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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3.11 18:37 수정 : 2016.03.12 11:10

영화 <사울의 아들>은 4:3의 화면비, 밀착 촬영, 얕은 심도와 현미경적인 음향으로 관객에게 극도의 체험감을 선사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사울의 아들

나치와 그들의 만행은 그 유구한 역사는 물론, 멜로부터 심지어 좀비호러물까지 두루 섭렵하는 드넓은 범용성, 그리고 소재의 시대배경이 가지는 묘한 향수까지 구비함으로써 가장 각광받아온 정상의 악의 축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바스터즈>가 히틀러와 그 핵심 참모들을 모두 한곳에 몰아넣고 집단처형 및 화형식까지 거행해버리는 과감무쌍한 역사왜곡을 통해 해묵은 한풀이까지 실현해낸 뒤, 나치 고발 및 응징무비엔 더 이상 개척할 영토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의 아들>이 왔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스포트라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의 힘과 충격은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들로부터 나온다. 다만 다른 것은 <사울의 아들>은 <스포트라이트>가 주로 시나리오에서 한 일을 촬영에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 ① 화면비다. 잘 알려진 대로 <사울의 아들>은 4:3(또는 1.33:1) 표준 프레임을 선택하고 있다. 왕년의 ‘브라운관’ 시대의 티브이(TV)에서나 통하던 이 고색창연한 화면비로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을 시각적 감방 안에 내던진다. 더구나 이 감방은 주연배우로부터 1미터 이상 떨어지지 않는 ② 밀착 촬영(주최측 용어로는 ‘그림자 촬영’)으로 인해 한껏 더 비좁아진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화면의 7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주연배우의 모습은, 혼자 쓰기에도 비좁은 감방을 징벌용 독방 수준으로 좁혀놓는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30퍼센트 정도 남은 화면마저 극도로 ③ 얕은 심도를 고수한 촬영 덕분에 뿌옇게 흐려져 있다. 이 ‘고도근시’ 상태의 화면은 새소리 울려 퍼지는 평화로운 숲을 비추는 맨 첫 장면부터 시작된 뒤 거의 영화의 마지막까지 유지된다.

이렇게 영화는 ①+②+③을 통해 관객을 다짜고짜 아우슈비츠 수감자 상태로 떨어뜨리는 동시에 ‘존더코만도’(처형된 유대인 시체 처리를 전담하는 수감자 특별작업반)인 주인공 ‘사울’의 심리상태 속으로 떨어뜨린다. 그렇다. 이 비좁고 뿌연 시야는 자신이 보고 듣고 행하는 모든 일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려는 사울의 심리적 눈에 다름이 아니다.

이 좁고 흐린 화면은 자연스럽게 시각 외의 다른 감각, 즉 청각을 한껏 끌어올린다. 영화는 그 속을 지극히 현미경적인 ④ 음향으로 꾹꾹 채워 넣는다. 가스실에 갇힌 유대인들의 비명과 울부짖음, 필사적으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이내 잦아드는 그 소리, 그 죽음의 정적에 이어지는 장작 타는 소리 등등, 사울을 둘러싼 죽음의 공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 섬뜩한 소리들은, 졸고 있던 우리의 시청각적 상상력을 걷어찬다. 일어나라! 여긴 아우슈비츠다!

①+②+③+④로 인한 극도의 체험감은 ⑤ 최대한 컷을 배제한 롱테이크 중심의 구성, ⑥ 현장 음악(그 초라한 ‘줄 튕김’을 음악이라고 부른다면 말이지만)을 제외한 모든 음악의 사용을 배제하는 등의 원칙들로 인해 더욱 탄탄하게 다져진다. 그리하여 <사울의 아들>은 말 그대로 ‘교과서에 다 나와 있는’ 기본적 영화언어들만을 가지고 그 어떤 아이맥스도 3D도 구현해내지 못한 체험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시야는 이 ‘극도의 체험감’에만 머물지 않고, 그 너머를 내다본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이야기, 즉 사울이 ‘아들’의 시신과 마주치면서 아들에게 제대로 된 유대교식 장례를 치러주려 한다는 어찌 보면 황당하기까지 한 이야기 때문이다.

죽음이 공기보다 흔한 아우슈비츠 안에서 아들에게 장례를 치러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은 물론 동료들까지도 모두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울, 나아가 결정적인 탈출의 순간에까지 아들의 시신과 장례만을 생각하는 사울의 행동과 심리는 사실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영화는 “너 때문에 우리 다 죽을 거야”라는 동료의 비난에 “우리는 이미 모두 죽어 있어”라고 대꾸하는 사울의 대사로 이에 대한 힌트를 던지고 있다. 즉, 사울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또는 그래야 마땅한 당위)로 받아들이고 있고, 죽기 전에 유대교의 교리를 따르는 ‘정식’ 장례를 치름으로써 자신의 모든 ‘악행’을 속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울과 짧지만 의미심장한 만남을 갖는 여성 수감자는 누구인가? 사울이 목숨을 걸고 데리고 온 ‘랍비’는 진짜 랍비인가? 사울의 ‘아들’은 진짜 아들인가? 아니라면 누구인가? 그리고 마지막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미지의 소년은 누구인가? 또는 무엇인가? 등등.

그런데 이 모든 수수께끼들은, 영화가 자극한 시청각적 상상력만큼이나 우리의 정서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가 하면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한 아우슈비츠 가상현실 체험을 뛰어넘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나아가기 위해 영화가 선택한 것 또한 이야기에서의 ‘보여주지 않기’이지만, 그것은 시각적인 ‘보여주지 않기’와는 달리 그저 흩뿌려진 모호함에 머문다. 감독 라슬로 네메시는 인터뷰에서 “비밀을 품고 있는 영화들이 훌륭하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미스터리가 저절로 상상력의 놀이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이것은 이미 많은 나치 만행-유대인 박해 영화들이 보여준 착시현상, 즉 소재의 무거움(또는 비장함)으로 인해 주제의식의 가벼움(또는 단조로움)이 가려지는 그 착시의 또 하나의 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다룰 때 역시 경계할 함정이기도 하다.

한동원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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