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의 핵심은 마지막 30분에 있다. 차별과 편견에 대한 우리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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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주토피아
<겨울왕국>이 개봉될 당시 주최 측(디즈니)에서는 ‘어른들도 좋아할(나아가, 어른들이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전개했었다. 그 귀결은 다들 잘 아시다시피 마주보는 도돌이표에 갇힌 듯 도처에서 무한반복되며 수많은 어른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렛 잇 고’의 환란이었다(죄송, 어린이 여러분. 물론 이 글을 읽고 있지는 않겠지만).
<인사이드 아웃>도 아닌 <겨울왕국>에 왜 굳이 그런 캐치프레이즈가 붙어야 했던지는 여전히 미궁인 가운데, 그보다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정작 이런 캐치프레이즈가 강조되고 또 강조되어야 마땅했을 <주토피아>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런 마케팅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관객들에 의해 그 어른 애니로서의 정체가 서서히 밝혀지며 흥행 역주행을 하더니, 급기야 지난주에 박스오피스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하고야 만다. 주최 측의 본의 전혀 아닌 자해성 연막을 뚫고 순전히 입소문의 힘으로 이 영화가 발견된 현상은 확실히 기억해둘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주최 측의 홍보 말고도 이 영화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영화의 관람등급이다. 아시다시피 <주토피아>의 관람등급은 ‘전체관람가’다. 하지만 어떻게 보더라도 이 영화는 전 연령대에게 골고루 ‘관람가’한 영화가 아니다. (다시 한번 죄송, 어린이 여러분, 이다만) 어린이 관객들은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바의 반도 소화 및 흡수하지 못할 것이므로.
영화의 배경 설정부터가 그렇다. 주인공인 여성토끼 ‘주디’가 경찰이 되기 위해 향하는 ‘주토피아’라는 도시는, 다양한 종의 동물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한다고 주장되고 있는) 도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다인종과 그를 둘러싼 정치공학이 사회정치적 이슈의 중심에 있는 미국 사회에 대한 동물원적 번안이다.
더구나 이곳에서 ‘주디’가 마주치게 되는 사건은 다분히 성인적 소재인 연쇄실종 사건인데다가, 그 추적 과정은 동물 액션 및 개그를 벗기고 본다면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풍의 전개를 취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미스터 빅’이라는 마피아 보스 캐릭터는 아시다시피 <대부>의 비토 코를레오네(말런 브랜도)를 러시아 버전으로 번안한 캐릭터인데다가, 그가 살고 있는 저택 입구를 막은 육중한 쇠사슬부터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보스의 딸 같은 설정도 모두 <대부>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인데, 필자가 알기에 <대부>는 적어도 요즘 아동들의 필람 아이템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더욱이 그 유명한 나무늘보 캐릭터도 그렇다. 이들의 직업이 다름도 아닌 교통국의 창구 직원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법적으로 운전면허 발급이 불가한 아동 여러분들이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여기에서 ‘이해’라 함은 물론 나무늘보의 범상찮은 말투 및 동작에 단순 낄낄거리는 것이 아닌, 웃음과 울화가 뒤엉킨 희한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을 말함이다.
세세한 디테일로 들어가면 더욱 그렇다. 주토피아 시장님의 보좌관 양(羊)인 ‘벨’이 슬쩍 날리는 “시장님이 당선되려면 양들의 표가 필요했거든요” 같은 대사는 물론이려니와, 투신자살로 유명한 동물인 레밍 떼가 줄지어 우우 몰려나오는 건물이 ‘레밍 브러더스 뱅크’(물론 리먼 브러더스의 패러디)인 것 등등은 아동 관객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이해하면 곤란하기까지 한 농담이라 할 것이다.
그보다 더 사소한 디테일로는, 주인공 토끼 ‘주디’가 쓰고 있는 핸드폰 화면 상단에 찍힌 이동통신 회사명인 ‘PB&J’가 있다. 물론 ‘AT&T’의 패러디인 이 회사명은 미국 플로리다 대학(UF) 학생들의 흑인 저널리즘 조직인 ‘프로그레시브 블랙 앤 저널리스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각종 미디어들이 저지르는 유색인종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모니터하고 적극 대응하는 이 조직의 활동은, ‘소수에 대한 다수의 선입견과 차별’이라는 이 영화의 핵심 테마와 그대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주토피아>의 핵심은, 판에 박힌 디즈니식 자아실현 이야기인 척하는 전반 1시간15분이 아닌, 마지막 30분에 있다. 이 30분 동안 영화는 차별과 편견에 대한 우리의 이중성을 꼬집음은 물론, 겉으론 ‘모두의 평화로운 공존’을 표방하지만 막후에서는 소수에 대한 선입견을 퍼뜨리고 그에 대한 다수의 공포를 이용해 지배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에 대한 야유를 날린다. 이 테마는 영화 초반 ‘주디’가 인용한 루스벨트의 그 유명한 취임사의 한 구절인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공포 그 자체뿐” 대사와, 영화 후반 마침내 정체를 드러낸 악의 축이 읊조리는 “공포는 언제나 통하지”라는 대사로, 마치 괄호를 치듯 천명되고 있다.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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