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02 10:12
수정 : 2017.12.0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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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한 장면. 1974년도에 제작된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을 다시 제작했다. 한겨울, 아름다운 설원을 뚫고 달리는 증기기관차의 매력은 4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20세기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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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1%%] [토요판]한동원의 영화 감별사 오리엔트 특급 살인
1974년 제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43년 후 감독 브래나가 재연출
원작에는 없던 시지(CG) 도입돼
실감나는 눈사태 장면, 보는 재미
설원 배경과 어울리는 연말 개봉에
조니 뎁 등 명배우들 총출동했으나
원작과 별 차이 없는 고전적 연출
다소 밍밍한 이야기 전개 아쉬워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 <개 같은 날의 오후>, <허공에의 질주>, <폴 뉴먼의 심판> 같은 걸작들을 연출한 시드니 루멧 감독. 그의 1995년 저서 <영화 만들기>(Making Movies)에는, 그가 연출했던 1974년 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촬영에서 느껴야 했던 긴장과 압박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이스탄불역을 출발하는 장면을 언급했는데, 촬영 조건은 이랬다. ①객차 6량이 달린 진짜(!) 증기기관차가 브뤼셀에서 조립돼 파리 외곽의 거대한 차고에 세워진 이스탄불역 세트에 도착해 있다. ②출연진 중 네 명(잉그리드 버그만, 버네사 레드그레이브, 엘버트 피니, 존 길구드)이 런던에서 연극에 출연하고 있는 관계로, 촬영이 있는 토요일 아침에야 현장에 도착하고, 월요일에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야 한다. ③낮 촬영은 불가능하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살려야 하는데, 기차가 사라지는 곳 너머로 ‘현대’적인 파리의 전경이 보이기 때문이다(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35년). ④일요일 아침 8시까지는 차고를 비워주기로 프랑스 철도청과 약속이 되어 있다. 촬영은 오로지 토요일 밤에서 일요일 새벽에만 가능하다. ⑤조명 설치 작업으로 리허설은 불가능하고, 조명 설치는 일요일 새벽 4시30분에야 겨우 끝난다. ⑥그날의 일출시간은 5시10분. 즉, 촬영에 주어진 시간은 40분뿐. ⑦촬영장에는 약 300명의 보조출연자들이 촬영을 대기하고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 원작이라는 ‘빛나는’ 태생
이 상황에서 카메라는 카메라를 향해 달려오는 기차를 촬영하다가 팬(pan)하여 네번째 객차의 옆면에 새겨진 철도회사의 금장 로고를 클로즈업한 뒤 2미터 정도를 상승해 열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담아야 한다. 단 한 번에.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이미 말했듯 주어진 시간은 40분뿐이고, 그 시간 안에 기차를 다시 제자리에 되돌려놓는 건 불가능하다.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 엄혹한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촬영은 성공한다. 매우 매끄럽고 아름답게. 애석하게도 금장 로고가 카메라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을 때 그늘에 들어가는 바람에 감독의 의도처럼 빛나주지는 않았지만. 그린 스크린도, 퍼포먼스 캡처도, 드론 카메라도 없던 시절의 고생스럽고 아슬아슬하고도 멋들어진 장면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엿볼 수 있는 한 가지는 이 영화에서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원작이라는 빛나는 태생과 배우 로런 버콜부터 숀 코너리까지 아우르는 화려한 캐스팅 못지않게 기차 자체가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에서 증기기관차와 이스탄불부터 칼레까지를 잇는 사흘간의 초호화 열차여행이라는 이야기는, 예컨대 <타이타닉>에서 타이타닉호와 미완성으로 기록된 대서양 횡단 여행만큼이나 핵심적이다.
한겨울, 아름다운 설원을 뚫고 달리는 증기기관차의 모습이 자아내는 매력은 4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나 80년 전의 낭만이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라는 시기적 요소와 결합되면서 상승효과는 더욱 커진다. 그러니 원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을 새로 제작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43년 전과 마찬가지로 11월 셋째 주에 개봉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시다시피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영화로선 기본적으로 녹록지 않은 조건을 안고 들어간다. 일단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영화는 1974년 버전과 마찬가지로, 열차가 출발하기 전 도입부에서 예루살렘 통곡의 벽과 보스포루스 해협, 그리고 이스탄불의 아름다운 정경을 담으며 ‘관광’ 영화적 기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다. 특히 통곡의 벽 앞에서 대군중을 대동한 액션(이라고 하기엔 심하게 정적이긴 하다만)이라든지 이스탄불역 장면에서 떠들썩한 터키식 주방의 풍경 등의 ‘활달함’을 가세시키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시작될 기차여행에 대비해 관객의 눈을 풀어주려는 은밀한 배려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런 시각적 이완을 위한 노력은 기차의 출발 뒤에도 계속된다. 눈 쌓인 산을 가로지르며 달빛 푸르게 빛나는 계곡을 뚫고 달리는 열차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달리는 열차를 촬영하는 방법뿐이었던 1974년 버전에서는 불가능했던 시지(CG)기술의 도움을 받은 장면이다. 또한 원작에서는 ‘바람에 날려 쌓인 눈 더미’ 정도였으나 이 영화에서는 스펙터클의 정상에 서 있는 눈사태 장면은 물론이고 열차가 눈사태를 당해 멈춘 곳을 철교 한가운데로 설정하는 등 시각적인 긴장감을 주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심지어 기차가 멈춰 선 철교를 이용해 나름 소정의 추격 액션을 선보이기도 하고, 명탐정 푸아로가 승객들(무려 13명)의 진술을 청취하는 장소를 선로 변에 마련된 야외테이블(왜 굳이 그 추운 곳이어야 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지만)이나 화물칸 등으로 바꾸는 등 시각적 다양성을 확보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공간의 제약이 지루함이나 답답함의 동의어는 결코 아닐 것이다. 수많은 영화가 증명했듯, 한정된 공간은 오히려 긴박감 극대화와 아기자기한 두뇌게임을 위한 최적의 조건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그를 다루는 방식이 결국 이 영화의 핵심 승부처가 될 것인데 여기에서 두번째 녹록잖은 조건이 등장한다. 이 영화의 원작이 매우 고전적인 추리 미스터리라는 점이다. 즉 명확한 범행 동기와 물증, 객관적 관찰에 철저히 입각한 논리적 추리가 지배하는 세계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난 원래 그래’, ‘내 마음 나도 몰라’ 또는 ‘그냥’이 미스터리 스릴러물의 범죄동기의 대세를 이룬 지 오래인 2017년 현재, 애거사 크리스티의 논리적, 심리 정합적 세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것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가장 궁금할 대목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영화는 서두부터 “이 범죄가 누구에게 득이 되는가?”가 추리의 기본이라고 못박는 푸아로의 대사를 통해 자신의 원칙을 명백하게 밝힌다. ‘원작 그대로’라는 단순하고도 과감한 원칙을.
눈은 즐겁지만, 예상되는 ‘뻔한’ 미스터리
사실 이는 영화를 보기 전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주연 겸 감독인 케네스 브래나가 1994년 연출한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보면 말이다. 이 작품 역시 원작의 기본 틀에서 벗어나거나 현대식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이번 영화도, 감독 가이 리치의 <셜록 홈즈>처럼 재건축 수준의 변화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원작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은 케네스 브래나가 명탐정 푸아로를 연기했다는 점이다. 1974년 버전에서 배우 엘버트 피니가 원작에 충실하게 구현했던 ‘거대한 콧수염을 기른, 계란형 두상의 우습게 생긴 작은 벨기에인’의 모습은 이번 신작에선 상당히 풍채 당당하고 핸섬한 신사로 변모해 있다. 그 결과 영화는 필연적으로 고전미로 승부를 거는 식으로 표현된다. 이를테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원작이 제시하는 사건과 단서, 그리고 진술들을 충실히 담으려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혹시나 올지 모를 속도감 저하를 부감촬영, 돌발액션, 플래시백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돌파하며, 오리엔트 열차 앞을 가로막은 눈 더미만큼이나 묵지근한 전개를 헤쳐 나간다. 물론 여기에는 배우 조니 뎁, 주디 덴치, 미셸 파이퍼, 페넬로페 크루스, 윌럼 더포, 데이지 리들리 등을 포함하는 쟁쟁한 캐스팅, 그리고 1974년 버전 못지않게 오리엔트 특급의 화려함과 우아함을 꼼꼼하게 구현해낸 미술과 의상의 도움도 있다. 더하여 ‘균형’과 ‘정답’에 대한 푸아로의 굳건한 믿음,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가 빠져야 했던 딜레마에 대한 적극적인 부각도 힘을 보탠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해 보인다. 그것은 케네스 브래나 특유의 인공미 가득한 연극적 연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전제와 그것이 건드리는 딜레마 자체가 우리에겐 너무 순진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독하게 뒤틀린 갖가지 기상천외한 악행과 그에 못지않은 복수극이 난무하는 영화에 길들여진 지 오래인 우리의 눈에는 말이다. 그런 우리의 상상을 언제나 가볍게 초월하는 현실세계와 비교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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