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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7 17:22 수정 : 2019.12.28 13:37

배정한 ㅣ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새내기 배움터행 전세버스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오르는 순간, 계단을 헛디뎌 미끄러지면서 얼굴부터 버스 바닥면에 추락했다. 신입생 맞이한다고 뾰족한 첼시 부츠를 신은 탓은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날렵한 운동신경으로 멋진 낙법을 시전했을 텐데, 스키니 청바지 호주머니에 억지로 욱여넣은 두 손을 도저히 빼낼 수 없었다.

대형 몸 개그를 목도한 동료 교수들은 걱정과 웃음이 절묘한 비율로 혼합된 표정. 이럴 땐 자고로 센 척해야 한다. 턱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뜨끈하고 뭉클한 이물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빈자리에 앉은 뒤 애써 연출한 저음으로 외쳤다. 기사님, 출발합시다. 수영복만 입고 지하철 탄 것 같은 부끄러운 감정이 조금 잦아들 무렵 누군가 휴지를 건넸다. 흥건한 선혈을 대충 닦아내고 살폈더니 턱 주변의 찰과상이 심할 뿐이었다. 순전히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이 넣고 다니는 아주 오래된 버릇 때문에 생긴 사고였다.

고요하고 거룩하다 못해 무료하고 나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2019년 다이어리를 훑어보다가 올해 초의 이 낯 뜨거운 기억을 새삼 떠올렸다. 매년 그렇듯 올해도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실천의 각오를 다지는, 틀에 박힌 문구들을 노트 첫 장에 진하게 눌러썼었다. 하지만 버스 사건 직후, 나는 엄선해 적어놓았던 ‘해야 할 것들’을 지우고 ‘고치고 싶은 버릇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첫 줄에 오른 것이 ‘새해에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자’는 다짐. 빨간 별까지 그려 넣었다.

돌이켜 보면 이 버릇의 역사는 정말 길다. 반바지 밑에 흰 타이츠 신고 창경원에서 찍은 유치원 시절 사진에도, 아파트 주차장에서 열린 반 대항 야구대회 우승 기념사진에도, 교복 입은 까까머리 중학교 소풍 사진에도 두 손은 바지 호주머니 깊숙한 곳에 있다. 고등학생 때의 수영장 사진을 보면 굳이 수영복에도 손이 들어가 있다. 아버지 양복 빌려 입은 학부 졸업전시회 사진에도 예외는 없다. 심지어 박사 졸업 가운을 헤치고 바지로 들어가 있는 손. 무언가를 손에 쥐지 않는 한 나는 늘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 살았다.

이 고질적 습관 때문에 참 많은 지적과 충고를 들어야 했다. 열살 무렵 담임 선생님은 ‘품행이 방정하여 다른 아이들의 모범이 된다’여야 마땅할 생활기록부 가정통신란을 ‘주머니에 손 넣는 습관을 고치도록 각별한 지도를 요망한다’고 채워 어머니의 분을 샀다. 교수직 공채 마지막 관문인 공개 강의가 끝난 뒤 한 원로 교수님이 속삭였다. 아내에게 주머니를 꿰매달라고 하게. 숱한 역경을 뚫고 내 손은 언제나 바지 속 안식처를 찾았다. 이 질긴 고집이 직접적인 신체의 위험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자는 다짐이 영광스러운 새해 목표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여름 어느 날, 이 지면 덕택에 한 출판사의 편집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두차례 기획 모임을 한 뒤 공원에 관한 책을 덜컥 계약했다. 우선 책상보다는 현장과 친해지기로 마음먹고 일요일 밤마다 공원을 걷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늘 그렇듯 새해의 각오는 휘발된 지 오래다. 여전히 호주머니는 두 손을 부른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가장 고치기 힘든 게 이런 자잘한 습관이다. 지난 일요일, 나는 어김없이 바지 깊숙이 손을 넣고 걷다가 공원 산책로의 블랙아이스에 미끄러지며 공중부양을 하고 말았다. 나의 손은 무엇이 불안해서 끊임없이 안식처를 찾는 것일까. 영화에서나 나오던 2020년을 현실로 맞이하며 새 노트에 다시 적는다. 새해에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공원을 걷자. 몸을 이완하고 앞뒤로 팔을 흔들며,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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