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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18 19:25 수정 : 2019.01.18 19:49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가버나움>

끔찍한 가난과 무책임한 부모
가출한 12살 아이가 만난
불법체류자 미혼모와 2살 아이
이들이 만들어낸 ‘가족’의 모습

영화 <가버나움>에서 열두살 자인은 가출 뒤 우연히 만나 가족이 된 두살 요나스를 위해 스케이트 보드를 개조해 만든 유모차에 요나스를 태우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생계비를 번다. 세미콜론스튜디오 제공
<가버나움>은 가벼운 마음으로 느긋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물론 이 영화에는 희망이 있다. 유머도 있고 인간적 온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파경보 내린 날의 포켓용 핫팩 정도다. 하지만 그런 혹한기야말로 핫팩의 존재가 가장 빛을 발하는 시기일 것이라는 판단하에, 우리는 이 영화를 금번 감별에 모시기에 이른다.

가버나움. 이 제목은 한국식 표기로는 보통 ‘카파르나움’이라고 적는 이스라엘의 지역명이다. 뭐, ‘카파르나움’이 ‘가버나움’으로 거듭나게 된 작명철학적 배경이야 필자로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미궁이다만, 오직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배경이 한정되어 있는 이 영화에 다른 지역의 지명이 제목으로 붙은 이유 정도는 논해볼 수 있겠다.

잘 아시다시피 카파르나움은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알려진 장소다. 동시에 이 지명은 ‘바로잡기에는 너무 드넓게 엉망이 되어버린 혼돈’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요컨대 이 제목은 이 영화가 기적과 혼돈에 대한 영화가 될 것임을 천명하는 제목인바, 우리는 과연 이 영화를 통해 어떤 기적 및 혼돈을 마주치게 될 것인가.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일단 혼돈 얘기부터 해보자. 영화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라는 영화의 메인 카피가 말하는 바로 그 상황을 마주치게 된다. 병원기록도 출생신고도 부모의 정확한 기억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치아 검사를 해서 12살 정도로 겨우 나이를 추정해볼 수 있는 아이 ‘자인’(자인 라피아)은,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수갑을 찬 채 법정에 나와 자신의 부모를 고소한다.

영화의 감독인 나딘 라바키가 ‘자인’의 변호사로 출연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그 자체로 한편의 영화적 재판이기도 한데, 모두진술쯤에 해당되는 이 단계에서 방청객인 우리는 두가지 궁금증을 마주친다. ① 대체 부모가 뭘 어쨌기에? ② 왜 저런 어린아이가 수갑까지 찬 죄수가 됐나?

①의 답은 곧장 제시된다. 자인은 베이루트 빈민가에서 대체 몇명인지도 모를 만큼 많은 형제자매들과 살고 있다. 그의 집은 엄마 스스로가 “여긴 돼지 우리야”라고 말할 정도로 열악한 곳이다. 아기는 방치된 채 더러운 바닥에서 분유가루를 퍼먹고, 비가 오면 바닥에 고인 물 때문에 감전을 두려워해야 하고, 아이들은 부모와 천막 하나로 나뉜 비좁은 바닥에 직소퍼즐처럼 엉켜 자며 섹스하는 부모의 거친 숨소리를 라이브로 들어야 한다.

자인 부모의 문제는 단지 가난만이 아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아이들에게 욕과 손찌검을 날리고, 아이들에게 가짜 처방전으로 타온 약으로 정체 불명의 주스를 만들어 팔게 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 이유를 “그래야 거기서 뭐든 얻어올 거니까”라고 당당하게 내뱉으며,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자인이 아껴 마지않는 11살짜리 여동생 ‘사하르’(세드라 이잠)를 집주인 아들에게 결혼시켜 집세를 퉁치려고 한다.(이 때문에 자인은 사하르가 생리를 시작했음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영화는 이렇게 자인이 부모를 고소고발 하게 된 기본 포인트를 짚고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여동생과의 탈출에 실패한 자인은 무작정 집을 떠나, 우연히 놀이공원 청소부로 일하는 에티오피아 출신 불법체류 여성 ‘라힐’(요르다노스 시퍼라우)을 만나게 된다. 이 단계에서 <가버나움>은 자인의 부모가 부모로서 했어야 마땅한 일을 두가지 버전으로 제시한다. 하나는 ‘라힐’, 그리고 또 하나는 자인을 통해서다.

라힐은 임신한 아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하던 집에서 도망쳐 나와 아이를 낳은 뒤 불법체류자로서의 불안한 생활을 이어간다. 지금의 일터에서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 들키면 바로 쫓겨난다. 덕분에 그녀는 두살짜리 아들 ‘요나스’(볼루와티페 트레저 반콜레, 실제로는 여자아이)를 바퀴 달린 장바구니에 넣어 몰래 일터로 데려와 화장실에 아이를 숨겨둔 채 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미혼모+싱글워킹맘+불법체류자 3관왕, 그리고 그로 인한 극단적인 가난을 모두 끌어안은 라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 요나스에게 지극히 헌신적이다. 더구나(!) 갈 곳 없고 배곯은 생면부지의 가출아동 자인에게 기꺼이 먹을 것과 잘 곳을 나눠준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또는 여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자책을 보상하려는 듯) 자인은 라힐의 두살배기 아이 요나스를 친형처럼 돌본다.

극단적 상황에 몰린 애엄마 라힐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아이 자인, 이 두 사람이 요나스에게 주는 모성적 헌신은 그야말로 눈물겹다.(맞다. 지당히도, 모성이 반드시 여성이나 성인만의 전유물일 필요는 없다) 또한 그 디테일은 4년에 거친 관찰 및 취재의 힘을 보여주듯 조목조목 리얼하고 생생하다.

아무튼 상황은 결국 자인과 요나스, 두 아이를 단둘만이 남게 한다. 그 뒤부터 자인은 요나스를 돌보기 위해 처절한 임기응변적 사투를 벌여야 한다. (라힐의 집에는 티브이 같은 사치품은 없으므로) 자인은 요나스에게 거울로 옆집의 티브이를 훔쳐 보여주며 자기 입으로 대사를 들려준다. 옆집 아이에게 빼앗은 스케이트 보드를 요나스를 위한 유모차로 개조해 끌고 다니며 정체 불명의 주스를 팔아 생활비와 북유럽으로의 탈출 비용을 벌어들인다. 이 둘의 모습은 처절한 동시에, 놀랍게도 가벼운 웃음을 종종 지을 수 있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세미콜론스튜디오 제공
아역배우들 실제 빈민가 출신
감독의 연민과 애정이
이끌어낸 연기가 영화의 압권
4년간의 관찰·취재 사실성 높여

영화가 멈춰버린 지점

자연스럽게 에밀 아자르의 걸작 <자기 앞의 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 두 아이의 생존전쟁 대목은, 열두살짜리 어린이 배우와 두살짜리 아가 배우의 놀라운 연기 덕분에 영화의 실질적 하이라이트가 된다. 특히 대사라곤 옹알이가 전부인 두살 아기 반콜레의 ‘연기’는 발군이다. 이 아기가 자동차와 행인들이 마구 뒤엉키는 번잡한 길에 혼자 내놓인 요나스를 연기하는 장면에서, 내심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지 않을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을 필두로 한 많은 사실주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두 아역배우를 포함한 <가버나움>의 배우들 역시 대부분 자신들의 역할과 거의 같은 상태에서 캐스팅된 일반인들인데, 그들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그것을 끌어내고 포착한 감독과 스태프들의 노력과 시간과 인내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아이들의 눈물겨운 고난을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자신의 출발점, 즉 그런 아이들을 만들어내고 방치하는 부모(그리고 사회)에 대한 분노 어린 소송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영화가 세번째 단계로 들어서는 대목인데, 이 단계에서야 마침내 우리는 서두에서 품었던 또 하나의 궁금증 ‘자인은 대체 어떤 범죄를 저질렀나?’에 대한 답을 만난다. 그리고 자인의 ‘범죄’가 그들의 부모(와 그들과 공모한 또 다른 어른)의 범죄에 가까운 무책임 때문에 일어난, ‘정상을 충분히 참작’할 수 있는 범죄였음을 알게 된다. “나도 부모 잘 만났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어”라며 자신들의 무책임을 운명과 시스템 탓만으로 돌리는 자인의 부모에게 내려진 유죄 확정판결은, 자연스럽게 자인과 요나스 그리고 라힐에 대한 해피엔딩적인 보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쩌면 서두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이 결말로 인해 영화의 심장이라 할 두번째 단계, 즉 요나스를 돌보는 라힐과 자인의 헌신적인 사투가 통째로 자인의 부모에 대한 거대한 반대진술로 변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덕분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현실을 그려낸(감독의 두 전작과는 달리 <가버나움>은 대부분 핸드헬드로 촬영되어 있다) 이 영화가 다다를 수도 있었던 훨씬 깊은 통찰은, 아쉽게도 분노 어린 영화적 고소, 고발과 ‘응당 그러해야 마땅할’ 판결 안에 봉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 이유로 한국 개봉 버전에만 삽입되었다는 <가버나움> 출연 배우들이 실제 삶에서 겪게 된 변화를 알려주는 마지막 자막은 본의 아니게, 이 영화가 멈춰버린 지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실 <가버나움>에서 가장 ‘기적’에 가까웠던 대목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아기 요나스를 둘러업고 그 아이를 놓지 않으려고 끝까지 사투하던 자인의 모습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왜냐면 그 장면을 단지 자신들의 인물들에 감정이입하고 있는 감독의 희망사항으로만 보이지 않게 했던 것은, 어린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였으므로. 그리고 그것을 끌어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을 방치하는 사회에 대한 감독의 분노와 그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이었으므로.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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