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파커의 ‘우리 동네’인 뉴욕 퀸스의 풍경은 일상적이고도 리얼한, 나아가 지저분하고 꾀죄죄하기까지 한 풍경 그대로다. 피터 파커는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은 상태에서도 잔스포츠의 배낭을 걸치고 있다. 소니픽처스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스파이더맨: 홈커밍>
피터 파커의 ‘우리 동네’인 뉴욕 퀸스의 풍경은 일상적이고도 리얼한, 나아가 지저분하고 꾀죄죄하기까지 한 풍경 그대로다. 피터 파커는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은 상태에서도 잔스포츠의 배낭을 걸치고 있다. 소니픽처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보신 분은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통해 재개발(이른바 ‘리부팅’)된 ‘피터 파커=스파이더맨(톰 홀랜드)’은, 2002년 샘 레이미 감독이 내놓은 <스파이더맨> 이래 발전확립되고 사골중탕되어 온 이전의 스파이더맨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다. 이제 그의 주변에는 해리 오스본도 없고, 오스코프도 없다. 큰 힘에 따르는 큰 책임 운운도 없고, ‘메이 숙모’ 역시 할머니가 아니다. 메이 숙모는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말마따나 ‘숙모치고는 너무 예쁘신’ 머리사 토메이가 연기해주는 섹시한 중년 여성이다. ‘벤 삼촌’은 아예(아니면 아직?)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 ‘벤 삼촌’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인물이 바로 토니 스타크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운전사 겸 심복인 ‘해피’(존 패브로)가 그 역할을 억지로 떠맡고 있긴 해도, 피터 파커의 아버지급 인물은 다름 아닌 아이언맨인 것이다.
14살 중딩의 에너지
그리고 이 영화의 악의 축 ‘벌처’(마이클 키턴) 역시 스파이더맨보다는 오히려 아이언맨과 적대관계다. 그런데 왜? 그가 왕년 디시 코믹스의 대표선수 배트맨을 연기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아니면 <버드맨>의 초반, 마이클 키턴이 연기했던 주인공 ‘리건 톰슨’의 자아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인터뷰 영상을 보며 ‘네 재능의 반도 안 되는 녀석이 깡통 슈트를 입고 떼돈을 벌잖아’라며 이를 부드득거렸기 때문에? 그게 아니고.
벌처는 <어벤져스>에서 추락한 외계 우주선의 해체 수거 및 파괴 현장 복구를 하는 폐기물 수거업체의 사장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슈퍼히어로들의 싸움터 수습 및 재건 전문 건설회사 ‘데미지 컨트롤’에 의해 일방적으로 빼앗긴다. 그리고 그 ‘데미지 컨트롤’의 지분 절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바로 토니 스타크다. 하여 벌처는 외계 우주선 잔해에서 뜯어낸 외계광물 ‘비브라늄’을 원료로 야매 무기를 만들어 범죄자들에게 파는 범죄자 겸 악의 축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물론 스파이더맨은 스파이더맨 나름 벌처와 싸움을 벌이게 되는 사연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 토니 스타크와 벌처의 원한관계와 비교해보면 그리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긴 그렇긴 하다. 워낙에 거물인 아이언맨이 벌처 같은 좀도둑에게 눈길 주는 것은 도무지 격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어벤져스의 ‘인턴’인 스파이더맨이 아이언맨을 대리하여 대결을 벌이는 편이 훨씬 그림 나오는 모양새인 것이다.
이렇듯 돌아온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마블 스튜디오가 새롭게 짜 온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판 안에서 어벤져스(+캡틴 아메리카+아이언맨) 시리즈로부터 두 계단쯤 아래 어딘가의 새로운 지위에 배치되어 있다. 잘 아시다시피 엠시유는 철두철미한 계급사회가 아닌가.
하여 피터 파커의 나이를 14살(본인의 주장으론 15살)로 낮춘 것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핵심적인 설정이라 하겠다. 아시다시피 18살과 14살 사이의 낙차는 54살과 50살 사이의 낙차와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고 결정적이다. 14살은, 이미 완전히 머리가 굵은 성인인 18·19살과는 달리 아직 아동 쪽에 훨씬 가까운 초보 청소년이다. 하여 토니 스타크의 보호자·아버지 행각은 피터 파커 본인에게나 보는 관객들에게나 전혀 위화감이 없다. 오히려 14살 중딩에게 그것은 인생 최대의 행운이고(왜 아니겠는가), 하여 인생은 24시간 365일 축제가 된다.
<홈커밍>은 바로 그 분위기에 집중한다. 종종 ‘지랄맞음’이라고 일컬어지기까지 하는 중딩 특유의 과포화 에너지를 영화 전체 구석구석에서 십분 활용한다. 이러한 점은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피터 파커의 핸드폰 직촬 동영상(영화상에선 ‘필름’이라고 주장되고 있다만) 시퀀스에서 명확하게 천명된다. 이 동영상에서, <시빌 워>에서의 그 거하디거하던 공항 전투는, 잔뜩 흥분한 피터 파커의 해설 간간이 섞여든 관광객풍 홈비디오의 한 컷이 된다. <클로버필드>에 대한 패러디인 듯 아닌 듯, 어쨌거나 근래 슈퍼히어로 계열 영화들이 선보였던 개그 중 가장 참신하고 타율 높았다 할 이 동영상이 말하는 것은, 그렇다, <홈커밍>이 무엇보다도 코미디 영화라는 것이다.
어벤져스의 ‘인턴’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대신해 악의 축과 대결 14살 피터 파커의 중딩 에너지 영화 곳곳에서 코미디로 승화
일상적이고 꾀죄죄한 동네 배경 슈트 위에 걸친 스포츠배낭까지 ‘다정한 이웃형’ 슈퍼히어로 그려 얄밉도록 잘 만든 블록버스터
<홈커밍>에서 코미디는 명실상부한 주재료로 격상되어 있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코미디를 지구·우주 구하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과도한 진지함·비장함·심각함을 중화·완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중화제·향미증진제로 사용하는 여타의 슈퍼히어로 영화들과의 가장 큰 차별점일 것이다.
또한 <홈커밍>은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뭐, 모든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성장담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그런 일반론이 아니라 좁고도 명확한 의미로서의 성장영화 말이다.
하여 <홈커밍>은 추억의 미드 <원더 이어스>(국내 방영 제목 <케빈은 12살>)부터 <톰 소여의 모험>까지 수많은 ‘청소년 성장 코미디’들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다만, 아무래도 그 느낌과 가장 가까운 영화 하나만 꼽아보자면 그것은 <킥애스>일 것이다. 비록 예산이나 규모, 때깔, 주인공의 능력, 슈트 등등에서 비교가 안 되긴 한다만, 학교에서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극평범 주인공(과 그의 친구)이라는 기본 설정부터 주인공 자신이 슈퍼히어로 팬으로 보여주는 정서와 행동거지들, 그리고 나쁜놈과의 대결과 그를 통한 성장 등의 전개에서 두 영화는 상당히 일맥상통하는 면을 보여준다.
워낙에 거물인 아이언맨이 벌처 같은 좀도둑에게 눈길 주는 것은 도무지 격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어벤져스의 ‘인턴’인 스파이더맨이 아이언맨을 대리하여 대결을 벌이는 편이 훨씬 그림 나오는 모양새인 것이다. 소니픽처스
무엇보다도 두 영화는 일상밀착과 생활감각이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하긴 스파이더맨은 원래 그런 카인드 오브 우리동네·지역사회 슈퍼히어로이긴 하다. 하지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까지 이르는 동안 스파이더맨은 지상에서 5센티미터 정도 떠서 걷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홈커밍>의 스파이더맨은 다시 지상에 확실하게 발을 붙이고 있다.
피터 파커의 ‘우리 동네’인 뉴욕 퀸스의 풍경은 거의 <스모크>나 <점원들> 같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당히 일상적이고도 리얼한, 나아가 지저분하고 꾀죄죄하기까지 한 풍경 그대로다. 피터 파커가 몰래 슈트를 갈아입는 빌딩 틈 뒷골목에는 검은색 쓰레기봉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토니 스타크가 준 ‘홀로그램 위치추적기’가 사용되는 곳은 피터 파커와 그의 절친 ‘네드’(제이컵 배털런)가 뭉그적거리는 침대 위나 스쿨버스 뒷자리다. 그들이 수거해 온 벌처의 비밀무기 파편은 학교의 과학실습실에서 분해·분석되며, 피터 파커는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은 상태에서도 잔스포츠의 배낭을 걸치고 있다.
이 모든 장면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 그것은 ‘여러분의 다정한 이웃’이라는 슬로건 그 자체다.
스파이더맨의 첫 싸움은, 벌처가 판매한 무기를 든 채 짝퉁전문 기념품 가게에서 산 듯 허접하기 그지없는 어벤져스 가면을 쓴 현금인출기(ATM) 털이범들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퀸스의 명물’로 알려진 맞은편의 작은 샌드위치 가게가 애꿎은 피해를 입는다. 피터 파커는 물론 그 가게의 단골이고, 그렇게 피터 파커의 우리 동네 슈퍼히어로로서의 각성은 시작된다.
‘현금인출기 강도’와 ‘샌드위치 가게’. 이건 외계행성의 반란장군 정도는 나와 주고, 소코비아든 뉴욕이든 도시 전체를 들었다가 놓는 평소 어벤져스의 규모와 비교해볼 때, 거의 길거리 채소장수 할머니와 대형마트 정도의 차이다. 하지만 감정이입이라는 면에서 둘의 힘은 가볍게 역전된다.
지상에 발붙인 슈퍼히어로
더구나 피터 파커에게는, 자신이 심취해 있는 각종 에스에프(SF)나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세계를 현실로 가지고 들어오고 싶어 하는 남자아이들의 열망이라는, 이 세상 모든 비브라늄보다도 강력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한때 남자아이들이었던 남자어른들 역시 다들 한번쯤 품어보았을 열망이다. <홈커밍>은 그것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고, 또 기억하도록 만든다.
하여 토니 스타크가 만들어준 수백만불짜리 인공지능 첨단 슈트를 입은 상태에서도, 피터 파커와 그의 친구 네드는 어린 시절의 우리에 그대로 머물 수 있다. 평화로운 주택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질주 액션에서도, 워싱턴 모뉴먼트 꼭대기에서의 고공 액션에서도, 두 동강이 난 스태튼아일랜드 페리에서의 헌신 액션에서도, 지상에 단단히 발붙일 수 있다.
그것은 과연 토니 스타크의 말대로 “노동계급 출신 히어로다운” 면모이고, 덕분에 우리는 오랜만에 그들의 귀여움과 기발함에 웃고, 탄성 지르고, 환호할 수 있다. 흙수저 슈퍼히어로를 위해 특수제작 첨단 슈트를 허하는 황금티타늄합금 수저 슈퍼리치 슈퍼히어로의 너그러운 시혜에까지도 일순 뭉클하게 만드는, 이 얄밉도록 잘 만든 블록버스터 앞에서.
한동원 영화평론가
[관련 영상] | <한겨레TV> 대중문화 비평 ‘잉여싸롱‘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