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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18 17:32 수정 : 2019.10.19 14:57

김영준
열린책들 편집이사

경수는 받을 돈을 받으러 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형편이 어렵다’며 버티던 선배는 마지못해 돈을 내주며 충고라도 하듯 말한다. “우리 사람 되기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홍상수, <생활의 발견>) 이 유명한 대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는 약간의 파렴치함이 있다. 일을 시켰으면 돈을 줘야 하지 않을까? 우선 너부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경수가 선배의 부당한 프레임에 따지고 들었다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경수는 자리를 뜨고, 대신에 귀에 들어간 것은 반드시 입으로 나온다는 홍상수의 법칙에 따라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이 대사를 사용한다. 사용해 보니 이보다 자유자재로 써먹을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지난 두달 동안 이 편리한 대사가 새삼스럽게 공론의 장으로 불러내졌다. ‘586세대의 내면 풍경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대사’라는 해석도 보았다. 좌절된 이상주의(사람)와 타락의 최저선(괴물)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추락하고 있는데, 바닥이 어딘지 모르는 세대의 두려움과 자성이 표현된 것이라고. 흠.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지만 사실 그렇게 바라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이건가? “마르크스주의를 버렸을지언정 신자유주의에 투항은 하지 말자.” 이것도 가능하겠다. “○○당을 안 찍더라도 ××당은 찍지 말자.” 벌써 지루한 느낌인데,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건강식은 못 챙겨 먹더라도 라면은 먹지 말자.” 라면 대신에 유전자 변형 식품을 넣어도 무방하겠다.

요점은 “사람 되기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이미 경수가 깨달았듯이 어떤 경우에도 통용될 항진명제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 말이 승리감을 준다면, 이게 겉보기처럼 ‘우리 타락하지 말자’는 권유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괴물’로 추락하는 자리에, 그리고 나는 너를 꾸짖는 ‘사람’의 자리에 당연한 듯 배치하는 권력 효과 때문이다. 이 말이 수행하는 것은 권력 투쟁이고, 카를 슈미트의 유명한 말,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다”를 교과서적으로 실천한다. 이 대사에서 586세대의 자성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성이 아니라 꼰대질이 아닐까.

신기하게도 카를 슈미트의 적과 동지 이론도 최근에 호출되었다. 나치에 복무한 이 불길한 사상가까지 불려 나온 것은, 과도한 진영 대립이 국가가 버티지 못할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라는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슈미트의 길로는 가지 말자’고 하는데, 그게 의지로 될 일인지는 모르겠다. 슈미트의 ‘적’은 ‘다르게 생긴 자’이고, 개념 속에 이미 ‘물리적 제거’가 포함되어 있다. 이론상, 정치는 죽느냐 사느냐뿐이다.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1932)에 적과 동지 이론에 도달했다. 말년에 서독(1978)에서 약간 수정한 버전은 그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재치가 있다. “인류에게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권을 가진 동등한 시민들 속에 적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 당시 슈미트는 90살이었는데, 얼핏 평화로운 전후 세계에 대한 노인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다.

그 대사에 왜 ‘괴물’이 나오는가라는 의문은 이렇게 풀린다. 사람을 존중하는 관용적 민주 사회의 역설은, 적을 괴물, 사람 이하의 존재로 호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상대를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주된 정치 투쟁이다. 정치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상대가 괴물로 추락하면 우리는 사람의 자리를 독차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람 되기 어려운데, 그런 방법이 있으니 가슴 벅찬 일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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