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03.18 14:32 수정 : 2017.03.18 14:39

매슈 매코너헤이가 연기하는 광산채굴업자 ‘케니’는 그의 특화 분야라 할 ‘사면초가의 코너에 몰려 모든 걸 걸고 마지막 도박을 감행하는 인물’이다. 매코너헤이는 베테랑다운 노련함으로 이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구현해낸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매슈 매코너헤이가 연기하는 광산채굴업자 ‘케니’는 그의 특화 분야라 할 ‘사면초가의 코너에 몰려 모든 걸 걸고 마지막 도박을 감행하는 인물’이다. 매코너헤이는 베테랑다운 노련함으로 이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구현해낸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골드>

다분히 금괴 모양을 연상시키는 두툼한 서체의 금색으로 적힌 제목. 미국 뉴욕 중심가가 배경으로 깔린 화면을 가득 채운, 선글라스를 낀 채 슈트를 입고 있는 매슈 매코너헤이의 옆모습. <골드>의 포스터가 앞세우는 핵심은 그야말로 간단명료하다. 이 영화는 더the도 없고 어a도 없는 지G 오O 엘L 디D 넉 자, 즉 ①금에 대한 영화, 그리고 ②매슈 매코너헤이의 영화다.

일단 ①번. 마셜 매클루언의 뼈 있는 지적대로 돈이 모든 것을 은유하고 번역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금’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오는 것은 거의 ‘인류’나 ‘사랑’이나 ‘문명’ 같은 단어를 제목으로 채택하는 것만큼 무모해 보인다만 이 제목은 딱히 그런 경우는 아니다. <골드>는 그 제목 그대로 금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금을 찾아내고 파내는 데 인생을 건 광산채굴업자들에 대한 영화이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광산채굴업자들이 금 채굴을 놓고 벌인 도박에 대한 영화다.

<골드>는 결정적으로 모델로 삼은 실제 사건에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 평생 모은 돈을 잃었다는 점을 애써 외면한다. 또는 거꾸로 그들의 불행은 그들의 탐욕이 초래한 결과라고 설교한다. CGV아트하우스
믿고 보는 매코너헤이

이 영화의 핵심 소재이자 기본 줄거리가 되는 ‘도박’은 1995년, 캐나다 캘거리에 본사를 둔 브리엑스(Bre-X)라는 광산채굴회사의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다. 캐나다뿐 아니라 전세계 광산채굴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그 사건의 내용을 대충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스포일러가 될 것이므로 건너뛰고. 아무튼 그 사건에는 크게 보면 세 사람(데이비드 월시, 존 펠더호프, 마이클 드 구즈먼이 그들의 이름이다)이 연관돼 있는데 <골드>의 각본가들은 이 세 사람을 두 인물로 압축하고 있는바, 기획자인 주인공 ‘케니 웰스’(매슈 매코너헤이)와 탐광사인 ‘마이클 어코스타’(에드가르 라미레스)가 그 두 사람이다.

이 중 단연 핵심은 ②매슈 매코너헤이다. 매코너헤이라는 신뢰감 높은 배우가 주연을 맡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데, 이 영화의 국내 포스터를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좀 이상하다. 매슈 매코너헤이의 이마 선 위가 잘려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그 이유는 영화 예고편이나 스틸 한 장만 슬쩍 봐도 알 수 있다. 매슈 매코너헤이가 남성형 탈모 상태의 두발 분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슈 매코너헤이가 이런 특수분장을 하고 있다는 점은 오히려 호기심 유발 포인트라 할 것인데, 그가 이 역할을 위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감량했던 체중(20여㎏)만큼의 살을 찌움으로써 거의 쌀가마니 실루엣의 뱃살을 만들어냈고, 고르지 못한 치열을 위해 틀니까지 끼우는 등등의 인간 특수효과를 감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한마디로 ‘매코너헤이가 그런 수고를 감수했다면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 최고의 강점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의외인 것은 이 사건의 실제인물 세 명 중 누구도 탈모가 아니라는 점이다. 뭔가. 그렇다면 굳이 왜? 여기에서 이 영화보다 3년 앞선 2013년, 다름도 아닌 크리스천 베일이 대머리 분장과 무너진 몸매라는 동일한 콘셉트를 감행했던 <아메리칸 허슬>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아메리칸 허슬>은 탈모형 헤어라는 포인트를 결정적인 순간에 상당히 펀치력 있는 극적 장치로 사용하고 있는데(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형사 ‘리치’는 자신이 끄나풀로 심어놓은 사기꾼 ‘어빙’(크리스천 베일)의 정성껏 모아 널어놓은 머리를 그의 애인 앞에서 문질러 버리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저지르고, 결국 이는 그의 복수 결심을 굳히는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골드> 역시 그런지 여부를 살펴보는 것은 이 영화의 밀도를 짐작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겠다.

‘광산채굴업자들의 도박’ 실화
주인공 케니 역 매슈 매코너헤이
20㎏ 살찌우고 탈모 분장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인물’ 생동감

금을 향한 탐욕 지적하지만
실화 속 사람들 희생은 외면
감정 앞서가는 과잉된 음악
캐릭터 입체감도 떨어져

일단 매코너헤이의 연기는 언제나와 같은 에너지를 보여준다. 그가 연기하는 광산채굴업자 ‘케니’라는 인물은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인터스텔라> 등에서 보여준 대로 매코너헤이의 특화 분야라 할 ‘사면초가의 코너에 몰려 모든 걸 걸고 마지막 도박을 감행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매코너헤이는 베테랑다운 노련함으로 이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구현해낸다. 예를 들어 ‘케니’가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거절당한 뒤 차 안에서 홀로 괴로워하는(또는 분을 삭이는) 도입부의 한 장면을 보자. 채 몇 초도 되지 않는 이 삽화에서의 연기만으로도 그는 ‘단맛 쓴맛 다 봤다’의 느낌을 충분히 전달한다. 그렇게 세월을 그대로 퇴적시켜놓은 듯한 내공이야말로 이 배우가 가진 설득력의 원천임은 말할 것도 없겠다.

물론 이것이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 연기는 종종 <링컨 차를…>의 뺀질이 합의전문 변호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강력한 기시감의 원인을 그의 연기 패턴에 돌릴 수는 없다. 그의 연기는 어디까지나 이 영화의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중추에 다름 아닌 마당에 말이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골드>의 함량 및 순도를 떨어뜨리는 핵심은 아무래도 ①과도한 향미증진제의 첨가다. 예컨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주인공 ‘케니’가 탐광사 협회에서 수여하는 ‘황금 곡괭이상’ 수상 연설 장면에서의 연출을 보자. 이 장면은 절벽 밑바닥에 파묻혀가던 주인공이 준봉의 정상까지 곧장 치솟아 오른 뒤에 오는 장면인데, 그 연설의 대사와 매코너헤이의 연기 자체는 훌륭하다. 그러나 그 중간에 매우 감상적인 음악을 동반한 채 동료인 ‘어코스타’와 함께했던 어렵던 시절의 모습이 인터컷 되고 있는바, 우리는 여기에서 굳이 왜!라 외쳐 마지않을 수 없다. 연기와 대사의 맛을 무가당 무첨가로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다.

이러한 과잉 양념의 오류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②음악이다. 영화의 오에스티(OST)는 뉴 오더의 삽입곡부터 이기 팝의 오리지널 주제곡까지 화려한 면면이고, 오리지널 스코어는 펑키한 록부터 오케스트라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자랑한다만,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시종 관객이 느껴야 할 감정을 앞서서 일일이 해설하고 있다는 인상만을 남긴다.

그런 과잉친절에 흔히 동반되는 것은 ③캐릭터에서의 입체감 부족 현상일 텐데, 매코너헤이의 연기에 힘입어 생동감을 얻은 주인공 ‘케니’ 캐릭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캐릭터들은 플롯을 위한 체스말 같다는 것 외에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훨씬 복잡하고도 미묘하게 그려졌어야 할 ‘케니’의 유일한 동료 ‘어코스타’ 캐릭터도 그렇거니와, ‘케니’의 여자친구 ‘케이’ 캐릭터는 ‘(극단적 자본주의적 인간형인) 남자는 배, (반자본주의적이자 인간적으로 올바른데다 의리까지 겸비한) 여자는 항구’라는 구조에 끼워 맞춰지다 보니 비현실적인 또는 동화적인 색채까지 띠게 된다. 평범한 시골마을 점원이던 그녀는, ‘케니’의 성공과 함께 연일 벌어지는 파티를 갑작스럽게 내던지고 환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때 던지는 그녀의 지극히 ‘올바른’ 대사들은 <패밀리맨>에서 테아 레오니가 뉴욕 투자회사의 임원이 된 니컬러스 케이지를 다시 뉴저지의 타이어 매장 매니저로 복귀시킬 때 던지던 대사만큼이나 올바르고,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패밀리맨>은 관객들이 그 대사를 납득하고 넘어갈 만큼 충분한 매력과 시간과 공을 들이는 데 반해, <골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여곡절을 끝에 반전(실화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전혀 반전이 아니겠지만)이 등장하면 영화는 준비해둔 메시지에 도달한다. “탐광사는 거기에 금이 있다고 믿고 또 믿고 또 믿고 또 믿는 사람이다”라는 케니의 대사와, 그가 “당신들은 돈을 좋아하지만 나는 금을 좋아해. 그건 분명히 다른 거라고”라고 일갈하는 대사는, 그것이 등장하는 장면들의 빈틈들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다. 금이 있길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탐욕이야말로 금을 만들어낸 동력이었고, 케니라는 인물은 금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다, 라는 이 이야기는 금광사냥꾼들뿐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닌가.

재앙스런 해피엔딩

<골드>는 이런 약간의 울림과 매코너헤이의 연기라는 금가루를 관객의 손에 남겨준다. 하지만 그것은 거대한 흙더미 속에 섞여 있는 매우 적은 양의 금일 뿐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모델로 삼은 실제 사건에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 평생 모은 돈을 잃었다는 점을 애써 외면한다. 또는 거꾸로 그들의 불행은 그들의 탐욕이 초래한 결과라고 설교한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믿음과 의리는 끝내 보상받는다’는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결국 그들의 피눈물로 이루어진 돈으로 만들어진 해피엔딩이다. 하여, 이 해피엔딩은 아무리 픽션이라 해도 납득되기 어려운 재앙이 되고 만다. 그것은 분명, 매코너헤이의 탈모 분장처럼 그저 무의미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