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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07 19:08 수정 : 2016.10.07 19:44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그물>

류승범이 연기한 북한 어부 남철우는 남한의 ‘발전상’에 감동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뉴(NEW) 제공

스크루에 그물이 엉켜 조각배를 타고 남으로 표류하게 된 북한 어부의 단순한 부탁 한마디 “나를 북으로 돌려보내 주시라요”를 헤드카피로 삼고 있는 <그물>은, 그 카피만큼이나 단순해 보이는 첫 장면으로 시작된다. 새벽 첫 일을 나가는 어부는 가짓수가 몇 되지도 않는 거친 찬에 밥술을 뜬다. ‘당신은 새벽에 제일 멋있어 보인다’는 아내의 말에 아내를 안는다. 궁색할 정도로 비좁은 단칸방 한구석에서 어린 딸이 잠든 척 부부를 훔쳐본다. 벽에 붙은 ‘장군님 식솔’이라는 붉은 구호와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가 이들을 내내 내려다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부에게 딱히 어떤 의미를 갖지는 않는 것 같다. 과장을 좀 보태 말하면 그것은 좀 독특한 벽지에 가까워 보인다.

누가 그물을 움직이는가

그리고 어부가 먹는 밥은 하얀 쌀밥이다. 어부는 부유나 풍요 같은 단어와는 완전히 먼 거리에서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핍박이나 기아선상 같은 단어에 근접해 있지도 않다. 영화는 그렇게 어부의 일상을 덤덤히 보여준다. 그렇다. 북한의 어부에게도 일상은 있다. 그것이 단순해 보이지만 우리가 자주 잊고 있는 또는 눈을 돌리려는 사실, 그리고 이 영화가 사실상 가장 주목하고 있는 사실이다. 북한에도 일상은 있다.

거기에서 영화는 한 가지 ‘만약’을 던져 넣는다. 만약 그 어부가 북한에서의 자신의 일상에 만족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날 마음이 없다면?

곧 어부의 조각배 스크루에는 그물이 엉키고, 어부는 남쪽으로 흘러간다. 정치적 의도는커녕 의도 그 자체조차 없는 사고다. 그 또한 일상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어부의 일상은 거기까지다. 남한 정보당국에 인계되면서부터 “나를 북으로 돌려보내 주시라요”라는 일상적 부탁은 이제 정치적 요구로 변조돼버린다. 어부는 자신의 의도와 의지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세계에 발을 들였다. 단 1보의 중립지대도 없이 모든 것이 남과 북, 좌와 우, 파랑과 빨강, 빛과 그늘,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군과 적군으로 나눠져 있는 이 양분법의 세계에서 어부는 금을 넘었다. 금을 넘는 순간 어부는 그물을 건드렸고, 그물을 잡은 손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어부는 일상에서 실족한 대가로 카프카적 미궁의 한가운데로 떨어진다. 어부는 이제 물고기가 된다.

사고로 남한에 표류한 북 어부
포섭 나선 남한 정보요원에게
“북으로 돌려보내 주시라요”
양분법 세상 향한 비판과 은유

호불호 극명한 김기덕식 통찰
‘15세 이상’ 판정에 더 주목
감독은 “다행스럽고 고맙다”지만
우월감에 갇힌 어른 위한 영화

영화는 그 그물 자체와 그물을 움직이는 손에 집중한다. 서울로 호송하는 차 안에서 주인공 ‘남철우’(류승범)는 눈을 뜨려 하지 않는다. 남한정보국 요원들은 남철우의 눈을 뜨게 하려 한다. 남한에서 가장 높고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아질 건물 옆을 지날 때 그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키고 싶어 한다. 문자 그대로 개안시키고 싶어 한다.

‘북한의 거짓선전과는 다른 남한의 눈부신 발전상’ 같은 단어로 대변되어왔던 그 개안을 향한 열망과 확신은 정보국의 안에서도 계속된다. 젊은 말단직원 ‘오진우’(이원근)는 남철우가 입고 있던 (남한에서라면 노숙인들조차 입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남루하고도 투박한 방한복 대신, 최근 가장 핫한 브랜드의 트레이닝복을 자랑스럽게 내놓는다. 그 밑에는 우리 대부분이 은연중에 품고 있을지도 모를 우월감이 깔려 있다. 우월감은 최신 브랜드, 고층건물, 대한민국 최고, 세계 다섯 번째 같은 단어들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그중 정작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오진우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여 그는 “왜 남의 옷을 함부로 버립네까?”라는 남철우의 반발이 황당하고 당혹스럽다. 그의 우월감은 가족과의 일상, 즉 진짜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되찾으려는 생각뿐인 남철우의 단순한 열망 앞에서 간단하게 휘발돼 버린다. 그렇게 남철우를 개안시키려 했던 오진우의 개안이 거꾸로 시작된다. 그것은 자족적 안온함을 과시적 우월감과 바꿔버린 지 오래인 우리들 자신의 개안이기도 하다.

북한 어부 남철우의 조각배 스크루에 그물이 엉키고 그는 남쪽으로 흘러간다. 정치적 의도는커녕 의도 그 자체조차 없는 사고였다. 뉴(NEW) 제공

하지만 이 젊은 정보국 직원 ‘오진우’라는 캐릭터는 사실상 대단히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우리는 그런 정도로 ‘신념’이 흔들릴 인물이 애초에 정보국의 직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지 않는다. 더구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문어체식 직설법 대사들은 그 비현실성을 한층 더 부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오진우’와는 다른 현실적인 캐릭터들, 즉 ①“생긴 게 딱 간첩이네”라는 대사부터 깔고 들어가며 간첩 만들기 또는 ‘잠재적 간첩’ 적발하기에 일로매진하는 폭력 조사관(김영민)과 ②“아무리 그래도 독재국가로 다시 돌려보내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라는 인도주의적인 확신하에 당사자가 뭐라고 하건 자유대한의 품으로의 전향을 끝까지 추진하도록 채근하는 고위급 책임자(박지일) 등도 구비해 두고 있다. (이 캐릭터들이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얼마 전 개봉된 탐사보도 다큐 <자백>에서도 상세히 추적된 바 있는 남한정보국의 간첩조작 사건들이 현실 속의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최근에도 이런 시도로 인해 대통령의 유감 표명까지 있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 칼럼의 주요 분야가 아니므로 생략.)

그런데 사실 고문 정보국 직원부터 남파간첩까지, 이러한 캐릭터들이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하는가 여부는 핵심이 아닐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모든 작품은 기본적으로 우화이고, 그런 면에서 이런 인물들이 얼마나 현실에 충실하게 묘사되고 있는가보다는 이 인물들의 갈등과 긴장이 우리의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은유하고 있는가가 핵심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차마 스포일러가 될까 저어되어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리지 못할 후반부에서 이 영화가 나아가고 있는 지점은 지금까지의 ‘정권비판적’ 영화들이 건드리지 않았던(또는 아예 보지 않았던) 경계선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리고 영화는 특정 정권이 아닌 권력 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렇다. <그물>이 달성해낸 가장 큰 성취는 어디를 가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양분법의 세계를, 가장 극단적인 양분법이 지배하는 세계인 ‘남한 대 북한’의 세계를 통해서 해체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양극단은 서로 통한다’라는 경구도 있듯 <그물>이 드러내는 남북의 모습은 권력이라는 전압을 유지하기 위한 배터리의 양극이다. 구체적인 현실보다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또는 사회와 개인의 긴장과 갈등에 주로 초점을 맞춰왔던 김기덕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한반도의 구체적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물>은 상당히 전환점적인 영화로 평가되고 있는 듯한데, 사실 의도되었든 아니든 이 영화 역시도 집단과 권력과 개인의 존재방식, 즉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또 하나의 김기덕식 통찰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처럼 쉽사리 머릿속을 빠져나가지 않는 울림을 남긴다.

‘불편’했던 김기덕의 완충지대

워낙에 맵고 짠 영화적 자극이 즐비한 요즘엔 사정이 좀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김기덕 감독은 한국에서 호불호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감독 중 한 명일 것이다. 류승범이라는 배우의 지명도와 신뢰감이 그 양극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영화에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혹 평소에 감독의 작품들 소재나 표현이 종종 불러일으켰던 ‘불편함’ 혹은 ‘불쾌함’ 때문에 불호 쪽에 속하셨다면 <그물>의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에 주목해보셔도 좋겠다. 어떤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15세 이상 등급 판정을 받자 “내 영화가 그렇게 유치해?”라며 주위에 묻고 다녔다고 하던데, 의외로 김기덕 감독은 이번 등급판정에 대해 “다행스럽고 고맙게도”라는 언급까지 하고 있다.

뭔가. 혹 이것은 십년이 넘도록 한국 영화 상공을 뒤덮고 있는 천만영화 골드러시의 열파가 김기덕 감독마저 흐물흐물 녹여버린 결과인가 하면, 그럴 리는 만무하여 “우리 청소년들이 우리의 슬픈 현실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미래를 지킬 수 있는 고민을 해볼 기회가 되었으면”이라는 것이 이 15세 관람가 등급 환영에 대한 감독의 변이다.

그러나 사실 <그물>은 청소년보다는 오히려 18세 이상 성인들이 관람해야 할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의 일상을 가득 채운 수많은 양분법들과 그 경계선으로 짜인 그물의 존재를 확인하시길 바란다는 말씀으로 <그물>에 대한 감별 소견에 갈음한다.

▶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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