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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04 10:31 수정 : 2017.11.04 11:52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 감별사
<내 친구 정일우>

25세의 나이에 한국으로 건너와
30년간 철학 교수로, 사제의 삶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
회의감 느껴 판자촌, 철거민 마을로

빈민운동가 활동하며 빨갱이 딱지도
1994년부터는 농부로, 텃밭 일구며
낮은 이들 보살피는 헌신적 노력
푸른 눈동자 안에서 발견한 ‘인간성’

영화 <내 친구 정일우>의 한 장면. 그는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면 저나 여러분이 덕을 볼 건데 왜 그 싸움을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맡겨버리나요?”라고 묻는다. 사진 푸른영상
‘독립영화’라는 단어는 이제 전혀 낯설지 않은 단어다. 그런데 ‘그 독립은 대체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점점 낯설고 모호해지고 있다. 뭐, 이 자리에서 ‘독립영화는 무엇인가?’ 같은 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독립영화가 상업영화로의 진입을 위한 환승 절차로 인지되고 있다.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고 그에 비해 파급력은 강한(이른바 ‘가성비’가 좋은) 미디어 전략을 일컫기 위한 단어 정도로 이해되고 또 사용되고 있는 지금, 영화라는 단어 앞에 붙은 독립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더욱 희미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독립영화를 정의해낼 수 있다. 거의 사전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말이다. 김동원 감독과 다큐공동체 ‘푸른영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김동원 감독과 ‘푸른영상’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한다면 책 한 권은 족히 나올 것인데, 그건 이 칼럼의 팔 길이를 훌쩍 벗어나는 일일 것이므로 이쯤에서 접는다고 해도 <내 친구 정일우>라는 영화 또한 이 칼럼의 팔 길이는 한참이나 부족하다. 왜 아니겠는가. 김동원 감독이 미국에서 온 예수회 신부인 정일우 신부(본명 ‘데일리 존 빈센트’)를 만난 것은 1988년. 그 뒤로 이 영화가 그와 함께 담은 시간은 30년이다.

‘우리 동네 외국인 신부님’의 30년

무려 30년. 하지만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그 30년간 정일우 신부가 거쳐온 삶의 궤적에 대한 요약만으로도 우리는 간단히 압도된다. 1960년, 스물다섯살의 그는 한국에 와서 철학을 가르치던 젊은 외국인 교수님이었다.

1년 후 사제가 되어 다시 한국에 돌아온 그는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며 신부님이자 교수님이 된다. 7년 뒤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며 강한 회의감을 느끼고 당시 판잣집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던 청계천으로 들어간다. 교수님 직함은 자연스럽게 버려지고, 그 자리에 ‘우리 동네 외국인 신부님’ 또는 ‘동네 신부님’의 직함이 대신 자리잡는다.

이후 그의 삶은 줄곧 그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속에서의 삶이었다. 양평동 판자촌, 양평동 철거민들의 이주마을인 ‘복음자리’, ‘한독주택’, ‘목화마을’ 건립, 목동·상계동 철거촌이 삶의 공간이 된다.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빈민운동가, 막사이사이상 수상자, 이런 위원회장 저런 원장 어떤 지구장 같은 직함이 붙게 된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여기에는 빨갱이, 첩자, 소련 스파이 같은 딱지도 언제나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따라붙는다. 언제나처럼.)

1994년부터 그는 충북 괴산으로 내려가 농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미국 일리노이, 그의 고향집 앞마당 크기도 안 되는 작은 농장에서. 농약은 “논밭의 생명, 뿌리는 농부, 먹는 사람 모두를 죽”이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던 우렁이농법 같은 유기농법을 실제로 시도한다. 그러면서 ‘농부들은 돈을 못 벌고 그 주위에 붙어 있는 업자들만 돈을 버는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도 쉬지 않는다. 이제는 헛간으로 변해버린 허름한 농가의 단칸방에서 생활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정일우 신부의 삶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삶이다. 남들보다 누리지 못함을 한탄하고, 남들보다 힘없음을 두려워하고, 남들보다 가지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보통의 우리들에게는. 그리하여 우리는 정일우 신부의 놀라운 삶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런 분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에도 벅찬 우리는…’이라는 탄식에, 영화는 정일우 신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답한다. “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면 저나 여러분이 덕을 볼 건데 왜 그 싸움을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맡겨버리나요. 너무하잖아요. 저나 여러분들, 너무하지 않으냐는 얘기예요.” 이에 대해 ‘그래, 그 말씀이야 지극히 지당하지만. 그렇지만…’이라고 소리 없이 웅얼거리는 우리를 <내 친구 정일우>는 윽박지르거나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정일우 신부의 삶 뒤에 압도적인 후광 조명을 치지도, 몇만 제곱미터의 멋들어진 세트를 세워 올리지도, 숭고한 권위가 절로 발산되는 의상을 입히지도,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의 레드카펫을 깔아 넣지도 않는다.

이 영화에서 정일우 신부는 흙 묻은 점퍼에 비료회사 이름이 박힌 캡에 추리닝을 걸친 채 한국 사람보다 더 구수하고 자연스럽게 “아이고, 한잔 해야지” 하며 낮술을 찾고, 털 달린 까만 고무신을 끌면서 추리닝 바람으로 판자촌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동네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자신의 숙소를 거의 음주 아지트로 만들어버린 동네 청년들과 매일같이 술을 마시면서 실없는 장난을 치고, 새벽같이 들이닥친 포클레인으로 한순간에 집을 잃고 천막에서 생활하는 철거민들과 고스톱을 치면서 다투기도 하고, 마이크를 쥐면 한국 사람보다 구수하게 뽕짝을 내지르기도 한다.

그를 바라보는 소박하고 인간적인 시선 안에서 그와 삶의 궤적을 함께했던 ‘유명인’들도 예외 없이 사람이다. 마을 공터에서 열린 정일우 신부의 회갑잔치에 온 김수환 추기경은 “나도 회갑잔치를 안 했는데 무슨 염치로 회갑잔치를?”이라고 농을 건네고, 평생친구 제정구 의원은 정일우 신부와 나란히 웃통을 벗어젖힌 채 카메라를 보고 무방비 비무장의 웃음을 던진다.

영화 역시 그런 정일우 신부를 그대로 닮아 있다. 예컨대 영화는 정일우 신부의 일상을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있는데, 그들의 이름이나 직함 같은 것은 전혀 알리지 않는다. 그것은 정일우 신부의 삶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네 명의 내레이터들(여기에는 김동원 감독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이 차례로 등장할 때 역시도 마찬가지다. <내 친구 정일우>의 내레이터는 신부의 삶이 큰 변곡점을 만날 때마다 그에 맞춰 바뀌는데, 영화는 내레이터들의 이름조차 적지 않는다. 계속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이어갈 뿐이다. 흡사 정일우 신부의 별명인 ‘능구(렁이)’처럼.

이 영화에서 자막이 사용되는 곳은 타이틀과 크레딧, 외국어 번역, 그리고 출연자들의 음성이 뚜렷하게 들리지 않을 때뿐인데, 덕분에 <내 친구 정일우>의 인터뷰이들과 관객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수 있다. 관객은 인터뷰이 밑에 붙은 이름과 직함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들을 만나고 이해한다. 사회적인 지위나 직함 같은 것이 불러내는 선입견이 끼어들 틈은 사라진다.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사려 깊음은 영화 곳곳에 스며 있다. 나아가 영화는 정일우 신부가 성큼 걸어 들어갔던 가난뱅이의 삶이 단지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음을 애써 가리거나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욕하고 의심하고 서로 싸우고 깨지고 흩어지고 그리하여 결국 그런 시간을 잊고 싶은 과거로 밀쳐버리는 사람들의 모습, 즉 우리 모두의 모습을 굳이 표백 필터로 걸러내지 않는다. 영화는 “가난한 동네는 다 사라졌고 가난은 더 무섭고 부끄러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부님은 여전히 ‘가난뱅이들’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고 계신가요. 상처받은 이들이 앞장서 싸워야만 하는 이 현실은 과연 끝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으로, 우리의 현재, 초고층빌딩이 드리운 긴 그림자만큼이나 길고 깊어지는 가난의 골을 탄식한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울림을 깊게 만드는 것은, 정일우 신부의 인간적이고 비공중파스러운 모습들뿐만이 아니라 그런 그가 사랑했고 지키려 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담는 데 시선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철거민 이주 마을의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공터(또는 광장)에서 열리는 떠들썩한 마을잔치와 춤추는 마을사람들에 섞여 한복을 입은 채 북을 들고 풍물을 치는 정일우 신부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볼이 빨갛게 상기된 채 부동의 자세로 카메라 앞에 선 동네 아이들 사이에 섞인 사진 속 정일우 신부의 모습. 그것에서 우리는 관공서나 이익집단이 구호나 문건에 갇혀 뻣뻣한 가죽만 남은 ‘공동체’라는 말의 살아 있는 실물을 본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웃’이라는 단어에서만 나오는 원적외선의 온기를 느낀다. 그 온기는 이런 타워 저런 캐슬 어떤 카운티의 꼭대기 쪽만 올려다보느라 사후경직 같은 마비가 와버린 우리의 목과 온몸을 부드럽게 마사지해준다. 그 뻣뻣하게 굳어진 경직에서 벗어나 한번쯤 고개를 풀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의 시선보다 낮은 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곳에는 세상 모든 빛들을 튕겨내는 강화유리의 매끈하고 차가운 광택 대신 사람이 있다. 인생살이의 고달픔을 그대로 새겨 넣은 듯 거뭇하고 울퉁불퉁한 얼굴들, 즉 우리 모두의 얼굴이 그곳에 있다. <내 친구 정일우>라는 작은 거울에 비치는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기에,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던 곳에서 저도 모르게 밀려 올라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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