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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와이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소설가 남편과 내조에 헌신해온 아내의 숨겨진 이야기를 미스터리 영화의 형식으로 아슬아슬하게 펼쳐 보인다. 무엇보다 여자 주인공을 맡은 글렌 클로스의 연기가 돋보인다. 제작사 어나니머스 콘텐트 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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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더 와이프>
소설가 남편 노벨문학상 수상
시상식에 가는 부부의 이야기
아내 ‘내조’에 숨겨진 미스터리
남성중심사회의 편견 들춰내
주인공 글렌 클로스 탁월한 연기
영화 내내 아슬아슬한 긴장감
메시지 선명성에 빛바랜 측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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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와이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소설가 남편과 내조에 헌신해온 아내의 숨겨진 이야기를 미스터리 영화의 형식으로 아슬아슬하게 펼쳐 보인다. 무엇보다 여자 주인공을 맡은 글렌 클로스의 연기가 돋보인다. 제작사 어나니머스 콘텐트 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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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도 지난 일이 된 시점인지라 <더 와이프>에 대한 이야기, 그중에서도 특히 이 영화의 주연이자 주역이었던 글렌 클로스가 그 발군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여우주연상 후보 4회를 포함해 무려 7회나 후보에 올랐다) 아카데미상 수상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등등은 상당히 김빠진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상은 상이고 영화는 영화. 이 영화를 또다시 성공하지 못한 ‘아카데미 떡밥’(Oscar bait)이라는 스탬프를 찍은 뒤 구석으로 밀쳐두기엔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더구나 아카데미 수상 ‘실패’에 대한 글렌 클로스의 언급, 즉 “매년 만들어지는 영화의 수와 그 영화에서 주연을 한 배우들의 수와, 그 영화에서 주연은커녕 출연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배우 지망생들의 수를 생각하면, 5명 중의 1명으로 뽑히지 않은 것을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한 말에 매우 공감하는 사람 중 한명으로서는 더더욱.
미묘하고 드러내지 않는 연기
<더 와이프>는 이미 두 편의 소설이 영화화된 미국 작가 멕 울리처(여성이다)의 동명 소설(2003년)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영화의 기본 설정은, 일단은 상당히 단순해 보인다. 때는 1992년. 미국 소설가 ‘조지프 캐슬먼’(조너선 프라이스)이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보받는다. 하여, 그는 아내 ‘조앤 캐슬먼’(글렌 클로스)과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스톡홀름으로 날아간다. 영화는 그 시상식이 열리기 전날부터 시상식 직후까지 두 부부를, 아내 조앤에 무게중심을 두고 다룬다.
자, 여기까지는 전혀 신기할 것도 흥미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겠다. 그런데 조앤의 태도가 어딘지 이상하다. 그녀에 대해 어딜 가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인생의 사랑” “나의 뮤즈” “이 사람 없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등등의 애정과 찬사와 헌사를 쏟아내는 남편 조지프가 다른 것도 아닌 노벨상을 수상했는데도 조앤은 그다지 기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조앤은 온화하고 부드럽고도 참을성 많은 성품의 소유자로 보인다. 또한 ‘남편은 남편, 나는 나’라는 상당히 쿨한 사고방식을 견지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떨떠름함, 거리 두기, 착잡함에는 분명 ‘쿨함’ 이외의 뭔가가 더 있다. 남편이 보다 못해 “우리, 이 상황을 좀 더 즐기면 안 될까?”라고 말할 정도로.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킹메이커’라고 소개한다.(다름 아닌 스웨덴 국왕에게. 일단 노벨상 수상자를 ‘킹’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을 뺀다면, “우리 아내도 그렇게 말하지요. 하하하”라는 스웨덴 국왕의 받아치기가 제법 재미있었던 대목)
그런데, 그러고 보니 남편 조지프도 좀 이상하다. 그리도 사랑하는 아내가 그런 상태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즐겁게 해주려고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더 적극적으로 화를 내거나, 적어도 이유를 물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는다. 뭐, 하는 수 없지 풍으로 체념하는 정도.
뭘까? 둘 사이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걸까?
물론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캐슬먼의 전기를 쓰려고 그를 따라다니는 작가 ‘너새니얼 본’(크리스천 슬레이터)이 영화 45분 경과 시점쯤에 조앤을 따로 만나 결정적인 의혹을 던지고, 마침내 영화 70분 경과 시점에서 미스터리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말이다.(<더 와이프>의 러닝타임은 100분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영화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미스터리를 만들어내고 그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에는 글렌 클로스(더불어 그녀의 상대역 조너선 프라이스)의 연기가 절대적이다. 틈만 나면 바람을 피는 남편을 조앤은 사랑하는 것일까 아닐까? 조앤은 남편의 성취를 기뻐하는 것일까 아닐까? 조앤은 남편의 성취의 어디까지가 자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일부일까? 전부일까? 전무일까?
이런 궁금증들은 전반부 내내 온화하고 현명한 아내가 웃음 끝에 슬쩍 비치는 어두운 표정을 담은 클로즈업 한 컷으로, 역시 소설가인 아들을 계속 평가절하하는 남편에게 “누구에게나 인정이 필요해요”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던지는 대사 한마디로, 불길한 공기처럼 떠다닌다. 대표적인 예로, 일대일로 그녀를 몰아붙여 오는 너새니얼 본과의 대화 장면에서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그녀의 ‘부처님 손바닥’스러운 표정을 보라. 그런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미묘하고 드러내지 않는 연기가, 강하고 눈에 띄는 연기(예를 들면 장애를 연기한다거나 나이보다 훨씬 많은 역을 연기한다거나)보다 훨씬 어렵고, 누구나 쉽게 해내기 어려운 연기라는 말의 의미를 그대로 이해하게 된다. 또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조차 않게 된다.
덕분에, 흔히들 <더 와이프>에서 보여준 글렌 클로스 연기의 하이라이트라고 일컬어지는, 영화 후반부 시상식장 장면의 그녀 모습은 그야말로 ‘째깍거리는 시한폭탄’ 그 자체인데, 그런 아슬아슬함과 무시무시함은 그 이전까지 그녀가 절묘하게 유지해왔던 미묘함, 그리고 그 밑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긴장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은 물론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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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와이프>. 제작사 어나니머스 콘텐트 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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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미투 영화’ 평론도
하지만 실상을 말하자면, 이 영화가 내놓는 ‘은밀한 비밀’의 실체 그 자체는 그다지 미묘하거나 섬세하지 않다. 딱히 의외이지도, 충격적이지도 않다. 다만 그것은 서글픈 비극이면서도 일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사기극이기도 한데, 그 ‘비밀’의 단순함 덕분에 영화는 그 이전까지 유지해오던 현실감마저 잃고 모종의 캠페인 같은 색채까지 띠게 된다.
개인적인 희망을 말하자면 이 영화가 미스터리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 편이, 그러니까 미스터리로 밝혀낼 ‘비밀’ 같은 것을 처음부터 설정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깊이 있는 통찰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슨 말이냐면 ‘킹’이 아닌 ‘킹메이커’의 삶을 선택하게 되는 조앤의 결정이, 남성우월 사회에 의해 강요된 결정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영화는 뚜렷한 실체가 있는 ‘숨겨진 비밀’을 설정했다. 그리고 그 비밀이 드러나기 전과 후의 관점의 변화를 우리에게 체감시키며, 우리가 공기처럼 숨쉬고 있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편견을 스스로 느껴보기를 기대하고 촉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효과를 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이미 그어놓은 선에 맞춰 아군과 적군, 옳음과 그름, 우등함과 열등함 등등을 나눠두고 시작하는 이야기 특유의 한계다. 만일 이 영화가 조앤의 선택을 남성우월 사회에서 좌절한 선배 여성 작가(엘리자베스 맥거번이 연기하는 이 배역은 원래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할 예정이었다)의 쓰라린 체험담이나, 조앤이 스스로 출판업계에서 목격한 남성우월적 현실이 낳은 ‘두 주먹 불끈 쥔 결심’ 같은 것이 아닌, 그녀 스스로도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알 수 없는 과정, 즉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내밀한 과정, 그래서 ‘악당’이나 ‘사기꾼’ 등등을 특정해낼 수 없는 미묘한 과정을 통해 접근했더라면, 남성우월적 분위기가 중력처럼 모두를 감싸던(그리고 감싸고 있는) 우리 현실을 훨씬 더 깊고 리얼하게 파고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 와이프>의 선택이 아니었다.
실제로 “젊은 유대인 남자 작가”라는 출신 성분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고 있던 미국 출판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여성 작가로서, <더 와이프>의 원작자 멕 울리처가 해야 했던 이야기는 훨씬 더 긴급했을 것이다. 그리고 선명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선명성과 보편성을 맞바꿔 얻어낸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깃발이 되었다. 한 해외 언론은 이 영화를 두고 ‘완벽한 미투 영화’라고 했는데,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그 표현은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정치적 깃발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글렌 클로스가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 보였던 놀라운 연기, 즉 기쁨과 분노, 애정과 증오, 자부심과 회한, 감정과 이성이 평온과 온화의 안개에 싸인 채 미묘하고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연기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 없이도 이 영화가 주장하는 메시지의 선명성 같은 것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하여, 거의 8할 이상 글렌 클로스의 연기를 통해 실현되고 유지되었던 전반부의 미스터리를 통해 정치사회적(그리고 운이 좋다면 정서적) 충격을 극대화시키려고 했던 영화의 의도는 가벼운 트릭에서 멈춰버리고 만다.
그렇게 <더 와이프>에서 글렌 클로스의 탁월한 연기는 허망하게 소모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미(未)수상(수상 ‘실패’ 같은 표현은 쓰지 않으련다)보다 몇백배 더 안타깝고 애석한 일임은 물론이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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