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
마이클 무어의 신작 다큐멘터리
트럼프 시대 만든 건 기득권 책임
공화당과 민주당 주류 모두 비판
영화적 통쾌함과 섬뜩한 코믹함
‘나 안의 무엇’ 성찰하지 않는
’절대악의 타자화’로는 한계도 뚜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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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감독 마이클 무어의 신작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 사회를 조명하면서 인종주의, 무늬만 민주주의의 문제와 관성에 젖은 기성 정치권을 비판한다.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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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영화는 마이클 무어의 14년 전 작품 <화씨 9/11>의 첫 대사 “모든 게 다 꿈이었을 뿐일까?”를 똑같이 반복하며 시작된다만, 그런 영화적 재치를 고려하지 않고 첫마디를 골랐다면 그건 필시 이랬을 것이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쩌다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의 국민이 된 걸까.
그래서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Fahrenheit 11/9)>는 궁금하다.(11월9일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일) 개표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전인 트럼프 후보 지명 이후부터 줄곧 ‘러스트 벨트’(공업으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 지역)의 밑바닥 민심에 대한 통찰을 통해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 경고함으로써 거의 영험의 반열에 근접했던 마이클 무어(제작/각본/감독)의 ‘어쩌다 이렇게’이니만큼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강한 기시감 또한 밀려든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기승전결을 전부 알아버린 듯한 기시감 말이다. 그가 전작 <다음 침공은 어디?>의 막판에서 갑작스레 ‘여성지도자 지구평화론’을 꺼내들며, 영화를 장편 힐러리 클린턴 지지 동영상으로 일순 탈바꿈시켰던 것을 떠올리면 더욱. (뭐, 그 장면에 순간 등장해 우리를 쓴웃음 짓게 하였던 그녀의 사진 때문은 딱히 아니고.)
아무튼.
힐러리 넘어 오바마에도 화살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일단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전진한다. 힐러리 낙선 확정의 절망감과 대통령 트럼프 등장의 괴이함(정말로?!!!)을 병치하며 시작을 끊은 뒤, ‘그런데 어쩌다가 트럼프가 대선 출마를’로 되돌아가 막말 예능인 트럼프를 지지·옹호·지원하며 힐러리를 공격하는 남성 언론인들의 성범죄 경력을 두루 훑고 난 다음 트럼프 본인의 딸과의 근친연애스러운 행동거지 모음으로 정점을 찍고 나서, 전세계 각종 스트롱맨(시진핑, 두테르테, 푸틴, 김정은 등등)을 사뭇 애호하는 그의 면모까지 두루 훑으며 트럼프라는 인물, 캐릭터, 인간의 면면을 조망한다.
그러는 동안 언제나처럼 아군과 적군을 확실히 나눠주는 음악이 수반됨은 물론인데, 눈에 띄는 점은 트럼프 장면에서 ‘우중충한’ 유럽풍의 음악들(추억의 공포영화 <오멘>의 테마곡부터, 레온카발로(이탈리아)의 오페라, 모차르트(오스트리아)의 레퀴엠까지)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연일 리 없는 이 선곡의 영문에 대해서는 뒤에 얘기하도록 하고 계속하자면, 이 ‘트럼프라는 인간’ 챕터가 도달하는 기착지는 릭 스나이더가 주지사로 있는 미시간주 소재의 도시 플린트다.
왜 하필 하고많은 도시 중 플린트인가. 그건 다들 아시다시피 그곳이 바로 마이클 무어의 고향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플린트는 ‘미국의 이명박’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릭 스나이더라는 인물이 밀어붙인 물 정책(사실 ‘정책’은 지나치게 멸균된 어휘겠다만)의 직격탄을 맞은 도시이고, 그 직격탄, 즉 납 함유 수돗물의 피해가 대부분 그곳의 흑인 인구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맞다. 마이클 무어가 플린트를 경유해 도착한 다음 목적지는, 다름 아닌 인종주의 문제다.
그리고 인종주의 문제는 결국 극우 또는 파시즘의 문제에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미국은 파시스트의 국가인가, 미국민 대다수가 파시스트이기 때문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인가,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미국은 원래 좌파의 나라다, 라는 것이, <엔비시>, <월스트리트 저널>, 갤럽, <로이터>, 하버드대학 등등의 통계치(예컨대 응답자의 71% 임신중절 합법화 지지, 82% 여성 동일임금 지지, 74% 환경법 강화 지지 등등)를 줄줄 인용하고 있는 마이클 무어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트럼프가 오벌오피스(백악관 집무실)에 떡하니 앉아 있는 건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지금까지의 마이클 무어와는 다른 <화씨 11/9>의 결정적 차별점이다.
마이클 무어는 ‘어쩌다 이렇게’의 답으로서, 풀뿌리들의 목소리와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첩첩산중점입가경컨테이너블로킹 해둔 시스템, 즉 ‘무늬만 민주주의’ 시스템을 지목한다. 그리고 그 무늬만 민주주의의 대표적 표본이 바로 (버니 샌더스가 아닌) 힐러리 클린턴을 대선 후보로 내놓은 민주당 주류다.
그런데 뭐? 공화당이 아니라 민주당?
물론 마이클 무어가 2014년 작 <식코>에서 이미, 미국의 썩은 의료체계를 수술할 여전사로 분연히 일어섰다가 결국 뒤에 민간 의료보험 회사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게 된 ‘뻔한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을 비판했던 적이 있음을 기억하시는 분들께서는, 마이클 무어 원래 그랬잖아?라고 반문하실 것이다. 맞다. 그런데 관건은 그 강력함의 정도다. 마이클 무어의 비판은 힐러리를 넘어 오바마에 이른다. 그리고 플린트는 그것을 더할 나위 없이 상징적이자 극적으로 보여주는 무대가 된다.
마이클 무어가 납 수돗물 문제에, 평소 즐겨 쓰는 ‘냅다 쳐들어가기’ 기법(국내의 많은 ‘폭로 저널리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로 그 기법)을 적용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납 수돗물 한 잔 들고 시청에 쳐들어가 시장 면담을 요구하는 그의 예견된 기습에 플린트시 공보담당자는 나름 상당히 미끌미끌하게 대처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이클 무어가 이 ‘그렇게 안전하다면, 좋아, 그럼 당신도 한번 마셔봐’를 오바마에게도 간접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시다시피 여기엔 매복 따위의 수고도 필요 없었다. 그것은 오바마 자신이 셀프로 실행한 ‘그래? 그럼 내가 한번 마셔볼게’에서의 가식을 그냥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무늬만 민주주의에 기대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에서 공화당 주류와 민주당 주류(자유주의 기득권자들)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마이클 무어는 거의 30년 만에 마침내! 드러내놓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름만 짜낸다고 병세가 나아질까?
그의 영화 속에서 마이클 무어의 목소리는 언제나 절박했다. 가장 말랑말랑한 축에 속했던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도 그랬다. ‘여성지도자로 세계평화’라는, 극도로 단순화된 이론을 급조해 힐러리 당선을 지원했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화씨 11/9>의 절박함은 이전과 사뭇 달라 보인다. 그의 절박함은 그로 하여금 오랫동안 확인시키고 지켜왔던 전선까지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전선을 긋도록 하고 있다.
그 절박함은 트럼프로 현실이 되고 있는(또는 그렇다고 마이클 무어가 주장하는) 파시즘에 대한 예감이 낳은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언제나처럼 직격으로 현재 트럼프의 미국과 나치가 발흥한 1930년대의 독일을 그대로 겹쳐놓고 있다. 정적(특히 독일공산당) 제거와 의회 완전장악을(사실상 해체를) 위해 괴벨스가 기획한 나치의 자작극임이 거의 확실한 1933년 2월27일의 독일 국회(라이히스타크) 의사당 화재를 9/11 사태와 나란히 놓는 것을 시작으로, 영화는 트럼프 집권과 그 이후의 변화들을 조목조목 나치 독일과 비교하고 있는데, 그 하이라이트는 단연 히틀러의 연설 영상에 트럼프의 음성을 얹어놓은 대목이다.
이 장면이 주는 영화적 통쾌함과 섬뜩한 코믹함, 그리고 역시나 마이클 무어는 대단한 재담가이자 연기자이자 연출가라는 생각 위에 겹쳐드는 것은, 마이클 무어의 영화에서 항상 모락모락 피어나는 위태로운 냄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아시다시피 그 역시 티브이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다)은 2004년 칸영화제 <화씨 9/11> 상영장을 지배하던 ‘조지 부시 야유’의 달뜬 분위기를 목도한 뒤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공격하는 작품을 만들어, 잠깐 동안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고작 제작자의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짜 적은, 이러한 존재를 허용하고 지지한 이 나라의 6할에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고이즈미적인 것’이고, 그 병소를 공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만을 찔러 짜낸대도 병세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걷는 듯 천천히>에서)
갈수록 기득권자들의 첩첩성벽이 되어가고 있는 현 정치 시스템에 대항해 국민들이 직접 행동함으로써 기득권자들(공화든 민주든, 좌든 우든)이 국민들을 무서워하게 해야 한다는 마이클 무어의 주장에는 백배 천배 공감이다. 하지만 그 주장을 위해 다스베이더적 절대악을 설정하고 그것을 ‘나’의 영역에서 쫓아내 타자화시킨다면, 결국 그것은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한 ‘나 안의 무엇’을 방치하는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자기성찰이라는 더디고 성가시고 인기 없는 단어를 급하고 절박한 때일수록 곱씹어야 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대한민국에서든, 어디에서든.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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