지는 스포일러 방지 차원에서 말씀드리기 곤란하겠으나, 아무튼 이전까지 ‘세상 지배 남자, 남자 지배 여자’스러운 분위기에 숨어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던 그녀가 터프한 액션 미녀로 변신하여 4편의 핵심 테마를 상징하는 캐릭터로 격상된 것은 결과적으로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런데 4편의 ‘핵심 테마’라니? 픽사의 작품들이 으레 그러하듯, <토이 스토리> 시리즈 역시 각 편마다 그 척추를 이루는 핵심 테마(또는 교훈이라 할 수도 있겠다)를 한 가지씩 보유하고 있다. 1편은 경쟁 그리고 이해를 통한 화해, 2편은 탐욕에 대한 경계, 3편은 독재의 공포와 그에 대한 저항 등등.

이번 4편의 핵심 테마를 꼽는다면 ‘독립과 자유’ 정도가 될 것인데, 사실 이것은 대학생이 되어 떠나는 주인 앤디에 대한 충성(loyalty, 국내 자막에서는 ‘의리’로 번역되어 있다)을 주장하는 우디와 이에 나머지 장난감들이 반박하며 논쟁했던 3편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 테마다. 하지만 이번 4편에서 보 핍이 보여주는 차이는(여기서부터 이 단락 끝까지 스포일러 주의) 3편의 장난감들처럼 주인의 애정에 대한 오해로 토라져 잠시 주인 곁을 떠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주인 없는 무소속 장난감으로서 자유롭고도 터프한 라이프스타일을 이미 “7년 동안” 영위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이 스토리 4>.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수제 재활용 장난감의 메시지

4편에서 새롭게 변모한 보 핍 캐릭터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3편에서 우디가 주장했던 ‘다락에 처박히더라도 주인 곁이 최고’라는 이론은, 아닌 게 아니라 고집스럽고 고리타분해 보였다. 3편은 이를 집 떠난 장난감들이 겪게 되는 죽을 고생과 이들을 집으로(사실은 다락으로!) 안전히 돌려보내기 위한 우디의 목숨 건 분투로 그럭저럭 정당화했다. 그리고 이웃집 꼬마에게 장난감들을 물려주는 앤디의 현명하고도 너그러운 처분 덕분에 우디의 고집은 간신히 해피엔딩에 연착륙할 수 있었다.

4편의 보 핍 캐릭터는 이 거추장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절대충성의 도’를 과감하게 버렸다. 그녀는 부러진 팔 정도는 스스로 테이프를 슥슥 감아 수리하고, 다른 독립 무소속 장난감들과 스스로 가족 및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다른 장난감들에게 설파 및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을 얻고 싶어 하는 다른 장난감의 열망이 실현되도록 돕는다. 이것이, 사실 따지고 보면 여타 장난감들의 액션과 비교해서 크게 화려할 것은 없는 그녀의 액션(물론 스컹크 인형을 뒤집어씌운 자동차를 몰고 놀이터를 돌파하는 모습이나, 갈고리 지팡이를 능수능란하게 휘두르며 각종 액션을 선보이는 그녀의 모습 자체는 충분히 멋지지만)이 유독 강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이유다.

4편이 과감하게 넘고 있는 울타리는 이것만이 아니다. 4편은 캐릭터 측면에서도 지난 세 편의 인기 캐릭터들을 2선에 배치한 채 새로운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일종의 ‘물갈이’를 단행했다.

그중 단연 인구에 회자될 것으로 예상되는 두 개(또는 세 개라고 해야 할지도)의 캐릭터는 장난감들의 새 주인인 유치원생 ‘보니’가 플라스틱 포크숟가락으로 만든 인형 ‘포키’와 놀이공원 인형따기 코너의 뒷벽에 경품으로 묶여 있다가 탈출한 봉제인형 ‘더키(아기오리) 앤 버니(토끼)’ 캐릭터다.

이 가운데 ‘더키 앤 버니’ 듀오가 보여주는 개그 역량은 <주토피아> 개봉 당시 나무늘보 캐릭터가 일으켰던 센세이션에 필적하는 반향을 예상케 할 만큼 강력하다. 특히 이들의 ‘작전회의 개그’ 연작은 그중에서도 발군의 폭발력을 보이는데, 사실 이 개그 하나만으로도 아동 관객을 수행 및 보필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어른 관객 여러분의 고충과 피로는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또한 <토이 스토리> 사상 최초의 수제 재활용 장난감인 ‘포키’ 캐릭터는, 플라스틱 쓰레기 줄이기와 환경 이슈 부각이라는 기능성만 강조하는 캠페인 무비의 오류를 피해, 장난감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심오하다면 심오한, 정감어리다면 정감어린 테마를 건드리는 데까지 나아간다.(여기서부터 이 문장 끝까지 스포일러 주의) 사실 이 영화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한데, 영화는 그것을 굳이 주렁주렁 설명하는 대신 “나도 몰라”라는 한마디만 던져놓는, 즉 비밀을 비밀로 남겨두는 센스를 발휘해준다.(이 대목에서 “너 몇 살인데 아직도 산타를 믿니?”라며 동심 파괴를 서슴지 않은 어느 세계적 유명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러한 4편의 과감한 영역 확장에도 불구하고, 3편까지 이어진 <토이 스토리>의 디엔에이(DNA) 또한 여전히 살아 있다. 악역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발산되는 호러영화적 감수성과, 그 첫인상을 차차 벗겨나가는 악역 장난감들의 심금 울리는 지난 사연, 그것이 건드리는 연민, 그리고 이어지는 타인에게 손 내밀기와 우정의 탄생 등등 말이다.

거기에 이번 역시, 커버린 아이들에게 버려지는 장난감들의 뿌듯함 섞인 서글픔을 논하는 대사가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이번 4편의 대사들은 유독 ‘장난감’을 ‘부모’로 바꾸면 곧바로 아이 키우는 부모들이 느끼는(또는 느낄) 감정을 대변하는 대사가 되어 한층 더 울컥한다.

기술적 완성도? 뭐, 이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인데, 사실 요즘의 눈으로 보면 1편의 앤디는 거의 3편의 플라스틱 아기인형 빅 베이비 같아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앤디는 그저 장난감을 잘 가지고 노는 아이로 보일 뿐이다. 실감 떨어지는 초창기 컴퓨터그래픽이 아니고 말이다.

어느 순간 기술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픽사가 가진 진정한 기술이자 마법이 아니면 무엇이랴.

한동원 영화평론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