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드 리버>
영화는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으며 몸을 기대고 있는 문명세계의 게임의 룰의 위태로움을 새삼 일깨움과 동시에, 우리가 막연한 낭만을 품은 채 동경하는 야생의 날카로운 발톱을 그대로 보여준다. 유로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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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밭에서 시체로 발견된 소녀
살인 늑대 쫓는 사냥꾼과 FBI
일상의 단서로 풀어가는 스릴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영화는 뭔가에 쫓기는 듯 허허벌판을 달리는 소녀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시간은 한밤중. 벌판은 모두 눈으로 덮여 있고 소녀는 맨발이다. 입김이 뱉은 그대로 얼어붙을 듯한 추위와 어둠을 뚫고 달리던 소녀는 생명의 흔적이라곤 자신의 발자국뿐인 눈밭 위에 쓰러진다. 그리고 다시 달린다. 운명의 냉정한 눈알 같은 보름달만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은 눈밭 위의 양떼. 굶주린 늑대들이 그 양떼를 포위한 채 응시하고 있다. 언제 공격이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을 때,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늑대들은 하나씩 눈밭에 나동그라진다. 그리고 잡목 사이에서 흰색 위장복을 입은 사냥꾼 겸 야생보호구역 경비원 ‘코리’(제러미 레너)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상징치곤 너무 노골적인 이 도입부가 말하는 것은 명확하다. 주인공 코리는 늑대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수호자다. 이는 아예 영화의 대사로 천명되고 있다. 눈밭을 달리던 소녀는 결국 피를 토한 채 얼어붙은 시체로 발견된다. 코리는 오랜 이웃이자 친구인 소녀의 아버지(길 버밍엄)를 찾아가 위로한다. 코리가 떠날 때 “어쩔 생각이야?”라는 소녀 아버지의 질문에 코리는 “사냥꾼이 사냥 말고 뭘 하겠어요?”라는 짤막한 답을 돌려준다. 즉, 이 영화는 한 소녀를 죽게 만든 늑대를 사냥하는 사냥꾼의 이야기다. 그런 이유로,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의문은 많지 않다. 이는 크게 다음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①양을(즉 죽은 소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늑대는 누구인가, ②코리가 그 늑대를 사냥하는 일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는 이 의문들을 따라가는 캐릭터를 곧장 투입한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햇병아리 에프비아이(FBI) 요원 ‘제인 배너’(엘리자베스 올슨)의 근무지는 라스베이거스. 더구나 출신지는 플로리다. 즉, 그녀는 와이오밍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곳의 추위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 즉 우리 관객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에 놓인 인물이다. 그녀는 말 그대로 ‘투입’된 것이다. 배너 요원이 ‘윈드 리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얇은 에프비아이 점퍼를 벗고 스노 슈트를 빌려 갈아입는 일이다. 아마 눈썰미 있는 관객이라면 그 스노 슈트가 주인공 코리의 딸이 입던 옷이라는 걸 슬쩍 보여주는 사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배너 요원을 바라보는 주인공 코리의 시선을. 비록 <시카리오>의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처럼 “당신은 내 죽은 딸을 생각나게 해요”라는 대사를 던지지는 않지만, 그 시선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 순간 둘은 이미 팀이 된 것이다. 자, 이렇게 되면 영화는 영락없이 감독인 테일러 셰리던의 말처럼 ‘시에스아이(CSI): 와이오밍’의 형국을 취하는 듯하다. 또는 ‘와이오밍판 <양들의 침묵>’의 색채를 띠는 것 같기도 한다. (예컨대 동네 ‘약쟁이’ 청년들의 아지트에 진입해 수색하는 장면에서의 제인의 모습은 다분히 ‘버펄로 빌’의 집에 혈혈단신으로 진입한 ‘스털링’(조디 포스터)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들과 다른 점은 <윈드 리버>가 에프비아이 요원이 아니라 철저히 토박이 사냥꾼 코리의 시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배너 요원의 시점을 따를 때마저도, 상황은 언제나 화면 밖에 있는 코리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가 이 사건에 깊숙이 발을 담그는 이유, 즉 ②번 의문에 대한 해답은 영화가 한 시간쯤 경과된 시점에 배너 요원에게 코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낱낱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해답에서 놀랍다든지 의외라든지 하는 구석은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이전까지 영화가 잽처럼 던지던 힌트들에 의해 대략 짐작되던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영화는 소용돌이의 중심부인 ①번 의문으로 지체 없이 진입한다. 그런데 그 방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다. 그곳에서 발견되는 결정적인 실마리 또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던져지고 있다. 서스펜스 압출용 음악이나 효과음도, 긴박한 클로즈업이나 슬로 모션 같은 것도 없다. 그저 일상적인 상황, 그저 일상적인 분위기에서 튀어나온 한두 개의 실마리가 어느새 영화를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당겨놓고 있다. 간결한 대사와 냉정한 묘사로
변경에서 힘을 잃은 법의 실체와
문명 세계가 품은 ‘발톱’ 드러내
시카리오’ 테일러 셰리던 연출 다른 여러 대목들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대목이 테일러 셰리던의 연출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감독 데뷔’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뭔가를 보여주자’ 강박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절제는, 그의 두 편의 전작이 다른 감독들의 연출에 의해 그야말로 ‘할리우드 전설’이 될 정도의 격렬한 관심과 찬사를 얻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쉽지 않아 보인다. 하긴, 그가 20년간 영화판에 몸담아온 베테랑 배우이기도 한 점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긴 한다만, 그럼에도. 아무튼 그 장력 드높은 긴장 상황의 한가운데에서 영화는 소녀의 죽음에 얽힌 의문, 즉 ①번 의문의 실체로 진입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플래시백을 통해서다. 그것이 등장하는 타이밍은 상당히 적절하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는 짐승’에 대한 냉정한 묘사는 역시나 힘이 있다. 하지만 그 내용 자체는 ②번 의문과 마찬가지로 크게 놀랍지는 않다. 적어도 ‘전혀 짐작하지도 못했던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짐작하셨겠지만 이 영화가 노리는 것은 반전효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영화는 자신이 던진 의문들에 대한 단서들을 굳이 감추지 않아왔다. 의문들은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견인 로프일 뿐 목적지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걸까. 이 영화의 결말? 아니나 다를까 코리의 손에 의해 실현되는 이 영화의 탈리오 법칙(‘눈에는 눈, 이에는 이’)은 상당히 영리하게 계산되고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끝도 없이 드리운 비탄과 절망의 회색 구름에 비쳐드는 한 줄기 햇빛처럼 관객들에게 쾌감을 안길 만하다. 하지만 그 탈리오 복수극에는 이미 비슷한 지점을 수도 없이 많이 거쳐 간 다른 영화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다. 물론 따뜻한 아버지와 냉정한 사냥꾼의 모습을 아무 모순 없이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제러미 레너의 연기, 그리고 비탄에 빠진 ‘인디언’ 아버지 길 버밍엄, 그리고 그레이엄 그린의 존재감과 연기도 이 여정에서 만나는 큰 즐거움이다.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해지는 대사들은 간결하고 담담하며 아름답다. 죽은 소녀뿐 아니라 죽어버린 땅(‘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과 죽어버린 종족(북미대륙 원주민)에 대한 진혼인 듯 울리는 닉 케이브, 워런 엘리스의 음악 역시 빼놓을 수 없겠다. 이들은 테일러 셰리던이 말하는 “다른 사람에게 연출을 맡겨서는 절대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을 훌륭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이 영화는 한 소녀를 죽게 만든 늑대를 사냥하는 사냥꾼의 이야기다. 유로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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