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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19 09:25 수정 : 2017.08.19 09:41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인간과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유인원 ‘시저'는 인간에 의해 가족을 잃고 분노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종의 절멸을 막기 위한
인간과 유인원의 한판 승부
‘월남전’ 연상되는 전투 장면

전편보다 발전된 CG 기술로
유인원의 내면을 잘 그려내
액션보다는 서사가 강렬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인간과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유인원 ‘시저'는 인간에 의해 가족을 잃고 분노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혹성탈출: 종의 전쟁>

21세기 <혹성탈출>의 첫 편인 <진화의 시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선한 동기’라는 대목이 아니었을까 한다. 제약회사 연구원인 ‘윌’(제임스 프랭코)은 어미 잃은 아기 침팬지를 몰래 데려다 키우고, 돌봐주고, 사랑해준다. 그가 ‘파멸의 물질’을 만들어내게 된 동기 또한 치매에 걸리신 아버지에게 정상적인 삶을 되돌려주기 위한 열망이었다. 인류의 파멸을 불러온 것은 다름 아닌 ‘선한’ 사람의 ‘선한’ 동기였다.

2편 <반격의 서막>에서도 문제의 출발점은 ‘선한 동기’다. 하지만 2편에서의 ‘선한 동기’는 흥미보다는 진부함의 원인이 됐다. 총을 버리지 못한 채, 오히려 그것을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인간들에게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한’ 것이었다 한들) 전기라는 날개까지 달아주려던 ‘시저’(앤디 서키스+웨타 디지털)의 선택은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았다. 그 대목에서 초기 이주 백인들의 정착을 도왔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맞이하게 된 비극적 운명을 떠올렸던 것이 필자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여 산더미처럼 쌓인 인간들의 살상무기들을 목격한 뒤 전쟁을 주장했던 ‘코바’에게 훨씬 더 수긍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더랬다. 그의 의견을 묵살하고 윽박지르던 ‘시저’의 처사가 독선을 넘어 거의 독재에 가깝게 보였던 것 또한.

유인원의 묵시록(Apecalypse Now)

3편 <종의 전쟁>은 ‘선한 동기’라는 면에서 앞의 두 편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3편에서는 ‘선한 동기’ 같은 것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앞잡이로 전락해버린 ‘반역자 유인원’들의 길안내를 받으며 유인원들의 본거지를 치러 가는 인간 군대, 그리고 그들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는 유인원 군대의 충돌을 보여주는 도입부에서, 2편의 시저가 외치던 ‘평화’나 1편의 윌이 보여주던 ‘선의’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거추장스럽고 낯간지러운 감상은 이제 그만 됐다는 듯, 유인원 인간 양측 모두에게는 오로지 자기 종의 절멸을 막기 위한 의지만 남아 있다.

그리고 ‘선의’가 빠진 빈자리에는, 1편과 2편에는 없었던 새로운 요소들이 들어와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월남전이라는 모티브다. 도입부 군인들이 숨죽이며 잠입해 들어가는 원시림부터 그렇거니와, 그들의 철모에 흰색으로 갈겨 써진 낙서들은, 과거 <풀 메탈 자켓>의 포스터로 쓰였을 만큼 월남전의 상징이다. 아니, 이런 얘기를 할 것도 없이 영화는 중후반쯤에 이르러 아예 ‘유인원의 묵시록’(Apecalypse Now)이라는 벽 낙서를 등장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러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이 영화가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위대한 걸작에 대한 존경을 바치고 있음은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도입부, 유인원들의 공격에 포위된 젊은 군인이 유언 삼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죽어서 죄송합니다”라는 교신을 보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거의 종교에 가까운 절대 충성을 바치는 지도자의 존재를 설정한 것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곧 얼굴 가득 위장무늬를 칠한 채 등장한 그의 얼굴 클로즈업은 <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말런 브랜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대령’이라는 호칭뿐인 이 인물과 커츠 대령의 공통점은 그를 연기하는 우디 해럴슨의 ‘맨들머리’만이 아니다. 광기 어린 비장함과 카리스마로 자신의 작은 왕국을 지배하면서, 그것을 포위한 거대한 외부의 위협에 직면한다는 설정은 커츠 대령으로부터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대령뿐이 아니다. <종의 전쟁>에서 시저는, <지옥의 묵시록>의 ‘윌러드 대위’(마틴 신)와 마찬가지로 그를 암살하기 위해 그의 본거지를 향한 여행을 떠난다. (유인원들이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고, 폐허가 된 인간의 흔적은 다분히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황량함을 품은 덕분에 그 여행에는 웨스턴의 색채 또한 상당히 가미되고 있다.) 덕분에 영화는 중반부까지 일종의 로드무비의 모습을 취하게 되는데, 그 여행에 네명의 동행이 함께한다는 점까지도 <지옥의 묵시록>과 같다는 것은, 뭐, 우연이라고 치더라도, 그 여행의 끝에 도착한 대령의 본거지 앞에서 죽은 유인원들을 본보기 삼아 매단 나무기둥을 만나게 되는 설정까지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뼈대부터 디테일까지 요소요소 가져온 <지옥의 묵시록>의 디엔에이(DNA)는, 영화의 시각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저의 얼굴에 대부분 집중되는 클로즈업을 통해서 드러난다. 여기에서, 익히 잘 알고 매번 봐와서 이제는 그리 놀라지 않을 법도 하건만 또다시 새삼 감탄하게 되는 대목은, 그 클로즈업된 시저의 얼굴을 만들어낸 웨타 디지털의 컴퓨터그래픽(CG)이다. 1편과 2편을 통틀어 가장 깊이 들어갔던 클로즈업은 시저의 양쪽 눈을 화면 가득 줌인 했던 2편 엔딩이었는데, 3편에서는 단 한차례뿐이었던 그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거의 남발에 가깝다 싶을 정도로 자주 쓰고 있다. 그 기술적인 완성도는 아이맥스(IMAX) 화면으로 보아도 거의 시지임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인데, 그런 기술적인 뒷받침은 이 영화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시저의 내면’에 대한 묘사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면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스펙터클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면’이라고 했는가? 이 ‘대박’지향적 에스에프(SF) 액션대작에서? 그렇다. <종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종의 생존’이라는 대의와 사적인 분노 및 복수라는 두 상충되는 가치 사이에 낀 시저의 선택, 그리고 그의 내면을 따라가는 데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가 2편에서 손수 ‘사형 집행’을 한 코바의 망령을 꿈과 환각을 통해 만나면서 번민하는 장면이라든지, 복수라는 터널을 지나는 동안 자신 안의 ‘코바’적인 면을 깨닫게 되는 장면 등은, 2편의 시저가 보여줬던 독선적 꼰대스러움이 안긴 실망감을 만회해주기 충분하다.

최후의 심판은 대자연의 손에

그리고 거기에는 대령이라는 또 다른 축이 있다. 앞에서 대령의 비장함과 카리스마를 말했는데, 그것은 그것이 납득될 만한 사연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면 공허한 본의 아닌 코미디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는, 그의 카리스마가 알맹이 없는 큰형님 놀이가 아니었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분노와 증오에 찬 시저와 마주한 대령이 쏟아내는 그 나름의 사연, 그리고 <다크 나이트> 최고의 결정적 대사였던 조커의 “왜 그렇게 심각해?”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왜 그렇게 감상적이야?”라는 시저에 대한 질타는, 시저의 여정이 단순한 복수의 여정만은 아님을 드러내준다. 결국 시저와 대령의 대결은 인간과 유인원 두 종(種) 사이의 차.이.에 의한 것이었고, 덕분에 영화는 악의 축의 설정과 그를 통한 선악 대결이라는 식상한 대결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서로 거의 비슷한 일을 겪은 시저와 대령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종의 생존’이라는 사안에 대한 접근 경로의 다.름.으로 인해 충돌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종의 전쟁>은 선악구도에서 슬쩍 비켜난 입체적인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옥의 묵시록>의 껍데기에 장르적 충전물을 꾹꾹 채운 침팬지 인형인 것만은 아니다. ‘로드무비’의 형국이 마감되는 중반 이후부터 영화는 수용소 탈출물(또는 탈옥물)의 형국에 돌입한다. 이 대목에서 시저가 겪게 되는 수난과 그를 뛰어넘는 초인적(아니, 초유인원적) 활약이야 예정된 수순이었다 쳐도, (이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순수 악역’으로 남아 있던 반역자 고릴라가 보여주는 마지막 선택은, 서로 자신의 옳음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은 채 상대를 절멸시키기 위한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는 인간들의 어리석음 한가운데에서, 그 어리석음의 본질을 단번에 낱낱이 드러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최후의 심판의 역할을 맡는 대자연의 손을 통해 영화는 자신의 메시지를 완결 짓는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종의 전쟁>에서 유일하게 유인원들과 교감하고 유인원들의 편에 선 인간이었던 ‘노바’(어마이아 밀러)라는 소녀 캐릭터가, 새삼스런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인류의 가장 큰 자부심이자 존재 기반인 지능은 인류의 재앙인가? 지능을 버리는 것이 인류가 정화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일까? 그렇게, 여름철 블록버스터치고는 제법 가볍지 않은 질문을 남기면서, 시저는 마침내 생을 마감한다(여담이지만, 어쩐 일인지 그 모습은 이순신 장군의 최후와 많이 닮아 있다).

물론 <종의 전쟁>에는 2편만큼 화려화끈한 액션과 전투 신은 없다. 1편처럼 아기자기하면서도 참신한 전개도 없다. 하지만 3편에는 앞선 두 편을 아우르기에 충분한 카리스마가 있다. 하여 필자는 개인적으로, 시저가 그런 최후를 맞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긴다. 아무렴. 시저에게는 최소한 그 정도의 지성과 통찰은 주어져야 마땅했다.

시저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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