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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15 20:12 수정 : 2019.02.15 20:22

영화 <증인>은 세상의 탐욕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대형 로펌의 변호사(정우성)와 사건 현장을 목격한 자폐인 고교생(김향기) 사이에 점차 가까워지는 따뜻한 교감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관객인 우리 안의 탐욕과 편견을 드러내준다. 무비락, 도서관옆스튜디오 제공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증인>

살인 피의자 변론 맡은 로펌 변호사
유일한 목격자 자폐 고교생에 접근
재판 이기기 위해 이용하려 하지만
소통은 점점 편견을 깨고 교감으로

외제차, 고액연봉과 맞바꾸며
우리 안에서 멸종돼가고 있는
도덕, 진실의 가치 뒤돌아보게 해

영화 <증인>은 세상의 탐욕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대형 로펌의 변호사(정우성)와 사건 현장을 목격한 자폐인 고교생(김향기) 사이에 점차 가까워지는 따뜻한 교감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관객인 우리 안의 탐욕과 편견을 드러내준다. 무비락, 도서관옆스튜디오 제공
제목만으로는 순도 100%의 법정영화스러웠으되 실제로는 전기영화였던 <변호인>과 달리, 법정물에 꽤 많이 근접해 있는 <증인>. 하지만 <증인>에게도 ‘본격 법정물’이라는 호칭은 다소 애매하다. <증인>은 법과 사법시스템, 그리고 이를 통해 엿보는 인간이라는 테마 못지않게 편견과 이해라는 또 다른 포인트에도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또는 누구)에 대한 어떤 편견?

<증인>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한 명은 살인으로 의심받는 사건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한 고등학생 ‘지우’(김향기), 그리고 또 한 명은 이 사건에서 살인 피의자의 변호를 맡게 되어 ‘지우’의 목격담을 반박해야 하는 입장에 서는 변호사 ‘순호’(정우성).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각자 나름의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일단 변호사인 순호를 보면, 그는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형 로펌에 적을 두게 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출신의 변호사다. 그는 부도덕한 기득권자들의 ‘법률 에어백’이라는 이미지를 쇄신하고 싶어하는 대형 로펌에 의해 간판 변호사로 키워질 예정이다. 즉, 순호는 이번 사건이라는 통과의례로 “적당히 세상 때가 좀 묻은”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로펌의 기획하에.

그리고 그의 반대쪽에는 사건의 목격자인 지우가 있다. 그는 자폐인이다. 바로 이 점이 <증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설정이자 이 영화를 단순한 법정물이 아니도록 하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오후 5시 정각의 퍼즐 퀴즈

순호는 자폐에 대해서 자신보다 훨씬 잘 알고 있고 이미 지우와 꽤 능숙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검사 ‘희중’(이규형)에 맞서서 지우의 증언이 신빙성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입장이다. 순호는 싫든 좋든 지우와 말을 터야 한다. 자폐에 대해 문외한인 순호가 자폐인인 지우와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이 과정이, 순호가 막연하게 품고 있던 자폐인에 대한 편견(‘그런 애를 법정에 세우기만 하면 승소는 따놓은 당상이야’라는 식)을 극복하고 그를 이해하는 과정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영화의 일차적인 관건은 그 과정의 정서적인 설득력이 될 것이다.

<증인>은 이를 위해 뭔가 거대한 사건이나 설교 대신, 작지만 확실히 손에 만져지는 에피소드들을 내놓는다. 그중 단연 백미이자 핵심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오후 5시 정각의 퍼즐 퀴즈’일 것인데, 순호는 지우가 퍼즐 퀴즈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매일 오후 5시 정각마다 지우에게 전화를 걸어 퍼즐 퀴즈를 낸다. 예컨대 ‘집의 네 면 모두가 남향이 되도록 집을 짓는 방법?’ 같은 수수께끼들 말이다.

그러는 동안 순호(그리고 관객들)는 자폐인에 대한 여러 편견, 예컨대 지능이 떨어진다든지, 자기 자신의 생각은 아무것도 없다든지 하는 편견을 깸과 동시에, 타인의 감정을 읽거나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자폐인의 여러 특징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런 카인드 오브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문가 해설’ 같은 뻑뻑한 방식 대신 ‘지우의 전화 끊는 방식’(스포일러 우려로 상세 설명은 생략) 등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면서도 코믹한 상황들을 묘사함으로써 매우 부드러운 목넘김을 확보한다.

거기에 지우만 보면 짖어대는 개라든가, 구멍가게(그야말로 옛날식 구멍가게. 로케이션의 승리다)에서 먹는 컵라면 한 그릇이라든가, 지우가 좋아하는 젤리 같은 것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두 사람의 교감은, 인공적 속도로 몰아대는 대신 한 겹씩 차곡차곡 쌓아올려진다. 종종 터지는 웃음과 함께 흡수되는 그 정감은 충분히 따뜻하고 설득력 있다. 뭐, 이 대목의 마무리는 두 사람이 ‘나뭇잎 사이로 따사로이 떨어지는 햇살’을 받으며 길을 거니는 장면으로 갈음되고 있긴 하다만서도, 이 장면이 그저 보험광고스럽게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앞에서 차곡차곡 쌓아올린 정감이 뒤를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겠다.

이런 교감의 과정 다음, <증인>은 영화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민변 출신의 대형 로펌 변호사’ 순호를 본격적으로 심판대 한가운데에 세운다.

사실 영화의 대사로도 나오듯 순호가 맡은 이 사건은 사회적, 정치적 부담이 거의 없는 ‘단순’ 살인사건이다. 영화에서는 이 사건이 ‘언론에서 관심 가지기 딱 좋은 사건’이라고 하지만, 흠, 딱히 그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떻게 이야기의 규모와 긴장감을 확보할 것인가.

영화는 순호가 겪을 도덕적 갈등과 사회적 맥락을, 순호-지우 사건의 외부에서 수혈해 온다. 순호가 속한 대형 로펌은, 발암물질 생리대를 알고도 판매한 부도덕한 회사를 주요 의뢰인으로 변호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 회사는 상당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다. 그래서 순호의 회사는 ‘살인 누명을 쓴 힘없는 가사도우미(염혜란)을 구하는 서민의 친구’라는 이미지를 순호를 통해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다. 순호의 고민은 그런 회사로부터 외제차와 전망 좋은 사무실과 고액 연봉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더하여, 이 발암물질 생리대 소송에서 피해자 변호는 (우연히도) 그의 민변 시절 절친이었던 ‘수인’(송윤아)이 맡고 있다. 그녀는 드러내놓고 그를 적대시하지는 않고 오히려 친구로 대하지만 변절하지 않은 그녀의 존재 자체가 순호에게는 압박이다.

이렇게 영화는 중후반까지 마치 두 영화인 듯 ①지우와 순호의 교감과 ②순호의 도덕적 갈등이 서로 거의 만나지 않으며 진행된다. 물론 상영 1시간30분쯤이 지난 시점에, 지우의 사건 현장 목격담이 마침내 등장하고 그제야 썩은 대형 로펌에 몸담은 순호의 도덕적 딜레마는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온다. 하지만 그런 뒤에도 ①과 ②의 관계는 그다지 밀접해 보이지 않는다.

통쾌하고 극적인 결말의 법정 변론

영화는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①과 ② 사이의 연관성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또한 순호의 번민에 인간적 온기를 더해주는 순호 아버지(박근형, 코믹 대사와 연기는 가히 일품이다) 캐릭터를 통해 자칫 완전히 분리될 수 있었던 ①과 ②를 부드럽게 봉합해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자폐인인 지우의 상대 쪽 변호사로서 겪는 순호의 난처함은 꼭 ‘그런 로펌’ 소속의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영화는 결정적인 순간, 지우 쪽을 공격하는 순호와 로펌 대표의 감정과 대응을 상당히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앞서 있던 지우와의 교감으로 볼 때 상식적이지 않을 정도로 공격적인 순호의 변론이나, 능구렁이 로펌 대표치고는 너무나도 유아적인 대표 변호사의 과잉행동 등에서는 ‘엇?’ 하는 신음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물론 순호의 갈등이나 썩은 로펌의 천박함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의 소산이겠으나 이전까지의 부드러운 감정 묘사와 비교해 그 대목들이 풍기는 플라스틱향은 상당히 강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런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 ①과 ② 사이의 연관성이 희박하다는 점은 거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증인>은 결국 순호를 통해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이’라는 이름의 신경안정제를 입에 문 채 도덕이나 정의, “진실”(이 단어는 지우의 대사 모두를 통틀어 가장 큰 힘이 실리는 단어다) 같은 부담스럽고 성가신 것들을 조금씩 마비시키고 있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증인>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물론 ‘본격 법정물’로서의 약점은 하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의 진상(심지어 영화는 초반에 스스로 “자폐인은 거짓말을 못해요”라는 대사를 넣고 있다)을 1시간30분 경과 시점까지 밝히지 않는다거나, 비록 매우 통쾌하고 극적이긴 하지만 법정영화로서는 거의 에스에프 판타지스러운 단계로 넘어가는 변론을 결말로 설정한다거나 말이다(그 변론 뒤에 순호가 맞아야 할 혹독한 후폭풍 및 시련이 진정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본격 법정물 대신 법정 판타지라면 또 어떤가. <증인>은 우리가 고가의 외제차와 고액 연봉과 펜트하우스와 맞바꾸며 점점 멸종시켜가고 있는 가치들을 ‘설교 (거의) 없이’ 웃고 울고 즐기는 사이에 저절로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그걸로도 충분하다. 탐욕에 천천히 중독되고 마비되어가는 우리 자신들을 한번 슬쩍 돌아보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막판의 포옹 신은 없었더라면 더 좋았겠다만, 뭐 그럼에도.

포복절도 좀비 판타지 <기묘한 가족>과 함께, 설 연휴에 개봉하지 않았던 것이 무척이나 아쉬운 영화.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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