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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는 우리의 시야를 덮은 채 굳어 있는 이미지의 딱딱한 딱지를 뚫고, 그 안에 있는 사람, 피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여준다. A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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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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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는 우리의 시야를 덮은 채 굳어 있는 이미지의 딱딱한 딱지를 뚫고, 그 안에 있는 사람, 피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여준다. A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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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영화, 퀴어영화, 성장영화 등등 여러 타이틀이 붙어 있으나 여간해서 그 형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영화 <문라이트>. 하지만 위 타이틀이나 골든글로브 작품상, 아카데미 노미니 같은 타이틀보다 이 영화의 형체를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영화가 등장인물 이름으로 챕터를 나누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문라이트>의 챕터 구분에는, 말하자면 쿠엔틴 타란티노 식의 인물명 챕터 구분과는 결정적인 차이점 한 가지가 있다. ‘리틀’, ‘샤이론’, ‘블랙’ 세 개로 나뉘어 있는 이 영화의 챕터 제목은 다른 인물들 세 명의 이름이 아닌 인물 한 명이 가진 세 개의 이름이란 점이다(그 ‘한 명의 인물’은 이 영화의 주인공 ‘샤이론’이다).
더하여, 또 하나 사소해 보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세 챕터 제목은 아라비아숫자 1, 2, 3이 아닌 로마숫자 ⅰ, ⅱ, ⅲ으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 우연일까? 필자가 암전된 화면 한가운데에 떠오른 첫 챕터 제목 “i. Little”을 ‘일, 리틀’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나, 리틀’로 읽을 것인가를 곧바로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은?
약간의 과잉해석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한다면 이 챕터 제목이야말로 영화의 전체적인 형체를 파악하는 가장 좋은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소문자로 표기되어 있긴 하지만, 이 영화의 챕터 제목에 붙은 ‘i’들은 숫자로 읽힘과 동시에 ‘나’라는 문자로도 읽힐 수 있도록 고안된 은밀한 장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영화
이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영화의 형체를 이렇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나’에 대한 영화다.
<문라이트>의 주인공 샤이론의 첫 번째 ‘나’는 ‘리틀(Little, 앨릭스 히버트)’이다. 초등학생 꼬마 시절의 샤이론에게는 ‘리틀’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 ‘나’는 물론 샤이론 자신이 만들어낸 ‘나’는 아니다. 그것을 만들어낸 것은 주위의 또래 꼬마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애정이나 친밀함의 산물은 아니다. 플로리다 빈민가에 사는 싱글맘이자 마약중독자이자 매춘부의 아들 ‘샤이론’은, 더구나 게이다. 사냥개가 된 아이들의 후각이 그 은밀한 냄새를 놓칠 리 없다. 그리하여 샤이론에게는 ‘리틀’뿐 아니라 ‘호모(faggot)’라는 또 다른 ‘나’가 들러붙어 있다. 그런 ‘나’들을 모래주머니처럼 온몸에 매달고 있는 샤이론은 아주 손쉬운 사냥감이다.
실제로 ‘리틀’은 샤냥개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다른 아이들에게 쫓겨, 버려진 빈집 안으로 도망친다. 그런 ‘리틀’ 앞에 그 빈집을 비밀창고로 쓰고 있는 마약 딜러 ‘후안(마허샬라 알리)’이 나타난다. 그는 ‘리틀’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먹이고, 재우고, 집으로 다시 데려다준다. 하지만 ‘리틀’의 엄마는 감사는커녕 그런 후안으로부터 ‘리틀’을 빼앗듯 감춘다. 그녀에게 후안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마약을 파는 쓰레기일 뿐이다. 하지만 ‘리틀’에게는 후안이 은신처이자 아빠다. 약에 취한 미소 빼곤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엄마가 아닌.
후안은 ‘리틀’에게 용돈을 쥐여주고,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초의 인류로서의 흑인에 대한 자긍심에서부터 “달빛 아래에서 흑인 아이들은 모두 푸르다”(이것은 이 영화의 원작 연극의 제목이기도 하다)는 이야기까지. 그것은 ‘리틀’이 이제껏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후안은 말한다. “어느 순간 너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온다. 그 결정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지 마.”
싱글맘이자 마약중독자의 아들
빈민가 흑인 샤이론의 성장기
주인공의 세 별명 ‘챕터 구성’
마약·매춘·빈곤 모두 다루면서
진부한 이미지나 연출 벗어나
힙합·솔·클래식…음악 돋보여
인간의 상처와 미움…사랑까지
말없이 비추는, 달빛 같은 영화
그것은 ‘리틀’에게 마치 자신의 마음을 모두 읽은 예언자의 말처럼 들린다. 그에게는 ‘다른 애들이 너를 괴롭히도록 내버려두지 말라’고 말해준 (아마도) 유일한 사람인 ‘케빈(제이든 파이너)’이 있다. 케빈은 ‘리틀’을 자신이 만들어낸 혼자만의 별명 ‘블랙’으로 부른다. 샤이론의 세 번째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샤이론이 정작 그 세 번째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을 때, 케빈은 이렇게 말한다. “샤이론, 그건 네가 아니야.”
그렇다면 샤이론은 누구일까. 그는 리틀일까, 샤이론일까, 블랙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것들은 아예 없었던 걸까. 세 개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는 어떤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 것일까. 그건 후안의 예언처럼 결정해야 할 것이 아니었던,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었을까. 이 질문들은 지극히 아름답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이 영화에 녹아들어 있는 수많은 질문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마약, 매춘, 빈곤, 그리고 왕따와 동성애까지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단어들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진부한 이미지와 연출들로부터 가볍게 벗어나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음악이다. 가히 근래 최고의 오마주라 불러 마땅한 카에타누 벨로주의 ‘쿠쿠루쿠쿠 팔로마’의 삽입 타이밍은 물론이고, 힙합과 솔은 그것이 등장해야 할 곳에 저격수의 조준경처럼 확실하고 정확하게 사용되고 있다(특히나 ‘블랙’의 테마처럼 등장하는 구디 몹의 ‘셀 테라피’의 선곡이라든가, 케빈과 재회한 샤이론의 차에 틀어진 음악으로 지데나의 ‘클래식 맨’을 선곡한 유머 감각). 하지만 그것은 대개 영화 속에서 틀어진 음악으로 한정되어 있다. 오히려 영화의 공기를 지배하는 것은 피아노와 현악기로 연주되는 니컬러스 브리텔의 고전적인 오리지널 스코어다. 심지어 영화 전반부, 아이들이 종이로 만든 공으로 축구를 하는 장면에서는 모차르트까지 등장하고 있다. 안 될 게 뭔가? 그것은 그 장면의 배경이 되는 플로리다의 광활한 하늘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또한 핸드헬드와 롱테이크, 그리고 음악 삽입을 배제한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으로 시작된 영화가, 그러한 스타일을 교조적으로 고집하지 않은 채, 초점과 색채와 소리 그리고 편집을 자신의 의도를 위한 도구로서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 것은 이 영화를 놀라운 영화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지만 낯설지 않다. 독창적이지만 어렵지 않다. 마치 행성들이 일렬로 늘어서는 순간처럼 순수한 재능들이 자연스럽게 빛을 발하는 흔치 않은 순간의 산물이다. 그것을 목격하고 난 우리의 좌표는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다. 익숙하게 초점을 맞출 수 있었던 것들이 돌연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하며, 희끄무레한 그림자처럼 보이던 것들은 뚜렷한 형상을 가지고 떠오른다. 비록 잠시뿐이라 해도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행운이다. 어두운 바다 위에 우연처럼 떠오른 달빛처럼 그 경험은 짧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다. <문라이트>는 그런 경험 중 하나다. 그 경험으로 우리의 모든 선입견은 휘발된다.
하긴 그렇다. 쿠바에서 온 플로리다의 마약 딜러. 그에게서 마약을 사며 아들이 그를 따르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매춘부. 그리고 그 매춘부의 아들…. 솔직히 말해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대체 뭘 알겠는가? 대부분의 우리는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기는커녕 그들을 직접 만난 적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다른 누구 또는 무엇인가의 시각, 그리고 지식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들 머리와 망막과 고막 안에 이미지라는 딱지로 단단히 고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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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마약, 매춘, 빈곤, 그리고 왕따와 동성애까지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단어들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진부한 이미지와 연출들로부터 가볍게 벗어나 있다. A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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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리얼리티가 진실일까
그것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가, 혹은 그 ‘진실’이라는 것은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창작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단일한 ‘진실’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어쩌면 이 영화 자체도 자유로울 수 없을지 모르겠다. 배우와 스태프의 탁월한 힘으로 이뤄낸 이 영화의 힘 있는 리얼리티는 분명히 하나의 성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현실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이미지의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람이다. 우리들 모두처럼 사랑하고 미움 받고 아파하고 상처받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그리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잊지 못하는 사람들. <문라이트>는 우리의 시야를 덮은 채 굳어 있는 이미지의 딱딱한 딱지를 뚫고, 그 안에 있는 사람, 피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여준다. 야단스럽게 드러내는 대신 그들을 말없이 비춘다. 그리하여 영화는 그들을 자신의 설교를 위한 소도구로 쓰거나 그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대신, 조용히 감싸 안는다.
그렇게 <문라이트>는 마약 딜러도 매춘부도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흑인도 백인도 아닌 우리 모두 위에 내려앉는 달빛이 되었다.
▶ 한동원 <적정관람료> 편집장.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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