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11.18 19:05 수정 : 2016.11.18 19:32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줄리에타>

<줄리에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앨리스 먼로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각본을 쓰고 연출을 했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선택은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성찰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던 경력으로 볼 때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좋은 소설을 더 좋게 만든 영화는 한 편도 생각나지 않지만, 형편없는 소설이 훌륭한 영화로 바뀐 경우는 더러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글쎄, 안타깝게도 대개의 경우 이 말은 틀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다름도 아닌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다름도 아닌 앨리스 먼로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영화가 등장했다. 더구나 앨리스 먼로는 맨부커상과 노벨상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로 그 훌륭함이 ‘공증’된 작가다. 물론 유명 문학상을 탔다고 해서 무턱대고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최근 들어 노벨 문학상은 심상찮고도 그다지 쌍수 들어 환영하기는 어려운 ‘파격’을 선보이더니 급기야 밥 딜런에게 상을 안김으로써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에 흙을 붓는 듯한 형국을 연출하기까지 한지라(여기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뭘 말하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그걸 ‘공증’이라고 말하기는 적잖이 찌뿌둥한 측면이 있긴 하다만, 그래도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을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분류하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으리라고 본다.

질문으로 가득 찬 영화

전작 <아임 소 익사이티드>에서 과도한 자유분방의 오류를 범한 측면이 다소 없지 않았던 알모도바르 감독의 이러한 선택은,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성찰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던 경력으로 볼 때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의아한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라는 숙명에 애처로우리만큼 단단히 붙들려 있다”는 밀란 쿤데라의 지적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앨리스 먼로의 작품에는 캐나다의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과 광활한 땅덩어리가 낳은 청회색의 서늘한(또는 싸늘한) 체취가 구석구석 배어 있고, 그것은 아무래도 에스파냐 사람다운 강렬한 원색과 직설법을 즐겨 쓰는 알모도바르의 성향 및 기질과는 그다지 간단히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 원작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연출
모녀관계와 모성에 대한 탐구
질문들로 이어가는 미스터리

‘불친절한’ 전개는 부담이지만
감독 특유의 문체가 주는 재미
거장의 새로운 시도와 가능성
“두번 보는 것도 가치있는 일”

아니나 다를까, 영화의 모티브가 된 세 편의 단편을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배경만 바꾼 채 그대로 영화로 옮기려고 했던 알모도바르의 애초의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결국 그는 배경을 스페인으로, ‘줄리엣’인 주인공의 이름을 ‘줄리에타’(사실 ‘훌리에타’라고 적는 것이 옳지만)로 바꾸고 난 뒤에야 이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영화는 스크린을 가득 채운 붉은 천으로 시작된다. 붉은 천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일견 아네트 메사제의 설치작품의 일부인 것 같기도 한 그 ‘붉은 커튼’이 무엇을 클로즈업한 것인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카메라가 서서히 줌아웃 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한 여성의 셔츠였고, 그것을 움직인 것은 그녀의 호흡이었음을 알게 된다.(그 여성은 물론 주인공 ‘줄리에타’다.)

가구도 미처 들이지 못한 새집의 거실 한가운데에서 줄리에타는 딸에게 지난 시절을 낱낱이 되돌아보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그녀는 지금 조각상 하나를 버블랩으로 포장하고 있는 중이다. 단순화되고 일부가 잘려 있는 남성의 몸의 조각상이다. 그 조각상은 이삿짐 박스인 듯 보이는 상자 안에 조심스럽게 담긴다. 곧바로 이어서 그녀는 책상서랍에서 꾸깃한 봉투 하나를 꺼내든다. 파란색 봉투는 그녀의 빨간 옷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녀는 봉투를 펴보지도 않은 채 곧장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뭔가 불길한 물건을 치워버리듯.

그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왜 그렇게 차갑게 버림받은 것인가? 조각상은 왜 그녀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인가? 그것에 얽힌 사연은 무엇인가? 이렇게 골키퍼가 공격수들에게 차 날린 공처럼 관객들에게 던져진 질문으로 가득 찬 오프닝으로, 영화는 이 이야기가 크고 작은 질문들을 계속 쌓아나가면서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알린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미스터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줄리에타라는 여성에 얽힌 미스터리다. 애인과 함께 포르투갈로 오랜 여행을 떠나려던 줄리에타는, 우연히 딸의 옛 친구를 만나고 딸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돌연 모든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는 예전에 딸과 살았던 듯한 건물에 집을 얻는다. 가구도 미처 들이지 못한 새집의 거실 한가운데에서 딸에게 지난 시절을 낱낱이 되돌아보는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 줄리에타에서, 영화는 미스터리의 출발점인 과거로 시점을 옮겨간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줄곧 지배해온 상실감과 죄책감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필자가 영화의 내용을 이리 상세히 적는 이유는 이 10분 남짓 되는 도입부에 영화의 핵심적인 질문과 정보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관객들은 영화의 시작 뒤 그 스타일과 리듬을 따라가는 데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대개의 영화들은 그 워밍업의 시간 동안 요란한 액션이나 충격적인 볼거리로 관객들의 뇌혈관에 시청각적 각성제를 듬뿍 주입하거나, 카드를 한 장씩 뒤집는 포커딜러처럼 영화의 세계에 서서히 적응하도록 상냥하게 안내한다. 하지만 <줄리에타>는 그렇지 않다. 다른 알모도바르의 작품들과 비교해 봐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어찌 된 일일까.

그 원인은 아무래도 앨리스 먼로의 문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앨리스 먼로의 문체에 대해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극히 무모한 일이겠지만, 경박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한다면, 그녀의 문장의 힘은 많은 부분 ‘굳이 밝혀 말하지 않음’에서 온다고 본다.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고른 독백 같은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독자들은 미처 못 본 구덩이를 디뎠을 때 같은 ‘엇’ 하는 현기증을 느낀다. 상당히 긴 시간이나 상당한 무게를 가진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고 나아감으로써 생기는, 문장이나 문단 사이의 낙차 때문이다. 그런 낙차를 몇 번이나 겪고 난 뒤 독자들은 그 짧은 이야기에 한 인생의 무게가 통째로 담겨 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그렇게 작가는 이야기 안에서 그 이야기만의 시간과 중력을 확보한다.

<줄리에타>에서도 그런 먼로의 문체로부터 힌트를 얻은 듯한 전개들이 눈에 띈다. 젊은 시절의 줄리에타가 딸의 아버지인 ‘소안’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그의 아내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는 방식이라든가, 그녀가 어린 딸을 안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방식 등에서 그 영향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야기 전개방식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감독의 존경의 흔적이다.

하지만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문학의 방식을 영화에 적용하는 것은 그다지 간단한 일은 아니다. 영화는 시간의 지배를 받는 매체이지만 책(문자)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먼로의 소설을 읽는 도중, 우리는 몇 번이고 앞 페이지로 돌아가 현기증에 가까운 낙차를 안겼던 ‘결정적인 순간’들을 되짚어볼 수 있지만,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리와인드 버튼을 누를 수 없는 극장에서는 그렇다. 그런 점을 알모도바르 감독 자신도 잘 알고 있어서, 자신의 영화를 본 관객이 더 쉽고도 저렴하게 영화를 두 번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물론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은 기꺼이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수고다. <줄리에타>에서도 그렇다.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를 드러내는 강렬한 색채의 사용, 곳곳에 배치되어 인물과 시간들을 꿰어 잇는 상징들, 그리고 배우들의 캐스팅과 연기까지, 이 영화는 알모도바르 특유의 문체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 ‘줄리에타’가 <오디세이아>를 강의하며 거론하는 오디세우스와 칼립소의 이야기를 이후 그녀가 겪을 운명의 은유로 제시하는 방법이라든가, ‘젊은 줄리에타’ 역의 아드리아나 우가르테가 ‘나이 든 줄리에타’ 역의 에마 수아레스로 바뀌는 시점의 선택과 그 장면에서 평범한 수건 한 장을 마술사의 보자기처럼 사용하는 연출 등은 알모도바르를 보는 즐거움을 새삼 느끼게 한다.

알모도바르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라도

하지만 영화는 수많은 상징과 사연들을 흩어놓는 사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줄리에타만큼이나 영화의 중심에 있는 그녀의 딸 ‘안티아’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이 영화가 갑자기 까닭 모르게 떠나버린 딸 안티아가 줄리에타에게 안긴 상실감과, 그 상실감과 함께 파묻어버린 죄책감, 그리고 그에 대한 직시와 극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영화는 마땅히 안티아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야 했다. 관객에게 친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비록 그것이 이 영화가 존경을 표하고자 했던 먼로의 문체로부터 멀어지는 길이 되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알모도바르는 ‘거장’이라는 수식어 따위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알모도바르 최고의 작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적이건 아니건 자신만의 세계를 이뤄낸 예술가의 새로운 모색은 언제나 우리를 북돋워준다. 그것은 모든 것이 진부한 반복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 존재의 모퉁이 너머에 미처 시야가 미치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이야말로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안이다.

▶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