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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1.08 20:06 수정 : 2016.01.09 10:22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온몸 봉헌 연기에도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주최 쪽의 고생과 분투는 보는 이에게도 상당한 고행이 된다. 20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뭔가. 이 강력한 기시감은. 눈 쌓인 겨울 숲, 그 숲을 누비는 전설적인 사냥꾼, 그 사냥꾼을 습격한 야생맹수, 그것을 만들어낸 실감 나는 컴퓨터그래픽(CG·시지), 그리고 아들 잃은 아버지 등등…. 심지어 야생남 눈빛 이글대는 주연배우 얼굴 반쪽 담은 포스터마저도 <레버넌트>와 <대호>는 형제처럼 닮아 있다.

하지만 <레버넌트>가 눈길을 끄는 핵심 이유는 그것이 아닌 ① 배우, 즉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톰 하디 ② 감독, 즉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그리고 ③ 기술, 즉 시지와 롱테이크(컷 없이 길게 촬영하기) 이 세 가지다. 하여 이에 대한 감별.

일단 ③ 기술.

실물 그 자체였다는 칭송 드높았던 <라이프 오브 파이>의 시지 호랑이 ‘리처드 파커’조차도 배우와 살을 맞대는 장면에서는 무릎 베고 눕는 정도의 정적인 동작에 그쳤던 것을 생각하면, 디캐프리오를 물고, 할퀴고, 핥고, 킁킁거리고, 밀가루반죽처럼 굴리는 등등 갖은 동작 자유자재로 보여주는 <레버넌트>의 회색곰은 과연 놀랍다. 이 5분 남짓한 회색곰 습격 장면을 통해 과시되고 있는 할리우드 기술력은 과연 얄미울 정도로 드높다.

더불어 사냥꾼 일행이 원주민에게 습격당하는 도입부의 전투 장면에서는, 이냐리투 감독이 <버드맨>을 통해 ‘내꺼!’라 전세계 향해 찜 선언을 한 스테디캠 롱테이크(컷 없이 길게 이어지는 촬영) 기법이 그대로 재활용되고 있는데, 이 장면에서의 기술력 또한 감탄스럽다. 특히 이편 저편은 물론 주연-조연-엑스트라 등등의 경계까지 모두 지우면서, 달리는 말 위에 오르기도 하고 물속으로 처박히기까지 하는 카메라워크는 긴박한 속도감뿐 아니라 전투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만들어내는 효과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영화의 영업부장 격인 이 두 장면은 전반 20분에 모두 투입되고 있는데, 덕분에 <레버넌트>는 매우 강력한 도입부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장장 2시간 하고도 36분. 앞으로 장장 2시간여의 여정이 남아 있다.

이 2시간여 동안 ② 이냐리투 감독은 웬만하면 시지를 쓰지 않고 전기적인 조명 대신 자연광만으로 촬영을 한다는 원칙, 그리고 최대한 영화 속 시간 흐름을 따라 촬영을 진행한다는 원칙 등등을 세워가며 결코 날로 먹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못박고 들어감으로써, 거의 21세기의 <아기레, 신의 분노>로 거듭나기 위한 야심을 화르르 불사른다.

여기에 ① 남우주연 디캐프리오 역시 적극 합류한다. 영화가 눈 쌓인 숲과 벌판과 계곡과 강을 섭렵하는 동안 그는 눈밭에서 기고, 얼음물에 온몸 던지고, 날생선 날고기를 우적우적 씹고, 눈보라 속에서 홀딱 벗는 등 투혼 불사르며 거의 차력 또는 자해공갈에 가까운 온몸 봉헌 연기를 수행해내고 있다.

이렇듯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는 <레버넌트> 주최 쪽의 고생과 분투는, 그러나 보는 이에게도 상당한 고행이 된다. 왜냐. 그 지난하고도 지독한 생존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향한 일념 불태우는 주인공의 내면에는 거의 어떠한 변화도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언뜻언뜻 삽입되는 ‘백인의 악행’들도 미국(또는 서양) 역사에 대한 성찰이 되기엔 역부족이고 말이다.

하여 결국 주인공의 생존담은 베어 그릴스의 아웃도어 서바이벌 액션다큐 <인간 대 자연>(Man vs Wild)의 옛 서부 버전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그 서바이벌 또한 리얼하거나 참신한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필자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최소한 저체온증으로 세 번 이상은 사망에 이르렀을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주인공 불사의 법칙’의 화신이 되어 동상 하나 없이 말끔하게 살아남는다. 회색곰에게 전신을 난도질당한 빈사 상태에서 말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자연 람보’화 현상은 영화 스스로가 모든 초점을 ‘리얼함’에 맞추고 있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뭐 좋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 그런 거 진지하게 따지지 말자. 좀스럽게.

자, 그렇다면 디캐프리오 및 제작진이 몸 던져 만들어낸 그 지난한 생존의 여정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목적지, 즉 주인공의 복수극은 어떠한가. 이는 2시간에 육박하는 고행 간접체험을 보상해줄 만큼 충분한 영양가를 함유하고 있는가.

스포일러 우려로 상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만 이 복수극은 근래 최고의 수준으로 진부하다. 이 복수에서는 악인도, 주인공도, 심지어 막판에 등장한 ‘신의 손길’마저도 진부함의 중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을 위해 2시간 반의 시간을 달려온 것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영화의 악인 ‘피츠제럴드’(톰 하디)는 “기껏 복수 따위 때문에 그 먼 길을 온 거야?”라는 대사를 돌려주고 있다. 어쩌라고?

한동원 영화평론가
인간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창작 고행으로 빚어낸 156분. 그것은 체험적 예술이 아닌 극장식 체력 테스트였다는 결론으로 오늘의 감별을 갈음한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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