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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2 19:01 수정 : 2016.08.12 19:35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덕혜옹주>

‘왕실’ 넘어 ‘독립’의 아이콘으로
민족의 수난 그 자체를 형상화
의도 지나쳐 설득력 반감 역효과
‘캐릭터 전형성’ 아쉬움 남겨

실존인물 토대로 그린 ‘김장한’
로맨스 영화 한 컷 오려낸 듯
‘허진호 스타일’ 지워버린 작품
‘천만 영화’ 평준화 상징할 수도

<덕혜옹주>는 앞으로 닥쳐올 덕혜옹주의 수난과 비극을 민족의 수난 그 자체로 끌어올려 관객들의 연민과 울분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포석을 해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덕혜옹주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티브이 등을 통해 꽤 널리 알려져 있다. 게다가 영화의 원작소설은 종이책 시장이 극도로 위축된 요즘 같은 시기에 대단히 이례적이게도 100만여부가 판매된 베스트셀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덕혜옹주>의 헤드카피는 ‘덕혜옹주를 아십니까?’다.

또 한편으로, 영화의 도입부에는 ‘이 영화는 실화에 허구적 요소를 가미했으므로 사실과 다른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내용의 자막이 뜨고 있다. 이 둘의 공존이이야말로 <덕혜옹주>가 취하고 있는 입장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영화는 ‘그때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가’라는 관객들의 호기심 해소, 즉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역사적 기억의 공백을 (비교적 쉽고 빠르게) 메우고자 하는 관객들의 요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그 과정을 인내나 고통의 과정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재미를 지닌 과정으로 내놓는 것을 자신의 입장 내지는 목표로 삼고 있다.

<덕혜옹주>는 주인공을 ‘왕실의 아이콘’을 넘어 ‘독립의 아이콘’으로 그려내려는 의도를 너무 날것으로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실화 2 픽션 8의 배분 구도

그것을 위해 영화가 내린 선택 중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① 이야기의 대부분을 덕혜옹주의 결혼 전으로 집중시켰다는 점, 그리고 ② 그녀의 상대역인 ‘김장한’ 캐릭터의 투입을 꼽을 수 있다.

일단 영화는 ①을 통해 덕혜옹주가 정신적으로 이미 무너져 있던 (일본 쪽에 의한 정략)결혼 생활에 대한 얘기를 최소화함으로써, ‘조선왕실의 아이콘’으로서의 덕혜옹주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이 기간의 덕혜옹주는 일본 황실에서 보낸 기모노를 보란 듯 수발궁녀에게 입히고 공식석상에 나타나고, 틈만 나면 조선인을 위한 한글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일본에 끌려간 뒤엔 실제로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들을 방문해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왕실의 아이콘’을 넘어 ‘독립의 아이콘’으로서의 행보를 선보인다. 그렇게 영화는 앞으로 닥쳐올 덕혜옹주의 수난과 비극을 민족의 수난 그 자체로 끌어올려 관객들의 연민과 울분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포석을 해둔다.

그러나 아쉽게도 <덕혜옹주>는 그러한 자신의 의도를 너무 날것으로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말하자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조선 버전을 보는 듯한 덕혜옹주의 모습은 ‘역할은 있으되 성격은 없는’ 캐릭터의 전형처럼 보이는바, 어차피 덕혜옹주의 비극이 그녀 개인만의 비극으로 치부될 수 없음이 명백하고, 또한 우리 한국인들이 그에 대해 보일 감응력은 이미 세계 최고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굳이 그러한 의도의 노골적인 노출이 필요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못내 떨칠 수 없다.

이는 <귀향>을 보았을 때도 똑같이 느꼈던 안타까움이기도 한데, 예컨대, 거대한 일장기를 배경으로 연설을 한 덕분에 시뻘건 동그라미에 파묻히다시피 한 덕혜옹주가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들을 향해 조선말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라는 대사를 날리는 장면에서, 그 뒤로 깔리던 음악이 단조에서 장조로 톤을 바꾸며 민족적 자긍심을 기리고 북돋는 것으로도 충분한 마당에, 연설을 듣던 노동자가 아리랑을 우렁차게 봉창할 필요까지 있었는가라는 생각은 끝내 지울 수 없었다는 얘기다. ‘사실 여부’보다는 ‘현실감 여부’가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이런 영화에서 말이다.

그리고 덕혜옹주 캐릭터의 이러한 전형성은 그 상대역인 ‘김장한’(박해일) 캐릭터 역시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있다. 사실 <덕혜옹주>가 보유한 ‘(실화도 소설도 아닌) 영화만의 것’ 중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 다름 아닌 이 ‘김장한’이라는 캐릭터의 투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잘 아시겠지만 이 ‘김장한’이라는 인물은 실존인물로서, 고종의 밀명에 의해 실제로 덕혜옹주의 부마로 내정되어 있다가 일제 쪽 압력에 의해 혼담이 무산된 소년이다. 그리고 그의 형인 ‘김을한’씨는 1962년 당시 서울신문 기자로서 세상으로부터 잊힌 채 일본의 정신병원에 유폐되어 있던 덕혜옹주를 찾아내 귀국시킨 장본인인바, 영화 속의 ‘김장한’ 캐릭터는 이 형제를 한 인물에 통폐합한 골격 위에 ‘독립군의 영친왕 만주망명 계획’이라는 실화를 살로 얹어 만들어졌다.

이 실화 2 픽션 8의 인물을 통해 <덕혜옹주>는 그 허리에 ‘독립군 서스펜스 액션’ 및 ‘보디가드 로맨스’라는, 상당한 대중적 견인력을 가진 부스터를 장착하게 된다. 이는 실제 사실만을 액면 그대로 충실히 따르는 선택을 했더라면 자칫 침울하게 흐를 수도 있었던 이야기의 중반에 활력을 보강하는 아드레날린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현명한 포석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발목을 잡는 것은 김장한이라는 캐릭터의 지나친 이상화다.

일본군사학교를 차석 졸업한 엘리트 일본군 장교이자, 그 신분으로 독립투사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은폐하고 있는 이중스파이. 더구나 옹주에게 슬쩍 윤심덕의 레코드를 선물할 줄도 아는 센스와 기품을 지녔음과 동시에, 1 대 20 정도의 총격전도 소화해낼 수 있는 무공의 소유자이기도 한데다, 30년 세월을 뛰어넘는 충절과 의리까지도 보유한 그가 ‘조선의 마지막 왕녀’의 수호자로서의 각종 자격요건을 두루 구비하고 있음을 우리는 능히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또는 그렇기에) 그는 실제 역사 속에서 숨 쉬었던 한 명의 인간이라기보다는 로맨스 만화의 한 컷에서 오려내 온 그림처럼 보인다.

그런 식으로 영화는 두 남녀 주인공 곁에 코믹전담 보조캐릭터를 1인씩 배치하며, 그들 모두의 맞은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빛부터 구두코까지 속속들이 악역인 1인을 포진시켜둔다. 그 올인원 악역이 심정적으로는 일본인보다 오히려 더 가증스러울 친일파 조선인일 것임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사 또한 일말의 에누리도 없이 모든 것을 깔끔하게 설명해주며(예컨대, 김장한과 그의 조력자 ‘복동’(정상훈)이 후일 나누는 대화인 “후회되십니까, ‘조국’ 때문에 이리 되신 것?” “아니” “저도 아닙니다” 등) 음악은 모든 장면에서 느껴야 할 감정을 친절하게 가이드해준다. 이런 특징들은 최근 한국영화, 특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거의 산업표준처럼 보여주고 있는 익숙한 특징들이지만 그것들이 못내 낯설게 보였던 것은, 그렇다, 바로 ‘허진호’라는 <덕혜옹주>의 또 하나의 키워드 때문이다.

‘영화 속 김장한’이라는 캐릭터는 자칫 침울하게 흐를 수도 있었던 이야기의 중반에 활력을 보강하는 아드레날린으로 기능하지만, 마치 로맨스 만화의 한 컷에서 오려내 온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 상공 뒤덮은 ‘천만’ 열파

하긴 그렇다. 허진호 감독이라고 하여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 사이를 무한왕복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더구나 감독은 앞에서 말했던 대중적 지향과 함께, 이제껏 다뤄왔던 ‘개인과 개인’이라는 범주에서 ‘개인과 역사(그것도 개인을 압도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무게로 짓이기는)’ 범주로 외연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감독은 <덕혜옹주>에서 자신의 필체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드러내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러한 선택은 ‘허진호 팬’의 범주를 넘어선 관객들에게 ‘덕혜옹주를 아십니까?’라는 말을 걸기 위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더 많은 관객들이 ‘덕혜옹주(비록 상당한 픽션이 가미된 버전이지만)를 알게’ 되고, 그녀의 아픔 앞에 지못미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것이다. 덕혜옹주와, 위안부 할머니들과, 우리가 아는, 또는 알지 못하는, 또는 잊고 지내는 모든 고통들은 충분히 기억되고 위무될 자격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상공을 온통 뒤덮고 있는 ‘천만’이라는 열파 아래에서 모두 엇비슷한 모양새로 다림질되어가고 있는 한국 영화들을. 모든 영화가 ‘천만 영화와 아닌 영화’로 나뉘고 있는 이 골드러시에서 점점 희귀해져가는 잔잔하고 속 깊은 시선들을.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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