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로켓맨>
살아 있는 슈퍼뮤지션 엘턴 존
가난, 상처, 열정의 격동적 삶
자기 내면 찾아가는 과정 담아
편곡, 화려한 의상 돋보이지만
정서적 설득력은 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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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켓맨>은 슈퍼스타 뮤지션인 엘턴 존의 음악인생을 뮤지컬로 담아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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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멀게는 <레이>부터 매우 가깝게는 <보헤미안 랩소디>까지, 영화로 다뤄지는 슈퍼스타 뮤지션들의 삶은 무척이나 닮았다. 대략 다음과 같이.
①어린 시절, 부모(적어도 부모 중 한쪽)에 의한 상처나 억압 ②그 시한폭탄을 품은 주인공을 뚫고 올라오는 재능 ③재능의 폭발과 그것을 앞뒤 안 보고 즐기는 주인공과 세상 ④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명성, 재산, 친구들, 연인들 ⑤갑작스럽게 불어난 수위로 인해 범람하고 침수해버리는 주인공 주위의 풍경 ⑥팽창해버린 자아에 짓눌리기 시작하는 주인공 ⑦이와 동시에 대출상환 기한처럼 어김없이 찾아오는 약물중독과 침체와 배신과 우울, 고독 등등등. 여기에 최근에는 ⑧성소수자로서 겪는 내적, 외적 갈등과 그의 극복 또한 합류하고 있다.
<로켓맨>이 발췌, 묘사해주는 엘턴 존 경의 삶 또한 위의 패턴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나 얼마 전 <보헤미안 랩소디>의 끓어넘침을 경험한 한국 관객들에게 기시감은 더 강할 것이다. 더욱이 촬영 종료 몇주를 남기고 해고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을 대신해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마무리했던 덱스터 플레처 감독이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만큼 <보헤미안 랩소디>의 잔향은 없을 수 없겠다. 하지만 뭐, 꼭 그런 점이 아니더라도, 영국 출신 슈퍼스타의 전기영화 <로켓맨>에 대해 ‘<보헤미안 랩소디>와의 차이점 또는 차별성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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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켓맨>.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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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가세한 음악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을 꼽으라면, 무엇보다도 뮤지컬인지 아닌지에 있을 것이다. 음악이 스토리텔링의 대상인 <보헤미안 랩소디>와 달리 <로켓맨>에서 엘턴 존의 음악들은 스토리텔링의 일부다. 즉 <로켓맨>은 뮤지컬이다.
<로켓맨>이 뮤지컬로 기획된 것이 <빌리 엘리어트>의 경우처럼 향후 본격적인 뮤지컬로의 확장성을 고려한 포석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사실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공연의 기획자인 엘턴 존의 파트너 데이비드 퍼니시가 이 영화의 제작자이니만큼 짐작이 어렵지는 않다), 아무튼 <로켓맨>의 뮤지컬 연출에서는 21세기 ‘실사’ 뮤지컬 영화의 문을 연 <라라랜드>의 중력이 적잖게 느껴진다. 공간(실내 바에서 곧장 야외 놀이공원으로)과 시간(음악신동 어린아이에서 곧장 질풍노도 로큰롤 청년으로)을 뛰어넘는 군무, 또는 음악이 시작됨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별이 총총한 밤하늘로 배경이 바뀌는 등의 연출은 물론이려니와, 엘턴 존이 첫 미국 투어 중에 전설적인 록 클럽인 ‘트루바도’에서 ‘크로커다일 록’을 연주하는 장면의 공중부양 판타지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하지만 <라라랜드>와 <로켓맨>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 하나가 있다. <라라랜드>의 노래들은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오리지널 스코어들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대사의 연장 또는 ‘멜로디 있는 대사’가 되는 반면, <로켓맨>은 엘턴 존의 평생 동료이자 친구인 작사가 버니 토핀이 쓴 가사들을 개사도 거의 없이 사용하고 있다. 더구나 이 영화가 배즈 루어먼의 영화들처럼 현대의 팝이 고전에 적용되는 재미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로켓맨>의 뮤지컬 장면들은 어느 정도의 이물감을 안고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로켓맨>이 채택한 가장 주요한 방법은 편곡이다. 단순히 피아노곡을 현악곡으로 편곡하거나 사운드를 좀 더 현대적인 톤으로 바꾸는 식이 아닌, 우리가 소위 ‘발라드’라고 분류하는 장조 곡들을 현악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이 가세한 무거운 단조곡으로 바꾸는 식의 상당히 적극적인 편곡인바, 이는 엘턴 존이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후반부에서 좋은 효과를 보인다.
하지만 시청각적인 면에서만 보면, <로켓맨>의 가장 지배적인 요소는 뭐니뭐니해도 의상이다. 거의 1인 마디그라 퍼레이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현란한 엘턴 존의 의상 행각이야 굳이 이 자리에서 미주알고주알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그럼에도 이를 영화 한 편에 압축해서 연대기적으로 훑어보는 것은 과연 장관이라 할 만하다. 더구나 이 영화의 의상은 자기 자신의 빅뱅에 파묻혀 자신의 모습을 잃은 상태에서 점점 자신을 찾아가며 안정을 얻는 엘턴 존의 내면의 변화를 드러내는 시각적 장치로도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그가 첫 등장 장면에서 입고 있는 거대 날개 달린 오렌지색 악마(디아블로) 의상이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수수해지며 결국 검은색 트레이닝복으로 귀결되는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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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켓맨>.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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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인물의 동상 세우기?
그런데 사실 이 영화의 많은 의상들은 ‘팩트’가 아닌 엘턴 존의 기억에 의거해서 디자이너(줄리언 데이)가 상상한 일종의 증강현실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감독 덱스터 플레처의 말을 빌리면 이 영화는 “엘턴 존의 전기영화라기보다는 (엘턴 존의 주관적인 느낌과 때로는 부정확한 사실이 가미된) 기억”이다. 사실, 정보 차원에서는 엘턴 존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일생이 인터넷에 얼마든지 요약정리되어 있는 마당에, 그것을 얼마나 정확히 그리고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중 어느 부분에 집중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이겠다.
영화는 이를 명확하게 하려는 듯, 오렌지 악마 의상을 입은 엘턴 존이 중독자들의 재활모임에 불쑥 나타나서 던지는 “저는 알코올, 섹스, 쇼핑, 마약 중독에 분노조절장애가 있습니다”라는 대사와,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라는 다른 모임 참가자의 질문으로 영화 전체의 액자를 짜고 들어간다.(이 대사들을 ‘액자’로 사용한 의도는 거의 인공적이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데, 그런 눈에 보이는 연출은 <로켓맨>의 관람 도중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위에 적었던 ①부터 ⑧까지의 과정을 실로 착실하게 따라간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가난하고 어리숙하지만 열정 넘치던 무명 시절, 엄청난 성공 뒤에 이어지는 최측근의 배신, 그리고 마침내 표면으로 올라오는 부모와의 뿌리 깊은 갈등 등, 우리가 익히 보아온 이런 카인드오브 이야기 수순을 그대로 따른다. 이것은 감독 덱스터 플레처가 “이론적으로 이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라도 될 수 있다”고 말한 그대로인데,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우리가 <로켓맨>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예전 이 칼럼에서 잠깐 얘기했던 것처럼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 머큐리의 일생을 밴드라는 ‘후천적 가족’의 틀 안에서 풀었다. 덕분에 영화는 ‘프레디 머큐리의 짧고도 놀라운 생애’를 넘어선 정서적 설득력까지 확보해냈다. 우리가 퀸의 1985년 라이브에이드 공연을 거의 통째로 재연한,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큐멘터리적인 지루함 대신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은, 그 장면에 이를 때까지 차곡차곡 쌓인 정서적인 설득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덕분에 영화가 묘사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가, 또는 생존 밴드 멤버들의 윤색이 어디까지 가미되어 있는가 같은 것들은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로 밀렸다.)
<로켓맨>이 결정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은 그 정서적 설득이라는 부분이다. 예컨대 엘턴 존이 되기 전의 음악신동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엘턴 존의 본명)가 겪은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무책임, 부모의 불화 등은 성실히 나열되지만, 그것을 정서적으로 경험시키지는 않는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주의) 덕분에 영화의 말미에 어린 자신을 안아주는 어른 엘턴 존의 모습은 카타르시스는커녕 거의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사실상 <로켓맨>은 말하자면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엘턴 존 자신과 그의 파트너가 제작자로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동상이 독자적인 조각작품으로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태런 에저턴의 그야말로 온몸 던지는 연기와 노래로도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상당히 버거워 보인다. 덕분에 <로켓맨>은 안타깝게도 알록달록한 의상과 비주얼로 덮인 엘턴 존 경의 크롬 도금 흉상에 가까워져 버렸다.
“엘턴 존은 이후 모든 중독을 극복했다. 쇼핑 중독만 빼고는”이라는 말미의 에필로그 자막에 도달하기 위해 한 시간 반 남짓 이 흉상을 지켜보는 것은, 글쎄, 아무리 엘턴 존의 명곡들과 함께라도 꽤 허망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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