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판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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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는 빠짐없는 흥행 요소에 교육적 기능성마저 가지고 있다. 원전의 위험을 널리 알리려는 충심은 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어, 인물들의 대사는 꽤나 자주 반핵·탈핵 교육 동영상 내레이션의 풍모를 띤다. 뉴(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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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 영화판 두 개의 핵심어는 단연 ‘천만’과 ‘헬조선’일 것이다. <검사외전>을 필두로 최근의 <아수라>까지 많은 한국 영화들이 헬조선이라는 안전하고 검증된 플랫폼을 천만도달(이 아니라면 최소한 손익분기점 돌파)을 위한 추진체로 채택했다. 잠깐, 그런데 ‘안전하고 검증된’ 플랫폼이라니. 그렇다. 적어도 이 헬조선 플랫폼은 마치 50년 같던 5년이 끝날 2017년 말까지는 그 약효가 유지됨은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약효가 점점 강해질 것에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던, 한국 영화 스토리텔링에 있어 최고의 광맥이었다. 더불어 웬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감히 범접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본의 아니고도 드높은 무역장벽이었고 말이다.
그러나 그 뉘라서 예상할 수 있었을쏜가. 그 약효를 한방에 날릴 어마어마한 지진해일이 한국 영화판을 휩쓸 줄은. 그 모든 ‘현실적 상상력’들을 일시에 퇴색시켜버릴 안드로메다적 판타지가 우리 현실 한가운데로 튀어나올 줄은.
헬조선의 모든 것을 담았으나
그 시국이 단연 클라이맥스를 이루었던 지난주, 순 제작비만 120억원이 투입된 이른바 ‘한국형 재난 블록버스터’ <판도라>가 그 보무도 당당하게 개봉을 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인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필시, 1년 전에 촬영을 마친 이 영화가 1년이 넘도록 개봉을 못하고 있던 이유에 대한 무성한 소문 및 뒷이야기 및 그에 대한 언론 보도들, 그리고 그로 인해 촉발된 대중적 관심과 영화에 대한 사전적 지지였다 사료된다. 얼마 전 있었던 경주 인근지역 지진 역시 한몫했을 것이고.
아니나 다를까. <판도라>의 헬조선 콘셉트들은 ①낙하산 소장의 부임과 그로 인한 전문가들의 환란 및 고초 ②정치·경제논리를 앞세운 각종 문제 은폐 및 무리한 일정 단축 ③그로 인해 발생한 사고와 초기 대응의 지리멸렬 ④사고 은폐 기도와 사악하고도 무능한 대응 ⑤‘다수 위한 소수 희생’을 앞세운 무고한 국민들 죽이기 ⑥허수아비 대통령과 실질적 실세 총리 ⑦그 총리의 또라이적 사고방식 및 행동거지 ⑧세월호의 헌신적 민간잠수사들을 연상시키는 ‘최후의 복구팀’ 등등 대충 적기만 해도 거의 팔만대장경 급의 리스트를 이룬다.
더구나 그 중심에 있는 핵발전소 폭발 또한 ①지진 발생 ②냉각장치 고장 ③원자로 통제 불능 ④발전소 폭발 ⑤관계자들의 피폭 및 부상 ⑥인근 주민 소개(疏開) ⑦그로 인한 교통지옥 ⑧그 여파와 혼란의 전국 확산 ⑨한국 탈출 및 무정부 상태 등을 단 한 단계라도 놓칠세라 꼼꼼하게 현미경적으로 시각화해주고 있다. 이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기술이 투입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굳이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인데, 영화는 원전뿐 아니라 영화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 회의실, 상황실 등등 각종 내부 또한 세트로 재현하여 추가적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아낌없이 물량이 투입되다 보니 아무래도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위해서는 모든 연령대·성별·직업군을 아우르는 관객들이 고루 감정이입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여 ①주요 등장인물들을 10살 미만부터 60살 이상까지 연령대별로 고루 분포시키는 것은 물론, ②묵묵히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아픈 사연 ③그 사연으로 상처받고 자란 젊은이의 반항과 분노 ④그에 마음 졸이는 모정 ⑤소정의 고부갈등(또는 세대갈등) ⑥그를 해소시켜주는 어머니의 바다 같으신 마음 ⑦사나이 우정 ⑧노동자들의 동료애 ⑨그들의 사명감 및 장엄하고도 숭고한 희생 등등의 정서적 기폭장치들도 빼곡하게 배치하고 있다. 거기에 자칫 지나치게 무거워질지도 모를 이야기의 관람성 제고를 위하여 코믹 대사 및 장면들도 삽입된다. 뿐이랴, 그 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들 역시 김남길을 위시하여 정진영, 이경영, 김명민, 강신일, 김대명, 김영애, 문정희 등등 화려하기 그지없는 면면이다.
무능·부패한 전문가와 관리들
그들이 초래한 핵발전소 사고
세월호 연상 헌신적인 사람들까지
화려한 볼거리에 ‘반핵' 메시지도
사회비판이라는 ‘흥행 법칙' 좇다
영화 본연 흥미와 설득력은 잃어
최근 한국 상업영화들의 ‘연장선’
매너리즘이라는 괴물과 싸워야
후. 여기까지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다. 아무튼 요점은 <판도라>가 빠져나갈 구멍 없는 초 세목 흥행그물을 짜고 있다는 것인데, 영화는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교육적 기능성마저 추가한다.
사실 원전의 위험을 널리 알리려는 충심은 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어, 인물들의 대사는 꽤나 자주 반핵·탈핵 교육 동영상 내레이션의 풍모를 띤다. 그중 압권은 단연 전직 소장 ‘평섭’(정진영)의 대사인데, 원전 폭발 직전의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도 원전 파이프 배관 길이 등의 데이터를 10단위 자리까지 숨 한번 안 쉬고 설파해내는 그 놀라운 전문가적 면모는 걸어 다니는 원전 팸플릿을 방불케 한다. 그로도 이미 넘치거늘, 엔딩 자막으로 ‘현재 원전 반경 몇십㎞ 안에 몇백만의 주민이 거주 중이며, 현재 몇기의 원전을 추가 건설 중이다’ 등의 요점 정리까지 시행되고 있는바, 관객들은 원전의 위험성과 무시무시함은 도무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된다. 영화 상영 중 깜빡 수면에 덜미를 잡히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땅의 국민인 동시에 이 영화의 관객이기도 한 입장에서, 그래도 교육방송적 기능성 이전에 기본적 흥미와 설득력부터 확보하고 들어가길 바라는 마음 간곡하였던 것은 어쩔 수 없던 인지상정이었다만,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끝까지 달성되지 못한다.
특히나 그 기나긴 재난 상황의 나열 끝에 주인공들의 영웅적이고도 숭고한 희생이 첫 예감 그대로 시작되면 <판도라>가 준비한 영화적 컨베이어 벨트가 마침내 종착점에 이르렀나 싶거늘, 웬걸, 그 뒤의 희생의 절차에서도 영화는 초미니 단편영화 하나는 될 정도의 분량을 할애하며 ‘기어이 관객이 울 때까지’를 실현한다. 그로도 끝은 아니어서 영화는 마이클 잭슨의 ‘힐 더 월드’(Heal the World)의 환청이 들려올 것만 같은 ‘숭고한 희생의 의미 되새기기’까지 모두 완결될 때까지 좀처럼 눈물과 감동의 핵융합로 건설의 기치를 내리지 못한다. 그렇게 <판도라>는 정치적 올바름이 곧 영화적 성취일 수는 없다는 또 하나의 사례로 남고 만다.
실로 안타깝게도.
지난 몇년간 세상이 워낙에 세상이었던지라, 한국의 헬스런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담은 각종 영화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은 현 정국의 직전까지 누적되어왔던 갑갑함과 좌절과 분노에 대한 환기구의 역할을 일정 정도 담당했음과 동시에, 일종의 소극적 의사표현의 창구 역할까지도 해왔다. 정작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어야 할 기관과 단체들이 대부분 침묵하거나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동안, 그런 영화들 덕분에 우리는 한 모금 숨이라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우리가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사회비판물’들이 정작 스스로의 영화적·미학적인 동어반복과 자기복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못했고, 또 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딱히 <판도라>의 경우만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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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회비판물’들이 정작 스스로의 영화적·미학적인 동어반복과 자기복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못했고, 또 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딱히 <판도라>의 경우만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뉴(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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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천외한 현실뿐만 아니라
물론 복제와 반복은 상업영화의 불가피한 속성이다. 하지만 요 몇년 동안 등장한 한국의 ‘사회비판물’들은 마치 검찰·경찰·재벌·정치인·언론인·양아치 등등이 적힌 카드들(여기에 최근에는 ‘재난’ 카드가 새롭게 합류했다)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그중 몇개를 적당히 뽑아 순서와 비중을 조합한 뒤 그중 대표선수 격인 영화들의 어법이나 캐릭터를 적당히 변주해 만들어진, 말하자면 입고 있는 옷과 이름만 다른 쌍둥이 같은 형국이다. 그 매끈하고 유려한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도둑들>의 <내부자들> 버전(또는 그 반대)이라는 인상 외에는 아무런 새로움도 가질 수 없었던 <마스터>를 관람하고 난 지금, 그런 느낌은 더욱 떨칠 수 없다.
이제야 조금 열리기 시작했을 뿐인 현실의 판도라 상자 앞에서, 각종 헬조선 계열 영화들이 그리도 공들여 묘사해왔던 세계들은 잘해야 머그잔 속 소용돌이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제 한국 영화 앞에는 유신이라는 판도라 상자 속에서 튀어나온 기상천외한 현실이라는 괴물과의 상상력 대결이라는, 쉽지 않은 진검승부가 던져졌다. 더불어 예전처럼 쉽게 데려다 썼다가는 오히려 잡아먹혀버리고 말 더욱 무서운 괴물과의 승부, 즉 매너리즘과의 승부 또한.
▶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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