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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항일투쟁을 다룬 영화들이 설정하기 마련인 ‘선량한 조선인 대 사악한 일본인(+조선인 반역자)’이라는 구도를 최대한 벗어나 있다. 박열의 최고의 동지이자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조선인도, 재일 조선인도 아닌, 일본인이다. 메가박스㈜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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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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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항일투쟁을 다룬 영화들이 설정하기 마련인 ‘선량한 조선인 대 사악한 일본인(+조선인 반역자)’이라는 구도를 최대한 벗어나 있다. 박열의 최고의 동지이자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조선인도, 재일 조선인도 아닌, 일본인이다. 메가박스㈜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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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개봉했던 <아나키스트>는 크레딧에 올라 있는 두 이름, 박찬욱(각본)과 이준익(제작)만으로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의 제작과정에서 알게 된 ‘박열’이라는 인물에 17년간 꽂혀 있던 이준익 감독이 17년 만에 마침내 영화로 만들어낸다, 라는 것이 <박열>의 제작에 얽힌 사연인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박열>이 상당히 오랫동안 발효 숙성된 이야기라는 것과, 그만큼 영화화되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을 동시에 의미할 것이다.
‘박열’(이제훈)의 이야기가 영화화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①박열이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벌였던 투쟁 자체가 일단 한눈에 들어오는 ‘직관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18세 나이로 3·1운동에 가담했다가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박열은, 폭탄으로 당시 일본 황태자(히로히토)를 암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의열단에게 의뢰했던 폭탄의 입수 자체를 이런저런 사연들로 인해 실패해 암살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입수 실패 후, 자체 폭탄 제조도 시도하지만 이 또한 실패다. 뭐, 폭탄을 손에 넣기라도 했어야 그걸로 이야기를 만들어보기나 하지. 더구나 때마침 터진 일본의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 ‘자경단’의 조선인 무차별 학살이 시작되었을 때, 박열은 “우리가 일본 민중하고 싸우자는 거냐”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결성한 단체인 ‘불령사’의 동지들과 오히려 ‘가장 안전한’ 감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기까지 한다.
무정부주의자의 유쾌한 투쟁
요컨대 겉으로 드러난 행적으로만 본다면 박열이라는 인물은 흔쾌히 영화화될 만큼 그림이 나오거나, 장렬하거나, 드라마틱한 인물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항일투사’라고 하면 떠올리는 인물형에서 상당히 벗어난 인물이다. 이에 대해 영화는 어떠한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
그것은 ‘그냥 그대로’다. 영화는 별도의 액션화나 픽션화 등등의 2차 가공 없이 박열의 행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오히려 <박열>이라는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라 할 것이다.
감독도 강조하고 있듯, 영화는 항일투쟁을 다룬 영화들이 설정하기 마련인 ‘선량한 조선인 대 사악한 일본인(+조선인 반역자)’이라는 구도를 최대한 벗어나 있다. 박열의 최고의 동지이자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조선인도, 재일 조선인도 아닌, 일본인이다. 또한 영화 속엔 주인공들에게 끌리거나 뜻을 같이해 적극적으로 일제 정치권력과 싸우는 변호사, 소설가, 학생 등등 일본인들도 다수 등장한다. 심지어 박열과 후미코를 심문해서 없는 죄도 덮어씌워야 하는 젊은 예심판사 ‘다테마스’(김준한)는 이들의 은밀한 친구 같은 존재가 되기까지 한다.
일 황태자 암살 시도하다 실패한
아나키스트 박열의 법정 투쟁
조선인 VS 일본인 선악구도 대신
조직된 권력 향한 유쾌한 저항 그려
법정과 감옥, 제한된 공간에서도
카메라 워킹 최소화해 인물에 집중
후미코역 최희서의 ‘한국식 일본어’
주인공 이제훈의 연기와 함께 매력
항일영화 통념에서 벗어나는 이 모든 설정은 두 주인공 박열과 후미코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들의 영점은 일본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라는 조직화된 권력에 맞춰져 있다. <박열>이 초반에 다소 낯설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박열>은 대부분의 우리에게 생소하거나 ‘무질서주의’, ‘무정부적 혼란’쯤으로 오해되고 있는 아나키즘을, 실체 없는 개념이 아닌 피와 살이 붙은 실물로 경험하게 한다. 거의 한국영화 최초로.
그런데 산 넘어 산,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두 주인공이 감옥에 갇히자마자, 조선인 학살을 유도한 일제의 내무대신 ‘미즈노’(김인우)는 자신의 책임과 국제적 관심을 회피하기 위해 ‘황태자 암살 기도’라는 죄명으로 박열을 기소한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영화는 ②내내 감옥 독방(그리고 잘해야 취조실과 법정)이라는 한정된 실내공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적 폐쇄감/시각적 지루함을 유발시킬 개연성 높은, 매우 까다로운 상황전개라 할 것인데, 이에 대한 영화의 해법은 무엇인가.
이 또한 ‘그냥 그대로’다. 영화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박열과 후미코 두 주인공을 독방 감옥, 예심판사 다테마스와 심문 같은 공방을 벌이는 취조실, 그리고 법정 정도의 실내공간을 떠나지 않는다. 덕분에 영화는 ①두 주인공에게 완전히 집중할 수 있는 틀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②제작비를 상당히 감축하는 효과를 얻는다.
내가 영화에 돈 대는 입장도 아닌 마당에, 제작비 감축이 왜 중요한가. 이는 손익분기점을 의식해 각종 무리수를 두게 되는 위험을 피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기준으로 봐도(아니, 오히려 현재의 기준으로 볼 때 더욱)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대단히 벗어난’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는 박열과 후미코라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을, 별도의 인공적 향미증진제 첨가 없이 온전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높지 않은 제작비라는 조건 또한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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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과 후미코가 감옥에 투옥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들의 죄목을 자신들의 입으로 낱낱이 밝히고, 부르짖고, 그 죄목으로 자신들을 기소해달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한술 더 떠 후미코는 “내가 박열을 가르쳤다”며 박열과 ‘더 큰 죄 뒤집어쓰기 배틀’을 벌인다. 메가박스㈜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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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간의 한정만이 아니다. 영화는, 두 주인공의 투옥 및 재판이 시작되는 3분의 1 지점부터 대부분의 장면들에서 얕은 시야심도(=뿌옇게 흐려지는 배경과 선명히 부각되는 인물들)의 바스트샷을 고수하고, 카메라 움직임을 최소화함으로써 철저하게 인물들에게 집중하고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박열이나 후미코의 배경에 부동자세의 교도관을 세워둠으로써 그들이 처한 ‘객관적’ 상황을 계속 상기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만. 아무튼, 덕분에 관객들은 이 ‘투옥-심문’ 장면들을 보며 거의 소극장 무대를 보는 것 같다 못해 최근 개봉했던 <노무현입니다>의 인터뷰 장면들처럼 실존인물 인터뷰를 보는 듯한 느낌까지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박열>은 그러한 제약 덕분에 오히려 보통의 항일투쟁 무비에서 볼 수 없는 예측불허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재미있는 어법을 보여준다.
박열과 후미코가 감옥에 투옥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누가 쥐어짜내지도 않은 자신들의 죄목을 자신들의 입으로 낱낱이 밝히고, 부르짖고, 그 죄목으로 자신들을 기소해달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더구나 그 죄목은 황태자 암살 기도, 즉 ‘대역죄’. 일말의 에누리도 없이 사형을 언도받는 죄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술 더 떠 후미코는 “내가 박열을 가르쳤다”며 박열과 ‘더 큰 죄 뒤집어쓰기 배틀’을 벌인다. 나아가 자신을 심문하는 예심판사에게 “천황 같은 기생충” 등등의 표현을 섞어가며, 아나키즘의 개념을 거침없이 설파한다.
바로 이 대목이 이 영화의 핵심 중 하나인 코믹함 및 낙천적 유머가 자연발화 하는 지점이다. 결백을 주장하기는커녕 “일본에서 가장 버릇없는 피고인이 되겠다”고 기염을 토하는 죄인들을 상대로 심문을 벌이고 재판을 연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진지하고 심각하기 어려운 코미디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에 박열과 후미코에 의해 전개되는 기상천외한 상황들에 비하면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만.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중간에는 이들의 심문관이자 이들의 대화 상대인 예심판사 다테마스가 있다. ‘문명국가 일본’의 신봉자인 그는, 박열-후미코라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매력에 끌릴 만큼 지적이고 합리적이지만, 그들을 드러내놓고 옹호할 만큼 용감하지는 못하다. 출세 욕심도 있다. 이 ‘낀 중간’에 있는 젊은 일본인 관료야말로 <박열>이라는 좌충우돌 시소를 제자리에 붙잡아주는 축이다.
박열과 후미코는 이 자유게시판스러운 인물을 통해서, 각자 따로 독방에 갇힌 상태에서도 대화를 주고받고 사랑을 확인한다. 여기에서 감독은 이미 <동주>의 심문 장면에서도 보인 바 있던 편집의 묘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동주>에서 그것이 윤동주와 송몽규 사이의 긴장감과 일종의 ‘미스터리’를 만드는 장치로 쓰였다면, <박열>에서는 물리적 거리로 두 주인공의 심리적 거리를 벌릴 수 없다는 것, 즉 두 사람의 믿음과 애정의 깊이를 보여주는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다테마스는 그들의 매력에 말 그대로 ‘물든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인물이 실제로 일제 고위관료 중에(그것도 일본 본토 내에서) 있었을까. 물증이 있다. 이른바 박열-후미코의 ‘괴 사진’이다. 교도소 내 모처에서 박열의 무릎에 앉아 비스듬이 책을 읽고 있는 후미코와, 그런 그녀의 한쪽 가슴에 느긋하게 손을 얹어놓고 있는 박열이 찍힌 이 사진에 얽힌 경위나 사연에 대해서는 직접 영화를 보시고 확인하시기 바란다.
뭐, 그렇다고 해서 <박열>이 완벽에 한없이 가까운 그런 영화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코믹함 및 선명성 제고를 위해서 듬뿍 사용된 악의 축인 내무대신 미즈노(김인우)의 ‘사악한 관료’ 연기는, 아닌 게 아니라 다소 넘치는 느낌이 없지 않다. 또한,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싶도록 ‘이 장면은 코믹한 장면’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음악도 다소 수위를 낮췄으면 좋았겠다 싶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영화는 뜨겁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립구도나 사고방식에 안이하게 의지하지 않는다. 불편한 대목을 에둘러 돌아가거나 억지 양념을 치지 않는다. 화면은 검소하고, 카메라는 절제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인물들에게 빠져들도록 만든다. 영화 속 다테마스처럼.
이제훈과 최희서
그리고 이 영화를 얘기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두 배우, 이제훈과 최희서가 있다. 그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노르웨이의 숲>의 ‘미도리’를 일제 사상범 감옥에 던져놓은 듯한 후미코 캐릭터의 매력, 그리고 그녀를 실물화해낸 최희서의 연기였다. 그녀의 ‘일본식 한국어’ 발음(사전정보 없이 본다면 필시 그녀를 일본인 배우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과 ‘울면서 윙크하기’ 연기는 “내가 비록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나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삶에 대한 긍정”이라는 그녀의 대사 한 구절과 함께 쉽사리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탐욕에 짓눌려 오랜 정신적 발기부전에 걸린 우리의 다리에 내갈기는 뜨끈한 오줌 같은 박열의 “이상이란 (겁쟁이인 당신들의 눈엔) 모두 허황된 것으로 보일 것이오”라는 한마디와 더불어.
▶ 한동원 <적정관람료> 편집장.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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