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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05 10:35 수정 : 2019.01.06 10:07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그린 북>

품위 지키는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
떠벌이 왁자지껄 백인 운전기사
함께 떠난 연주 투어에서 생긴 일
이해와 연민, 우정, 가족의 온기

백인과 흑인, 진지함과 코믹함
뒤집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완성도와 대중성 균형 돋보여

영화 <그린 북>은 백인과 흑인, 상류와 하류, 품위와 천박함, 진지함과 코믹함을 뒤집은 채로, 흑인 피아니스트와 백인 운전기사 간의 이해, 연민, 우정의 따듯함을 담아냈다. 드림웍스 등 제작사 제공
이 칼럼이 격주 연재인지라 어쩔 수 없이 다룰 수 없게 되는 영화가 매년 두세편 정도 생긴다. 2018년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보헤미안 랩소디>도 그중 하나였는데, 사실 이 영화의 흥행(그리고 마치 엊그제 데뷔한 듯 인기 만발인 퀸의 음악들)을 두고 ‘한국에선 단연 음악영화가 인기’라고 정리하는 것은 좀 과한 단순화가 아닌가 싶다.

한국 관객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단순히 ‘음악영화’만도, ‘잘 만든 음악영화’만도 아니다. 좀 멀게는 <레이>, 가깝게는 <휘트니>나 <스타 이즈 본> 같은 영화들의 그리 크지 않았던 반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럼 뭔가.

핵심은 음악보다는 밴드에 있다. 유독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음악영화들, 예컨대 <원스> <비긴 어게인> 등에는 어김없이 밴드라는 공통점이 있다.

음악에서도 그렇지만,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특히나 솔로 뮤지션과 밴드는 아주 다른 존재다. 솔로 아티스트 영화가 기본적으로 전기 영화라면, 밴드 영화는 가족영화다. 밴드 영화에는 연애의 시작(멤버들의 첫 만남)과 결혼(밴드 결성), 그리고 자녀 출산(작곡과 앨범 발표)과 양육(공연과 각종 프로모션), 결혼생활의 우여곡절(유명세와 수익 배분, 저작권 등을 둘러싼 다툼과 화해 등) 같은 가족생활의 모든 양상이 창작 및 쇼 비즈니스의 형태로 압축된다.

물론 주옥같은 퀸 플레이리스트도 있고, 작정한 듯 관객을 위한(특히 퀸 팬들을 위한) 영화를 추구한 브라이언 싱어의 연출도 있겠다만, <보헤미안 랩소디>의 흡인력의 중심에는 가족영화적인 정서(“우린 가족이잖아”라는 극중 브라이언 메이의 대사로 대표되는)가 있다.

과감한 체중 증량 모텐슨의 열연

얘기가 길어졌는데, 아무튼 <그린 북> 역시 그런 면에서 ‘음악영화’로 분류될 수만은 없겠다. 물론 이 영화의 두 주인공 중 한명은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라는 실존했던 피아니스트다. 영화는 그가 1960년대에 떠났던 8주 동안의 공연 여행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연주는 자연스럽게도 영화 곳곳에서 등장한다. 어딘지 오스카 피터슨 또는 조지 시어링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로 각색된 그의 연주는 아름답고, 마허샬라 알리의 피아노 타건 연기는 <스윗 앤 로다운>에서 숀 펜이 보여줬던 기타 연주 연기만큼이나 대단하다. 영화 막바지에 등장하는 돈 셜리의 ‘우연한’ 연주 장면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반전’이었음에도 충분히 짜릿하며, 건강에 해로울 정도로 유쾌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음악영화’만은 아니다. 또 한명의 주인공 ‘토니 발렐롱가’(비고 모텐슨)라는 캐릭터의 존재 때문이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음악이 아닌, 몰라볼 정도로 살을 찌운 비고 모텐슨의 뱃살이다. 2년 전 <문라이트>로 영화 팬들의 뇌리에 한 획 제대로 그었던 마허샬라 알리와 비고 모텐슨이 함께 출연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눈길을 끄는 마당에, 비고 모텐슨이 저리도 과감한 체중 증량까지 해가며 연기한 인물은 과연 어떤 인물일 것인가.

그는 ‘역사에 족적을 남긴 거물’이 아니다. 이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뉴욕의 코파카바나 클럽의 기도로 일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패밀리맨이다. 구라와 수다, 그리고 주먹으로 나름 클럽의 해결사로 공인받던 그는, 코파카바나가 잠시 문을 닫는 동안 벌이를 위해 돈 셜리의 연주 투어를 돕는 운전기사 일에 취직한다. 그렇게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니까 백인인 토니의 고용주는 흑인이다. 흑인인 셜리는 연주자로 살아남기 위해 재즈를 연주하지만, 러시아에서 클래식을 전공했으며, 공연에서는 항상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고집한다. 이름 대신 ‘박사’라는 호칭을 쓰며, 다른 재즈 뮤지션처럼 ‘품위 없게’ 담배를 꼬나물고 피아노 위에 위스키 잔을 올려놓는 짓은 사양한다. 애호하는 무릎담요에 프라이드치킨 가루가 떨어져 기름 얼룩이 질까 두려움에 떨고, 그리고 항상 혼자다.

반대로 ‘발렐롱가’라는 난해한 성 대신 ‘떠버리’(Lip)라는 닉네임으로 더 자주 불리는 토니의 주변은 항상 같은 이탈리아계 친구, 친지, 동료 등등으로 시끌시끌하다. 주변이 조용하면 그 자신이 스스로 시끄럽다. 오르페우스(Orpheus)와 고아원(orphanage)을 구별하지 못하며, 러시아어와 독일어는 굳이 구별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구라쟁이(bullshit artist)와 거짓말쟁이(liar)는 칼같이 구별한다(그 차이는 그 자신만 안다). 흑인들의 음악에 대해서는 흑인인 셜리보다 훨씬 빠삭하지만, 아내 향한 사랑편지의 엉망진창 철자법으로 셜리의 지도 편달을 자초한다.

아마도 이쯤에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떠올릴 분들이 많을 것이다. 맞다. <그린 북>은 <드라이빙…>을 뒤집어 놓은 형국이다. 운전사와 고용주의 피부색뿐 아니라, 교육 수준, 재산 규모, 생활방식에서도 그렇다. 일견 <드라이빙…>에 대한 야유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설정은 아닌 게 아니라 매우 큰 차이를 낳는다.

셜리가 투어를 다니는 곳은 미국 남부지역. 관객은 모두 부유한 인종주의자 백인들. 재삼 상기시켜드리지만 시대는 1960년대다. 하여 화장실, 호텔, 바, 양복가게, 식당 등등에서 갖가지 수법(그 수법들 한번 참으로 창의롭다)으로 셜리에 대한 차별과 모욕이 자행된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토니는 백인이다. 그는 집수리를 왔던 흑인 배관공들이 입을 댄 컵을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폭력이 아닌 품위만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인종주의자들 앞에서 연주하는 흑인 피아니스트와 싫건 좋건 8주 동안 여행을 해야 한다.

올해 놓쳐선 안 될 영화 중 하나

자, 이쯤에서 많은 분들이 아카데미 시즌이면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정치적으로 올바른 감동 드라마’의 전형적인 흐름과 만듦새를 떠올리실 것이다. 서로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처음에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그 와중에 감정적, 정치적 긴장을 중화시킬 에피소드 몇몇이 윤활유처럼 첨가되고, 결국 두 사람은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그렇게 서로 완전히 친구가 되었다 싶을 때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날아든 파울볼처럼 꽤 심각한 갈등이 날아든다. 그리고 적당한 난관 뒤, ‘비 온 뒤 더 굳어지는 땅’스러운 화해가 뒤따른다. ‘남은 자잘한 문제들을 힘 합쳐 극복한 두 사람은 등장인물들 모두를 대승적으로 품어주는 따뜻한 엔딩을 맞이한다’, 대략 이런.

큰 흐름으로 본다면 <그린 북>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린 북>의 엔딩은 영화 초반에 예견된 대로 수북하게 눈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하지만 그런 할리우드 매뉴얼스러운 점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의식되지 않는다. 이 놀라운 착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선, 토니 발렐롱가와 돈 셜리를 각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시나리오다. 하긴 토니의 아들 닉 발렐롱가가 이 영화의 제작자 겸 각본가(중 한명)이니만큼 이 두 인물과 그들의 체험담의 입체적이고 생생한 묘사는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에 (아내에게 띄우는) 사랑편지, 행운의 돌, 한병의 위스키, 켄터키프라이드치킨 같은 아이템을 이용해서 이야기에 조금씩 찰기를 더해가는 솜씨는 그리 당연한 것만은 아니다. 더하여 웃김과 심각함 사이의 황금비율적 균형,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의 코미디(과연 ‘코미디는 타이밍’)는 코미디만 거의 사반세기 파온 감독 피터 패럴리의 축적된 내공도 빛을 발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고 모텐슨과 마허샬라 알리의 연기가 있다. 출중하지만 관객을 윽박지르지 않는 이들의 노련한 연기가 아니었다면 <그린 북>의 미묘해 보이면서도 단순하고, 단순해 보이면서도 미묘한 이야기가 이렇게 단단한 틀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감탄스러운 것은 두 배우 각자의 연기만큼이나, 이들이 균형을 유지하며 서로 상대의 연기를 끌어올리는 솜씨다.

그러고 보면 결국 이 영화의 놀라움은 균형으로부터 온 것이다. 백인과 흑인, 상류와 하류, 품위와 천박함, 진지함과 코믹함, 사회와 개인이 모두 뒤집힌 상태로 출발하는 이 영화가, 노련한 운전사가 모는 차처럼 부드럽고 매끄럽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시나리오?연출?연기 모두가 실현해내고 있는 놀라운 균형 덕분이다. 우연이든 아니든, 한 영화에서 이 정도로 완성도와 대중성 사이의 균형이 이뤄지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거기에다(!) 음악까지 있다. 그러니 뭘 더 바라겠는가. 이해, 연민, 우정, 가족, 그리고 음악. 이들 모두가 섞여 만들어진 자연발화. 그 따뜻함이 영화 한편에 있다. 이런 온기 앞에서라면 솔직히 새로운 영화문법이나 인식의 새로운 지평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싶다.

‘올해 최고의 영화’를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이니 이렇게 얘기하자. 올해 놓쳐서는 안 될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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