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주인공 크리스틴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 새크라멘토, 부모, 자신의 이름을 싫어한다. 평범하기 때문이다. 평소 동경해왔던 미국의 동부 대도시로 탈출을 꿈꾸며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레이디 버드’라 짓는다. 사진 유피아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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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레이디 버드>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주인공 크리스틴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 새크라멘토, 부모, 자신의 이름을 싫어한다. 평범하기 때문이다. 평소 동경해왔던 미국의 동부 대도시로 탈출을 꿈꾸며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레이디 버드’라 짓는다. 사진 유피아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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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에서 탈출 꿈꾸는 주인공
스스로 ‘레이디 버드’라 이름 짓고
미 동부 대학 원서 내다 엄마와 갈등 새크라멘토 배경의 변두리 청춘물
도시를 주인공 삼았던 우디 앨런처럼
새크라멘토는 또 다른 뮤즈시티
작위적인 의도 없는 담담한 연출 빛나 그렇다. 이름. 레이디 버드가 벗어나고 싶은 새장은 고향 새크라멘토만이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이름을 준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엄마는 레이디 버드를 형편에 넘치는 사립학교에 보내느라 뛰는 2교대 간호사 근무에 지쳐 “나도 이 집에서 25년이나 살게 될 줄은 몰랐다”고 푸념한다. 아빠는 직장을 잃고 레이디 버드의 부자 친구들의 아빠 중 한 명에게 고용될지도 모르는 처지가 된다. 무엇보다 그는 그의 강한 고집의 원천인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영화 내내 사사건건 삐걱거리는 모녀의 대화(난 작가들이 숲속에서 사는 그런 곳에 가고 싶어 vs 내가 어쩌다 이런 속물을 키웠나, 그 드레스 너무 꽃분홍 아니니? vs 그냥 예쁘다고 해주면 안 돼? 등)를 통해 수시로 그 까칠한 피부를 드러낸다. 아무리 주인공이지만 저건 좀 심하긴 했다 싶은 도발로 정학을 당한 레이디 버드가 “너를 키우는 데 얼마나 드는지는 아니?”라는 엄마의 한소리에 받아치는 독설을 보자. “숫자 적어줘. 얼마 드는지. 내가 커서 부자가 되면 그 돈 다 갚아줄게. 그리고는 다시는 안 볼 거니까.” 물론 이 독설을 그냥 들어 넘기기만 할 엄마도 아니지만. 그렇게 레이디 버드는 자신의 양발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발판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발버둥은 초라한 듯 화려하고 일상적인 듯 독특한 고교 졸업반 생활 사이에 부속 삽화처럼 던져질 뿐이다. 거기에는 남자친구라는 미해결 난제, 시시한 첫 섹스, 부유함에 대한 선망, 절친과의 틀어짐, 거짓말, 그리고 특별한 졸업 댄스파티 등 이른바 아메리칸 청춘물의 전형적 요소들이 두루 포함돼 있다. 모녀 역시 서로에게 마냥 피곤한 존재로만 그려지진 않는다. 엄마는 운전 중 소설 <분노의 포도>의 오디오북을 들으며 딸과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딸은 엄마를 험담하는 남자친구에게 앞뒤 맥락은 전혀 없지만 아무튼 효과만큼은 확실한 반격을 날린다. 엄마는 남자친구에게 상심한 딸의 마음을 달래주려 ‘둘만의 특별한 일요일 이벤트’를 제안한다. 그런 식이다. 레이디 버드의 모녀는 어떤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기획된 모녀가 아니다. 머나먼 새크라멘토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모녀도 아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는, 심지어 이곳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녀의 모습이다. 이렇게 창작자의 의도나 미적 독창성을 알아줄 것을 목 놓아 호소하지 않는, 담담하고 자연스러운 어법이야말로 데뷔작으로서의 <레이디 버드>가 보여준 가장 탁월한 점이다. 그레타 거윅이 이미 배우와 각본가로서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뭔가를 보여주려는’ 설익은 자의식을 드러내지 않는 거윅의 현명함은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꼬리 늘이기를 용납하지 않는 편집에서 가장 빛나고 있다. 그럼에도 몇 장면에서의 보이스오버(뒤에 나올 컷의 사운드를 살짝 미리 당겨 오기)가 영화를 보는 잔재미를 더한다. 예컨대 레이디 버드가 동부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넣으려 우체국으로 달려가는 장면에 새해 카운트다운 소리를 당겨 오는 장면이 그렇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잔재미만이 아니다. <레이디 버드>의 편집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아름다운(아름다워야만 하는!) 대목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쇼트를 연상시킬 만큼 눈높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이 영화의 일상적인 앵글, 그중에서도 새크라멘토라는 곳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달리는 차창 쇼트’는 이 영화의 사려 깊은 편집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복사열을 발한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그런 열기로, 희미하지만 사라질 것 같지는 않은 빛의 온기로 이 쉽지만은 않은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다. 신인 감독, 새크라멘토에 색채를 입히다 만일 영화가 이 정서적 하이라이트에서 마무리되었더라면 <레이디 버드>는 ‘비교적 잘 만든 청춘물, 그만하면 꽤 훌륭한 데뷔작’에서 멈췄을 것이다. 또는 거윅의 재치와 감상 실린 작은 자서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이어지는 새로운 공간에서의 레이디 버드의 모습은 이 영화가 결국 무엇에 대한 영화였는지, 그리고 어떤 영화였는지를 드러내는 심장이 된다. 그것은 도입부의 인용구를 빌려준 조앤 디디언과 마찬가지로, 새크라멘토 출신으로서 뉴욕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이제는 ‘21세기 뉴욕’에 새로운 색채를 입히는 존재 중 한 명이 된 거윅이 자신의 뿌리를 향해 보내는 존경이자 찬사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영화를 통해 그 존경과 찬사를 나눠 가질 수 있게 됐다. 거윅은 이후로도 새크라멘토를 배경으로 한 영화 몇 편을 더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모쪼록 거윅에게 새크라멘토가 영화감독 우디 앨런의 뉴욕과 같은 뮤즈시티가 되길 바란다. 그 영화들이 새크라멘토 같은 ‘변두리’에도 공들여서 이야기할 만한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변두리 밖 우주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우주에 변두리 같은 것은 없음을 드러내주길 아울러 기대한다.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무언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근거일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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