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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5.13 13:20 수정 : 2017.05.13 13:31

인물들이 어둠의 심연에 접근할수록 목을 조이는 긴장감을 쌓아가는 솜씨와, 그것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습격’ 장면에서의 숨 막히는 카오스는 리들리 스콧이 얼마나 장르적인 연출에 능한 감독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에일리언: 커버넌트>

인공지성과 에일리언의 만남
긴장과 공포 극대화한 연출에
장르적 재미 살린 유머까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배포’

‘지적 블록버스터’ 지향하며
‘부성’에서 기원한 공포 그려
플롯상 허점·시각적 무리수에도
“성공적인 시리즈로 평가”

인물들이 어둠의 심연에 접근할수록 목을 조이는 긴장감을 쌓아가는 솜씨와, 그것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습격’ 장면에서의 숨 막히는 카오스는 리들리 스콧이 얼마나 장르적인 연출에 능한 감독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세상의 에일리언 팬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1편을 최고로 꼽는 팬과 2편을 최고로 꼽는 팬.(3편 팬도 있다고? 흠. 그래서 ‘크게’라는 단서를 붙인 것이다만.) 아무튼, 개인적으로 필자는 근소한 차이로 2편을 최고로 꼽는 쪽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에일리언: 커버넌트>(이하 <커버넌트>)에 대한 얘기를 시작.

우선 제목에 ‘에일리언’을 명기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커버넌트>는 자신이 에일리언 시리즈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리들리 스콧 자신의 38년 전 작품인 <에일리언> 1편의 디엔에이(DNA)가 가장 먼저 드러나는바, 우주공간에 알파벳 획이 하나씩 떠오르는 그 유명한 타이틀에서부터 <커버넌트>는 1편의 적자임을 천명한다.

역시나 1편처럼 열 명 남짓의 승무원들로 운용되는 화물선 커버넌트호는, 일면 개인용 제트기 같은 느낌마저 풍기던 전편 <프로메테우스>의 프로메테우스호(왜 아니겠는가. 이 배에는 우주 규모 거대 기업의 창업주와 그의 딸이 타고 있다)와는 달리, 쇠사슬 늘어진 어둑한 화물칸에 중장비들이 실린 거대 플랜트에 가깝다. 말하자면 커버넌트호는 1편의 우주선 ‘노스트로모’를 기본으로, 2편의 ‘술라코’의 일부를 접붙임 한 느낌인데(둘의 이름 모두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노스트로모>에서 따온 것이다), 커버넌트가 노스트로모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화물이다. 광물을 나르던 노스트로모와 달리 커버넌트는 냉동수면(‘하이퍼 슬립’) 상태의 인간 2000여명과 인간배아들, 즉 인간 종(種)의 종자를 나른다. 목적지는 그들이 새로이 개척 및 정착할 ‘지구형’ 행성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DNA

갑작스런 사고로 커버넌트호 승무원들은 냉동수면에서 깨어나게 되고,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오는 또 다른 미지의 ‘지구형’ 행성을 발견, 그곳에 착륙해 탐사를 벌이기로 결정한다. 이런 초반 전개까지는 거의 1편의 궤도를 그대로 따라가던 <커버넌트>는, 그런데 모든 것이 거대하고 원시 그대로일 뿐 지구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이 행성의 탐사로 넘어가면서, 에일리언 시리즈보다는 <킹콩>(또는 <지옥의 묵시록>?)에 가까운 형국으로 흐르는 듯 보인다.

아무튼 그 전개야 어찌 되었건 인물들이 어둠의 심연에 접근할수록 목을 조이는 긴장감을 쌓아가는 솜씨와, 그것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습격’ 장면에서의 숨 막히는 카오스는 리들리 스콧이 얼마나 장르적인 연출에 능한 감독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더불어 “나 오줌 좀 누고 올게”(라는 대사를 입에 담은 캐릭터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로 대변되는 호러 서스펜스의 장르적 잔재미를 살린 유연함/유머감각이라든지, 통신장비를 통해 전달되는 참상과 절규를 단편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재앙이 덮쳐온 순간의 공포와 현장감을 극대화시켰던 <에일리언2>의 그 유명한 ‘해병대 멘붕’ 시퀀스를 기리는 듯한 ‘착륙선 참사’ 시퀀스에서의 연출은, 그의 배포마저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아아,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얘기를 하려니 거의 발바닥에 끈끈이 안 묻히고 퀸 에일리언 본거지로 진입하려는 것과도 같은 난맥상이 느껴진다만, 아무튼 끈끈이를 최대한 피해가며 얘기를 계속해보자면, ‘착륙선 참사’로 등장인물들과 관객이 공히 정신적 진공 상태에 빠졌다가 회복되는 시점은, 영화가 약 1시간 정도 경과된 시점이다. 그런데 영화의 전체 러닝타임은 122분. 탐사대는 고립됐고, 본선과의 통신은 원활하지 않고, 미지의 행성에 밤이 내리고, ‘위협’은 점점 숨통을 조여 온다.

벌써 전반전에 이렇게 화끈한 샴페인을 터뜨려버리면, 과연 나머지 1시간 남짓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라는 질문이 등장하는 순간,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의 오비완 케노비(앨릭 기니스)적 카리스마를 담지한 채 구원이 홀연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중반부로 진입한다.

이 중반부에는 새로운 디엔에이가 섞여든다. 그것은 에일리언 시리즈가 아닌 리들리 스콧의 35년 전 작품인 <블레이드 러너>의 디엔에이다. 이를 지닌 캐릭터는, 전편 <프로메테우스>에 등장했던 합성인간 ‘데이빗’과 <커버넌트>의 합성인간인 ‘월터’(마이클 패스밴더의 1인2역)다. <에일리언> 1편의 합성인간 ‘애시’와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컨트(=인조인간) ‘로이’의 디엔에이를 한꺼번에 물려받은 듯한 이 두 명은, 사실 <커버넌트>의 실질적 주인공이다. 바로 이 점이 <커버넌트>가 ‘리플리’(시고니 위버)로 대표되는 ‘여전사’ 캐릭터 및 그녀의 ‘모성’과 ‘성녀적 희생’을 중심에 놓아 온 2편 이후의 에일리언 시리즈들과 가장 큰 차별성을 긋는 대목이다.

이를 선언이라도 하듯,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의 도입부처럼 화면을 가득 채운 안구(眼球)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시작된다. 더구나 이 장면은 이제 막 ‘창조’된 합성인간 데이빗이 그의 창조주인 ‘피터 웨일랜드’(가이 피어스, 에일리언 세계의 범우주적 거대 기업 ‘웨일랜드 유타니’의 창업주 겸 CEO)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바그너와 바이런을 대동한 이 대화는 다분히 <블레이드 러너>의 합성인간 로이와 그의 ‘아버지’ 타이렐 박사의 짧고도 굵은 대화를 연상시키는데, 데이빗이 자신의 창조주인 웨일랜드에게 던진 질문 “그렇다면 인간을 창조한 것은 무엇인가요?”로 마무리되는 이 프롤로그가 말하는 것은, 그렇다, <커버넌트>의 화두가 다름 아닌 ‘창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창조인가? 돌이켜보면 데이빗의 위 질문은 전작 <프로메테우스>의 중심 화두였다. <커버넌트>는 그 중심 화두의 목적어를 ‘인간’에서 ‘에일리언’으로 교체했다. 덕분에 <커버넌트>는, 인류의 기원보다는 훨씬 가볍고 수습 가능한 범위로 이야기를 축소할 수 있었고, 에일리언 시리즈에 속하는지 아닌지부터 애매했던(리들리 스콧의 말을 빌리면 “에일리언 시리즈와 디엔에이 몇 가닥을 공유”하는) <프로메테우스>가 어정쩡하게 열어두고 나온 문들을 확실하게 닫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만일 이야기가 단순히 ‘에일리언의 기원’이라는 안전한 찻잔 속에만 머물렀다면, 영화는 그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에 머물렀을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디엔에이가 힘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커버넌트>는 에일리언이라는 종의 탄생 과정에 월터와 데이빗이라는 인공지성을 개입시키는 것으로, 단순한 에스에프서스펜스호러액션을 넘어서는 ‘지적 블록버스터’로서의 의욕을 보인다. 두 합성인간의 대화와 교감이 중심을 이루는 영화의 중반부는 이 주제를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사실 이 대목이 <커버넌트>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결정적인 분수령일 것이다. 태초의 인간이 살았을 것 같은 어둑한 동굴에서 나누는 이들의 대화는 (대개 1편과 2편의 팬일) 에일리언 팬들이 기대하는 ‘순수한 긴장과 공포, 그리고 액션’에 대한 욕구와는 꽤 거리가 있는, 다분히 정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다. 물론 이 중반부가 겨냥한 것은 바로 그런 유리에 잔금이 가는 듯한 ‘정적이고 심리적인’ 긴장과 공포다만.

중반부가 지닌 더 큰 약점은, 월터/데이빗과 다른 인물들의 밸런스 문제다. 월터/데이빗의 진화론적/존재론적 논쟁과 교감이 극의 중심을 이루는 동안, ‘리플리’ 법통의 계승자이자 인간 측 주인공이라 할 ‘다니엘스’(캐서린 워터스턴)를 위시한 다른 인물들은 거의 이야기의 외곽으로 밀려나 먼 외곽 궤도를 선회하는 듯한 형국이 된다.

물론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오랫동안 기다리셨다는 듯, 예의 그 에일리언 대 여전사 액션 시퀀스에 단숨에 돌입한다. 위태롭게 비행하고 있는 화물전용선의 적재 공간 위에서 에일리언과 혈혈단신 대결을 벌이는 다니엘스 캐릭터의 액션은 거의 만화적이라 할 정도로 비현실적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화려해, 중반부의 무겁고 어두운 폐쇄감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나아가,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듯, 한 줌 남은 생존자들과 에일리언이 커버넌트호 내부에서 벌이는 최후의 사투는 1편과 2편의 클라이맥스를 그대로 합성해놓은 듯, 빠르고 숨 막힌다. 그렇게 영화는 ‘여전사 액션무비’로서의 전통에 마침내 안착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3의 요인’이 새로운 긴장을 낳는다. 역시나 합성인간 월터다. 사실상 이 대결 상황의 절대적인 지배자는, 커버넌트호의 중앙통제실에서 인간 대 에일리언의 목숨 건 대결을 지켜보며 체스말을 움직이듯 인간을 돕는 월터다. 다소의 단순화의 위험을 안고 말하자면, 두 합성인간 월터와 데이빗이 <커버넌트>의 ‘두뇌’라면, 다니엘스를 비롯한 인간 승무원들은 ‘팔다리’인 것이다.

창조물이 주는 공포

그런 의미에서도 <커버넌트>는, 리플리가 아직 ‘모성’을 각성하지 않았던 1편의 후계자다. <커버넌트>의 공포는 ‘모성’이 아닌 ‘부성’에서 온다. 1편의 공포의 뿌리는, 에일리언이라는 괴물보다는 그 괴물이 압착해 낸 우리 내부의 어둠에 있었다. 합성인간으로서의 정체가 드러나자 싸늘한 냉소와 함께 “너희들은 이 완벽한 생명체의 손에 모두 죽는다”는 말로 창조주인 인간들을 비웃고 경멸하는 합성인간 ‘애시’(이언 홈)가 건드린 것은 바로 오이디푸스적 공포다. 그리고 <커버넌트>의 합성인간 월터/데이빗은 바로 그 공포의 계승자이자 사도다. 그것은 자신의 창조물이 주는 공포가 현실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창조 행위를 멈출 수 없는 현재의 인류가 막연히 품고 있는 공포와 정확히 공명한다.

물론 이것은 <커버넌트>가 최초로 발견한 공포도, 최초로 언급한 공포도 아니다. 하지만 <커버넌트>는 그것을 단순한 설교가 아닌 계시로서 경험하게 한다. 그것이, 몇 가지 플롯상의 허점과 구성상의 장황함, 약간의 시각적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커버넌트>가 성공적인 에일리언 시리즈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물론 2편이 시리즈 중 최고라는 필자의 개인적 의견에는 전혀 흠집을 내지 못했지만서도. 자, 여러분들은 어떠실지.

위태롭게 비행하고 있는 화물전용선의 적재 공간 위에서 에일리언과 혈혈단신 대결을 벌이는 다니엘스 캐릭터의 액션은 거의 만화적이라 할 정도로 비현실적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화려해, 중반부의 무겁고 어두운 폐쇄감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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