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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4.22 20:42 수정 : 2016.04.23 09:46

영화 <브루클린>의 가장 큰 특징은 근래 보기 드문 반듯함이다. 195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아일랜드 출신 여주인공과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남자의 온화하지만 결코 진부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전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브루클린

바야흐로 춘사월. 벚꽃잎만큼이나 하늘 가득 페로몬 흩날리는 계절을 맞이하여 극장을 찾은 각급 연인들이 자칫 부적절한 영화 선정으로 인해 연애지심을 발효 숙성시키기는커녕, 대체 누가 이 영화 보자고 그랬어, 난 아닌데, 뭐야 그럼 나란 말이야,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등등의 분란의 불씨를 댕기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여기 ‘멜로’를 표방한 또 하나의 영화 <브루클린>에 대한 긴급 감별에 착수한다.

일단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근래 보기 드문 반듯함이다. 일단 줄거리 잠깐. 때는 1951년. 주인공인 아일랜드 시골마을 처자 ‘에일리스’(세어셔 로넌)는, 동생을 더 큰(그리고 더 나은) 물에서 살게 해주고 싶은 언니의 뜻에 따라 혈혈단신 뉴욕에 건너가게 된다. 에일리스는 대서양을 건너는 여객선에서부터 혹독한 수업료를 내면서 새 삶에 적응하기 시작하는데,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면서도 낮에는 백화점 점원, 밤에는 야간대학생으로 그녀는 하루하루를 착실히 살아나간다. 그런 그녀 앞에 소년의 미소를 가진 이탈리아계 청년 ‘토니’(에머리 코언)가 나타나면서 그녀의 뉴욕에서의 생활도 서서히, 이하 생략.

위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듯 에일리스는 반듯하고도 똑똑하고도 강인한 처자인데, 가뜩이나 그런 캐릭터가 주경야독을 하며 꿈꾸는 직업은, 수많은 영화에서 ‘답답하고 따분한’의 동의어처럼 취급되어온 회계사다. 그런 에일리스와 사랑에 빠지는 토니의 직업 또한 대단히 흥미진진하다고 볼 수는 없는 배관공인데, 이들이 첫 데이트에서 채택한 화제는 다른 것도 아닌 서로의 직업인바, 이들은 데이트 석상에서 ‘복식부기’나 ‘상법’ 같은 단어를 웃고 즐기며 주고받는, 로맨스 영화로서는 극히 희귀하면서도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더구나 에일리스는 그 매끈한 이마 한가운데에 투명 먹물로 ‘일심’(一心) 두 글자를 아로새긴 듯, 거의 청교도적을 넘어 수도승적 바른 생활을 강조하는 하숙집 주인장 아주머니의 생활지침을 거의 어기는 바 없는 모범생인데다, 그 하숙집 사상 최초로 ‘시험 합격’의 영예까지 안음으로써 그녀의 각별한 애호를 받는 등등 반듯하고 착실한 처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후반부에 나오는 그녀의 대사를 빌리자면 “조용하고, 교양 있고, 매력적”(calm and civilized and charming) 그 자체인 것이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토니 캐릭터 역시 이제껏 <대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좋은 친구들> 등등의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뉴욕 사는 이탈리아 남정네’들과는 한국-브라질만큼이나 거리를 두고 있다. 소년적인 미소와 약간은 어눌한 말투, 그리고 부드러움과 수줍음까지 보유한 온순무쌍한 ‘블루칼라 젠틀맨’인 그와 에일리스는, 제법 대하서사적 시간대를 커버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까지 단 한 차례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단 한 차례도.

영화의 촬영, 미술, 의상 등등 또한 이러한 반듯한 분위기를 탄탄히 보좌하며 고조시킨다. 브루클린 브리지 화면 가득 자리잡고 있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의 포스터에서 바로 추출해온 듯한 호박색을 바탕에 깔고 의상, 세트 등에 이른바 ‘아이리시 그린’을 곳곳에 새겨 넣고 있는 화면은 연하고(tinted) 부드러운 색조를 잃지 않는 등등, 한마디로 이 영화의 세계는 반듯함과 온화함의 세계다.

그럼에도!

영화는 진부하지 않다. 따분하지도 고리타분하지도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얼굴 클로즈업 자체만으로도 이야기 하나가 족히 만들어지는 여우 주연 세어셔 로넌의 존재 및 연기다. 더불어 주연부터 조연까지 구석구석 적절하고도 절묘한 캐스팅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는 물론 연극으로 경력을 다져 온 감독 존 크롤리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섬세한 연출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예를 들어, 에일리스가 향수병에 시달리며 식당에서 홀로 식사하는 장면을 보라. 에일리스는 ‘아이리시 그린’의 코트를 입은 채 ‘아이리시 그린’으로 칠해진 벽에 걸린 거울에 비쳐(또는 갇혀) 있고, 거울에 비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른 색의 ‘얼굴 없는’ 사람들이다).

거기에, 상당히 대하서사스러운 원작 소설을 두 시간 못 미치는 시간 안에 노련하고도 알맹이 있게 각색해낸 닉 혼비의 솜씨도 가세한다. 아시다시피 닉 혼비는 그 자신이 <어바웃 어 보이> <하이 피델리티> <롱 웨이 다운> 등의 멋진 작품을 쓴 소설가다. 언젠가 그는 “친구들이 내 소설에 대한 칭찬이랍시며 한 얘기 대부분은, 소설엔 없고 영화에만 있는 장면에 대한 얘기였다”고 투덜거렸는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그가 마침내 한풀이(또는 복수?)에 성공한 것 같아 내심 혼자 흐뭇했다.

더욱이 이 영화를 관람하시는 즐거움을 훼손치 않고자 이 글에선 거론조차 하지 않은 후반부에 들어서면 <브루클린>은 자신이 단순한 사랑 영화가 아님을 (예의 그 반듯하고도 온화한 톤과 볼륨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하지만 뭐, 됐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훌륭하다. 사랑을 포함해서 이 영화가 경험(!)하게 해주는 감정들은 우리가 삶에서 접하는 거의 모든 감정들이다. 그중 어느 것도 강제 압출되거나 합성 감미되지 않는다. ‘빈티지’ 사카린을 잔뜩 뿌린 플라스틱 사랑을 입안으로 욱여넣는 영화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더글러스 서크의 후계자’를 자임하며 목에 잔뜩 힘준 ‘복고’ 멜로들이 과대평가받고 과잉해석되고 있는 요즘, 이 구식 영화가 발하는 온화하고 자연스러운 빛은 훨씬 깊고 큰 공명을 끌어낸다.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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